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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일라를 구원한 다윗
    설교/사무엘상하 2020. 3. 8. 00:22

    2020년 봄학기 준비특강(4)


    그일라를 구원한 다윗


    말씀 / 사무엘상 23:1∼14

    요절 / 사무엘상 23: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우리 말 중에 ‘내 코가 석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너무 급해서 남을 돌볼 여유가 없다는 말로 쓰입니다. 그런데 왜 코가 석 자인 게 여유가 없다는 뜻이 되는지 아십니까? 내 코가 석 자라는 말은 한자 성어 吾鼻涕垂三尺 (오비체수삼척)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삼척 곧 1m 가까이나 흘러내린 내 콧물을 닦을 여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콧물이 일 미터라니 재밌기도 지저분하기도 한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게 될 다윗의 처지가 바로 자기 코가 석 자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 처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기에 처한 그일라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갑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이 다윗의 목자로서 자세와 그 심정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의 바로 앞장인 사무엘상 22장에는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의 공격을 피해 도망 다니던 다윗은 모압 땅 미스베로 달아납니다. 그러나 언약의 땅인 이스라엘 지경을 벗어난 그 피난처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다윗은 이 명령에 군말 없이 순종합니다. 그가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땅은 유다 땅 ‘헤렛 수풀가’입니다. 이곳은 유다와 블레셋 사이의 국경선이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왜 다윗이 이곳으로 왔을까요? 이는 사울이 찾아내기 힘든 외진 곳으로 도피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또 여차하면 국경을 넘어 블레셋 땅으로 도망갈 수도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다윗은 숨죽인 채 지냅니다. 그러다가 돌발 상황이 발생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다윗이 숨은 헤렛 수풀에서 가까운 그일라 지역을 블레셋이 침략했습니다.한 해 농사를 피땀 흘려 지어 놓았더니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다 빼앗아 가려고 했습니다. 곡식은 물론이고 주민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누가 그일라를 구원해야 하겠습니까?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이들을 구원할 책임은 당연히 사울 왕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별 신경을 쓰질 않았습니다. 그깟 마을 하나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수수방관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은 그일라를 구원하는 일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로 인식합니다. 다윗이 기도하자 하나님은 전쟁에 참여하라고 응답하십니다. 다윗의 처지에서 이곳으로 가서 전쟁을 벌이는 일은 상식 이하의 선택입니다. 여기서 전쟁을 벌이면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게다가 블레셋 민족과 싸움을 벌이게 되면 블레셋에게 완전히 찍히게 됩니다. 국경 근처에 있다가 여차하면 블레셋으로 망명하려던 애초의 계획이 다 수포가 됩니다.


    다윗의 결정에 대한 그의 참모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참모들은 하나같이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어딜 가서 누굴 구원한다는 말입니까?” “구원이 필요한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형님! 이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참모들이 하도 반대를 하니까 다윗은 하나님께 한 번 더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하나님의 대답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응답에 확신이 생긴 다윗은 그대로 밀어붙였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합니다. 그일라 주민들을 구출해 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다윗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만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참모들의 말도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7절에 보면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고 나옵니다. 사울이 보기에는 다윗이 스스로 사지로 들어온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아주 ‘날 잡아가시오.’ 하고 목을 내놓았다고 여겼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한 결과 다윗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그일라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이 목숨을 걸고 달려와서 구원해 준 사람들입니다. 그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배반하고 사울에게 밀고하려 한다는 말씀입니다.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망덕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하나님께 나아가 그일라 사람들이 밀고할지 여부를 물었을까요? 이것은 다윗의 그일라 사람들의 배반을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도와주었던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을 무참히 살해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도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다윗에게 미안하기는 많이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사울에게 다윗을 밀고하려 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얼마든지 그렇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을 도와주러 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어떻게 되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다윗은 사울을 피해 이 광야 저 광야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은혜는 ‘날마다 아슬아슬하게 사울에게 붙잡히지 않는 것’,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했습니다. 숨어 있는 처지에서 자신을 적들에게 노출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면서도 그일라를 구원하러 나섰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결국에는 자신을 배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일라를 구원하러 나섰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일 화나는 사람들은 다윗의 참모들이었을 것입니다. 왜 다윗이 스스로 고난의 길을 자처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굴 도와주겠다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하다못해 위험을 감수했을 때 거기에 상응하는 보답이라도 있으면 해볼 만할 텐데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장사로 치면 손해 보는 장사, 밑지는 장사만 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정말 바보라서 이런 선택을 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자기도 어려운 형편 속에서 그일라를 구원해 주러 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다윗이 나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이스라엘의 목자라는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일라 주민들은 남의 양이 아니라 내가 책임지고 내가 돌봐야 할 내 양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내 양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데 목자인 내가 어떻게 내 형편만 늘어놓을 수 있느냐 하는 심정으로 달려가고자 했습니다. 그 양이 목자를 배신할 가능성이 컸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양은 양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용서하고 감당하는 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의 장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목자의 사명에 충실히 하고자 했습니다.


    요즘 코로나바이러스가 온 나라를 휩쓸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 집에서 나가지도 않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중에서도 우리는 감동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원지로 알려진 중국 우한에 한 한국인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전세기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한에 100명이 넘는 교민이 남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사실은 겁이 나죠. 사망 소식을 들을 때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스트레스가 커집니다. 그래도 우한에서 의사 직업을 가진 한국 사람이 저 한 명밖에 없으니 남아야죠." 뿐만 아니라 최근 대구에서 급증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많은 의료인이 자원했습니다. 60세의 한 여의사는 딸이 ‘엄마 죽으러 가?’ 하면서 말렸지만, 결국 대구로 향했습니다. 66세의 한 노 의사도 지원했습니다. 그는 ‘나처럼 늙다리 내과의가 쓰일 데가 있을까 했지만 그래도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신청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전국에서 몰려든 의료진이 하루에 26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다윗도 그러합니다. 다윗은 자기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들 모두에게는 목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목자의 심정은 생명을 살립니다.


    이 목자의 심정은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모르고 오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이사야서 53장에서 메시야가 이 땅에서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모진 고난과 수치를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예수님은 자신이 가실 길이 어떤 고난의 가시밭길인지 잘 아시면서도 그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무리가 후에 돌변하여 자기를 향해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는 무리가 될 줄 모르셨겠습니까? 가롯 유다가 은전 삼십 냥에 스승을 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부르셨겠습니까? 베드로가 계집종 앞에서 닭 울기 전에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모르고 수제자로 삼으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삼 년 동안 온 힘을 다하여서 열두 제자들을 섬기고 사랑하여주셨습니다. 그 중 가롯 유다를 결국 잃어버렸지만, 끝까지 그를 사랑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알면서도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이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가 되시고 인생들의 선한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자이자 목자로서 자기 양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어떤 고난도 감당할 의지가 있으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목자의 사명이 의미 있고 가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보람된 일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내 코가 석 자인데'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해결해야 내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어떻게 누굴 돌보며 신경 쓸 겨를이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는 낳아놓으면 쑥쑥 크는 줄 알았더니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부모와 형제들, 친척들 일도 처리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앞으로 장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일들도 쌓여 있습니다. 그러니 양을 치고 싶어도, 동역자들을 섬기고 싶어도 내 코가 석 자라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결론에 이르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둘째는 '어차피 안 남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입니다. 입구 정수기 옆에 보면 예전 사진을 보여주는 모니터가 있습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사람의 얼굴을 볼 때입니다. 한 사람을 키우기 위해 그 많은 수고를 했는데 이제는 전화 한 통화, 문자 한 번 주고받기 힘든 사이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 서글퍼집니다. 고생해 봤자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우리를 힘 빠지게 합니다. 양들보다는 자식에게 투자하는 것이 그나마 남는 장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보면 다윗은 내 코가 석 자인데 그일라를 구원하러 갔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배반할 줄 알면서도 그들을 구원하러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목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가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나는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주신 목자라는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목자는 아무리 내 코가 석 자라도 양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목장이고 내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 탓을 하지 않습니다. 양은 양이기 때문입니다. 남아있든 떠나든 목자는 한 양, 한 양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런 목자는 주위에서 볼 때 바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짜 목자는 바보처럼 보이는 목자가 아닐까 합니다. 계산에 빠른 목자를 우리는 삯꾼이라고 부릅니다.


    23장에서 다윗의 모습은 분명 바보 같고 손해만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윗이 이 선택으로 인해 결코 손해를 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일라에서 있었던 일은 이스라엘 전역으로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누가 진짜 이스라엘의 목자인지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위험을 무릅쓰고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사울은 백성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직 정적을 제거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윗이 후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얻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 일에 그일라에서 있던 사건은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단기적으로는 손해일지 모르지만 길게 보았을 때 결코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손해가 아닙니다. 그 길은 열매 맺는 길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일라를 구원한 다윗에 대해 배웠습니다. 목자의 심정 때문에 다윗은 목숨을 걸었습니다. 목자의 심정 때문에 예수님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채찍질로 온몸이 찢기시고, 희롱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 목자의 심정 때문에 우리가 새 생명 얻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다윗과 같이 목자의 마음 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그일라는 어디입니까? 캠퍼스는 이 시대의 그일라입니다. 그곳에는 구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양들이 있습니다. 캠퍼스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과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내 코가 석 자이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목자이기에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시대가 힘들고 상황이 힘들다고 안으로 오그라든 손을 펴서 목자의 소명을 감당하는 2020년 봄학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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