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사도행전 제 34 강 / 이창무
로마의 셋집에서
말씀 / 사도행전 28:1-31
요절 / 사도행전 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서론 - 작지만 세상을 바꾼 공간
우리는 애플(Apple)이라는 기업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애플은 전 세계 시가총액 최상위를 다투며, 우리의 생활 방식을 완전히 바꾼 거대한 IT 제국입니다. 그 시작은 어떠했습니까? 1970년대 중반, 젊은 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는 캘리포니아의 한 주택 차고(Garage)에서 낡은 장비들을 모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고, 소박한 공간이 후에 세상을 뒤흔들 혁신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상황도 이와 너무나 유사합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군인의 감시 속에서 작은 ‘셋집’을 사역의 무대로 삼았습니다. 마치 애플의 역사가 낡은 차고에서 시작되었듯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한 죄수의 초라한 셋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은 모든 장애물들을 뚫고 강력하게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이 어떻게 모든 ‘막힌 것'을 뚫고, 전진할 수 있는지를 함께 배우고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복음은 고난과 역경을 뚫고 나아갑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 바울이 탄 배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14일 동안 표류했습니다. 배에 탔던 276명 모두가 죽음 직전까지 갔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배는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멜리데라는 작은 섬이었습니다.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2)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상황은 여전히 열악했습니다. 비가 내렸고 날씨는 추웠습니다. 옷은 다 젖었고 몸은 떨렸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주민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불을 피워 주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나뭇가지를 모아 불 위에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난파선에서 겨우 살아남았는데 이제 독사에게 물려 죽을 지경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로 가는 길인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너무 억울합니다. 원주민들은 바울을 보며 '저 사람은 필시 큰 죄를 지은 사람이다. 바다에서는 살아남았지만 결국 공의의 신이 그를 벌하는구나'라고 판단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도가 살인자 취급을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5)
바울은 태연하게 독사를 불에 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원주민들은 바울이 곧 붓거나 갑자기 쓰러져 죽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10분, 20분 …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제 바울을 향해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살인자에서 신으로’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인식이 180도 바뀐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도 역경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광풍이 몰아치고, 배가 부서지고, 추위에 떨고, 독사에게 물립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이런 고난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복음을 위해 살면 살수록 더 많은 시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역경이 복음 전파를 막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역경이 복음 전파의 새로운 문을 여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 멜리데 섬에는 보블리오라는 최고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마침 그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의 아버지에게 안수하고 기도하여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9)
섬의 모든 병자들이 바울에게 왔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병만 고쳤겠습니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신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내가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이름 권세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세요.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 틀림 없이 정이 많고 순수한 이 섬 사람들 중 상당수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난파 사고가 없었다면 바울은 이 섬에 올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독사 사건이 없었다면 원주민들이 바울을 주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역경을 사용하셔서 한 번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멜리데 섬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경험한 사건은, 고난이 결코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그분의 섭리가 드러나는 무대임을 보여줍니다. 풍랑 속에서도, 독사에 물린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은 여전히 살아 역사했습니다. 마주한 역경이 복음의 전진을 막는 큰 장애물인 줄 알았는데, 도리어 복음의 새 길을 여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은 단지 견뎌야 할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무대가 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순간에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눈물, 단절, 파산 같은 절망의 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복음의 씨앗을 뿌리시고, 아직 복음이 닿지 않은 곳에 생명의 길을 여십니다.
1866년, 영국의 젊은 선교사 토마스 목사는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려다 순교했습니다. 쇄국과 척화비로 상징되던 닫힌 시대 속에서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경을 전했습니다. 배가 좌초되어 체포된 순간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가진 성경을 사람들에게 건네주며 “예수”라는 이름을 외쳤습니다. 그때 그가 건넨 성경을 받은 이들 가운데 한 관리, 박춘권은 말씀을 읽고 회심하여 자신의 집을 예배처로 내어주었고, 그 집이 평양 최초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비극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 순교는 조선 땅에 복음의 문을 여는 생명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고난은 결코 낭비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그 길을 통과할 때,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고, 우리의 상처는 누군가의 구원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피하기보다, 그것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더 큰 목적을 신뢰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멜리데 섬의 바울처럼, 우리 또한 고난의 자리에서 복음의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난의 때에 우리가 흘린 눈물이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역경을 통과한 우리의 삶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복음은 환경의 제약을 뚫고 나아갑니다
바울 일행은 멜리데 섬에서 석 달을 지낸 후 다시 배를 타고 로마로 향했습니다. 드디어 바울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도착한 바울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6)
바울 옆에는 늘 한 명의 로마 군인이 붙어서 그를 감시했습니다. 잘 때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늘 군인과 함께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꿈꾸던 로마 선교의 모습이었을까요? 바울은 로마에 가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가르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죄수의 신분으로, 좁은 셋집에 갇혀서 로마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자유롭게 거리를 다니며 전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왔는데 왜 저를 묶으십니까? 자유롭게 해주시면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데, 왜 이런 제약을 두십니까?" 이렇게 불평했을 곳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온 지 사흘 만에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했습니다. 자기가 갈 수 없다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오게 만들었습니다. 발상의 대전환이었습니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3)
유대인들이 정한 날짜에 많은 사람이 바울이 머무는 집으로 왔습니다.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 나라를 증언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가지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했습니다.
옴짝달싹 할 수 없던 작은 셋집이 복음 전파를 제한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 제약된 환경 속에서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째, 바울을 지키던 로마 군인들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바울과 24시간 함께 있던 근위대 군인들은 바울의 삶을 지켜보고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빌 1:13). 쇠사슬 때문에 오히려 로마의 황실 근위대가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둘째, 바울은 이 기간 동안 옥중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가 이때 쓰였습니다. 이 중 빌레몬서는 추수감사절 다음 주에 함께 공부할 예정입니다. 만약 바울이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주옥같은 편지들을 못 읽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갈 수 없으면 사람들을 자기에게 오게 했고, 자유롭게 전도할 수 없으면 자기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전했습니다.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면 편지를 써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환경의 제약이 그의 사명을 결코 막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즘 다들 전도가 안 된다고 한숨을 쉽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어려운 시기에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곳이 있습니다. 지난 스텝 가을 수양회에서는 광운 UBF의 전도 사례 발표가 있었습니다. 광운 UBF는 코로나 이후 한층 심해진 전도에 대한 거부감과 학생 리더들의 졸업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때 학교의 허락을 받고 부스를 설치하여 설문지를 작성한 학생들에게 간식과 음료를 나누어 주는 이벤트를 꾸준히 진행했습니다. 적극적인 권유를 하지 않고 학교 생활 안내만 했기 때문에 설문지 응답율이 90% 정도로 놀았습니다.
그리고 받은 설문지 중에 성경 공부에 긍정 반응을 보인 학생들에게 센터에 와서 동아리 소개를 들으면 선물(주로 본 도시락)을 드리겠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찾아 온 사람들만 대상으로 일대일 성경 공부를 연결함으로써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올 한 해 13명의 새로운 양들이 꾸준히 말씀 공부를 하는 외적인 열매를 맺었습니다. 양들이 오니까 리더들이 힘이 나고 보람을 느끼는 내적 열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환경의 제약이 복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제약된 환경 속에서 새로운 복음 전파의 방법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환경을 핑계 삼지 않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헌신할 때, 하나님은 이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환경의 제약을 핑계 삼지 않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창의적이고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내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가 한계를 넘어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작은 셋집’ 같은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복음은 인간의 거부를 뚫고 나아갑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하나하나 풀어가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24,25a)
믿는 사람도 있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투었습니다. 합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흩어졌습니다. 얼마나 실망스러운 결과입니까?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는데, 절반은 거부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해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6b)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고했습니다. 귀가 둔해져서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눈을 감아서 보아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만나는 가장 큰 좌절입니다. 자연의 역경은 이길 수 있습니다. 환경의 제약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완고한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가족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듣지 않습니다. 친구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오히려 관계가 나빠집니다. 동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비웃음을 당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큰 좌절을 느낍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내 방법이 잘못된 건가? 아니면 때가 아닌가?'
그런데 바울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는 유대인들의 거부에 실망했을까요? 낙심해서 포기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들으리라 하더라" (28)
바울은 유대인들이 거부했지만 이방인들은 들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한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무리가 거부하면 다른 무리가 받아들인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0, 31)
여기서 '거침없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원어로 '아무도 막는 자 없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을 막으려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광풍이 있었고, 독사가 있었고, 쇠사슬이 있었고, 유대인들의 거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바울을 막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끝까지 담대하게 거침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러너스는 지난 한 달 동안 사도행전 말씀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11월 2일을 전도 데이를 선포하고 달려왔습니다. 많은 러너스들이 용기를 내어 주변 지인들을 초청했고, 그 노력의 귀한 열매로 지난 주일 예배에 일곱 분 정도가 참석해 주셨습니다. 예배 후에는 게임과 식사를 나누며 러너스 공동체의 따뜻한 사랑과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즐거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처럼 말씀에 순종하여 한 걸음 나아간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함으로 믿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건대, 많은 러너스들이 이번 초청에서 거절당하는 실패를 경험했고, 심지어 복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때문에 안 좋은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결과로 인해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거부나 반응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거절하는 그 벽과 저항을 뚫고 나아가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의 거절은 단지 씨앗을 뿌린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향한 더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에 매이지 않고, 오직 말씀을 전하는 사명에 충실하면 됩니다. 바울처럼,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담대히, 거침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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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끝나지 않은 사도행전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긴 여정의 끝에 도달한 느낌이 듭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그 약속의 말씀대로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사마리아를 거쳐 소아시아로, 그리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지나 드디어 로마 제국의 심장부 로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복음이 로마에 도달하는 방식이 우리의 예상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승리의 행진도 아니었고, 화려한 입성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쇠사슬에 묶인 채 로마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바울의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석방되었을까요? 아니면 순교했을까요? 그런데 누가는 이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 누가는 이렇게 열린 결말로 끝냈을까요? 그것은 복음 역사가 바울의 시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계속되고 진행 중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복음이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예배드리고 있는 것은 바울과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복음의 바통이 우리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다음 세대에게,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에게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행전은 지금도 우리를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와 우리의 다음 세대 또 그 다음 세대도 계속해서 복음의 증인으로 담대하게 거침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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