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사도행전 제 33강 / 이창무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
말씀 / 사도행전 27:1-44
요절 / 사도행전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서론-멈출 수 없는 복음의 항해
바울은 복음 전파라는 사명을 안고 제국의 심장이자 수도인 로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가이샤라에서 로마로 가는 여정에서 그는 먼저 2년간의 지루한 법정 공방이라는 인간의 궤계와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제 배에 올라 로마를 향하는 길에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위력, 곧 맹렬한 광풍과 파선 위기를 뚫고 지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역경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목격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인간의 권력이든 거친 자연의 힘이든 말씀의 확장과 복음의 승리를 위해 그의 종들의 행로 배후에서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과 경험, 자만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명자 바울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인간의 어떤 권력과 자연의 어떤 재앙도 결코 막을 수 없는 '멈출 수 없는 복음의 항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근원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I. 순풍의 때에 교만을 경계하십시오
바울이 탄 배는 가이샤라를 출발하여 여러 곳을 거쳐 힘겹게 그레데 섬 남쪽의 작은 항구인 미항에 도착했습니다.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9)
이 시기는 이미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 항해가 위험한 때였습니다. 태양력으로 9월 말이나 10월 초순. 지중해에서는 강풍이 시작되어 항해가 극히 위험해지는 때였습니다. 파선을 세 차례나 겪어 바다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바울이 그들에게 간절히 권고했습니다.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10)
바울의 권고는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생명을 건지기 위한 절박한 경고였습니다. 그는 이곳 미항에서 겨울을 보낸 후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 모두에게 최선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11)
백부장은 죄수인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했습니다. 선장과 선주 역시 겨울을 나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사진만 잘 나오지 찜질방도 없고 와이파이도 잘 안 터지는 미항은 너무 불편하다. 보다 크고 쾌적한 뵈닉스 항으로 이동하여 월동하자’ 주장했습니다. 우리 짬이면 저 정도 파도는 너끈히 헤쳐나갈 수 있다며 ‘가즈아’를 외쳤습니다.
대다수의 승객들 역시 “한낱 죄수의 뇌피셜보다는 프로들의 말을 들어야 되지 않겠소?”라며 무시하고, 편안함을 찾아 다수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때마침 순하게 남풍이 불어오자 (13절), 그들은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진 줄 알고 의기양양하게 뵈닉스를 향해 출항했습니다.
이 대목이 바로 우리가 순풍의 때에 경계해야 할 교훈을 줍니다. 우리의 삶에는 순풍이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일이 술술 풀리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노력의 결실이 눈앞에 보이는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는 내가 해낼 수 있겠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때일지도 모릅니다. 순풍은 우리 안의 자만을 일깨우는 교묘한 시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머리와 능력, 경험을 의지하려 합니다. 과거의 성공은 자신감을 주지만, 동시에 교만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몇 번의 승리가 쌓이면 경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잘 될 거야.”라는 확신이 점점 하나님의 음성을 밀어냅니다. 평안한 시기일수록 마음은 방심하고, 영혼은 경계심을 잃어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순풍의 유혹입니다.
성경에서도 순풍의 때를 맞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나라가 강성해졌을 때, 한순간의 방심으로 큰 죄를 범했습니다. 솔로몬은 부귀와 지혜를 누리며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자랑스럽게 여기다가 결국 이방 여인들의 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순풍의 때에 넘어졌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일수록,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다”는 겸손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평탄한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종종 작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 작은 경고의 음성을 무시하고 항해를 계속한다면, 예상치 못한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의 바다는 순식간에 뒤집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풍의 때를 경계해야 합니다. 편안할 때일수록 기도의 무릎을 굽히고, 잘 나갈수록 자신을 돌아보며, 사람들이 칭찬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은 방심하라는 신호가 아니라, 더욱 깊이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초대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광풍을 피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순풍 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평안하다면, 그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평안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주님, 저를 인도해 주옵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순풍의 유혹을 이긴 지혜로운 항해자일 것입니다. 우리가 일이 잘 될수록 영적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며 말씀에 민감하게 귀 기울일 수 있는 지혜로운 항해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광풍의 때에 약속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뵈닉스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출발한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배가 바다 가운데로 나가자마자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맑던 하늘은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였고, 잔잔하던 물결은 집채만 한 파도가 되어 뱃머리를 후려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선장과 선원들은 자신들이 가진 실력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광풍에 맞섰습니다. 거룻배를 끌어 올리고, 밧줄로 선체를 둘러 감아 배를 보호했습니다. 악명 높은 모래톱인 ‘스르디스’에 걸리지 않기 위해 닻을 내렸습니다. 살기 위해 아깝지만 수송 중이던 곡물과 배 안의 기구들까지 바다에 내버렸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악천후 속에서 그들의 모든 지식이나 기술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짙은 구름은 해를 가렸고, 밤에는 별빛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와 별이 보이지 않으니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배는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이리저리 떠돌았고, 결국 구원의 여망마저 모두 다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절망과 탄식에 빠져 오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설마 저절로 다이어트가 된다고 좋아했겠습니까? 바울의 말처럼(21절), 애초에 미항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평소 우리가 의지하던 지혜와 지식, 능력은 인생의 광풍이 불어 닥칠 때 철저히 무력화됩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거센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려가는 표류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광풍은 이 세상이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권세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모두가 절망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때, 이 무리 가운데서 우뚝 일어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죄수였던 바울입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2)
바울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습니까? 그의 뛰어난 항해 경험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지난밤, 그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4)
바울은 그의 사명 곧 로마 황제에게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여기서 죽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울 한 사람 때문에 그와 함께 항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까지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나는 자신 때문에 한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을 위험에 빠지게 했던 반면, 바울과 한 배에 탔던 사람들은 바울 덕분에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리더십과 위기관리능력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바울 자신이 위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역경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든 것뿐입니다. 출렁거리는 파도와 거센 바람 너머, 온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바다는 언제나 잔잔한 순항만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거대한 파도와 함께 광풍이 몰아칠 때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이 닥치고, 소중한 관계가 무너지고, 건강이 흔들릴 때,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며 깊은 절망의 바다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때 단순한 낙관이나 긍정의 말로는 우리의 마음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용기와 인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바로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는 믿음, 곧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나옵니다.
광풍이 몰아칠 때 우리의 시선은 종종 당장 눈앞의 위험과 손실에 고정됩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는 믿음은 시선을 현재의 혼돈에서 약속된 미래로 옮겨 놓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영혼에 닻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배가 아무리 요동쳐도 닻이 깊이 내려져 있으면 결코 표류하지 않듯, 말씀에 뿌리내린 믿음은 세상의 파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중심을 세워 줍니다.
더 나아가, 이 믿음은 우리를 수동적으로 주저앉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힘껏 움직여 나가는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믿음은 '결국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단단한 영적인 안전띠를 우리에게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눈앞의 고난 때문에 결국 나는 망할 것이라는 식으로 쉽게 체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어려움이야말로 약속된 축복을 향해 꼭 거쳐야 할 필수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기에 폭풍 속에서도 주저앉는 대신 노를 젓고, 돛을 조정하고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 광풍이 몰아치고 있습니까? 가진 모든 지혜와 능력이 무력해지는 절망의 순간,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경험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있습니다. 바울처럼 담대하게 선포합시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 믿음이 영혼의 닻이 되어 우리가 흔들리지 않게 붙들 것입니다. 우리가 시선을 눈앞의 위험이 아닌,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신실하신 하나님께 고정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파선의 때에 목자가 되십시오
배가 미항을 떠나온 지 열나흘째 되는 밤이었습니다. 여전히 표류하던 중, 사공들은 육지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암초에 부딪힐 위험이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사공들이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구명정을 내려 자기들만 살려고 도망치려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양떼인 승객들을 버리고 달아나는 삯꾼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11년 전 승객을 버리고 가장 먼저 배를 탈출했던 세월호 선원들의 모습에서 이 삯꾼의 비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모습을 바울이 목격했습니다. 바울은 즉시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도주를 막았습니다. 이로 인해 사공들은 구명정을 버리게 되었고, 배를 움직일 인력이 남아 모두를 살릴 기회를 얻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 죄수라며 무시당했던 바울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말에 권위가 생겼습니다. 사실상 이 배의 선장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34)
바울은 빵을 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먹어야 살죠. 살아야 로마에 가서 맛있는 봉골레 파스타도 먹고 고르곤졸라 피자도 먹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모두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떡을 떼어 먹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도 비로소 안심하고 희망을 가지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바울은 단지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다 네게 주셨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닮은 선한 목자로서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를 살리려는 책임감과 이타적인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날이 새자 해안으로 배를 몰았으나, 두 물이 합쳐 흐르는 곳을 만나 배 앞머리가 모래에 박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배가 침몰할 상황에 이르자, 군인들은 로마법 때문에 죄수들이 도망칠 것을 염려하여 죄수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백부장이 나섰습니다. 그는 바울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기에,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군사들을 막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들은 은혜를 알고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백부장의 결정으로 헤엄을 칠 수 있는 자, 널조각과 배 물건을 의지한 자들이 차례로 육지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44b)
결국 바울의 말대로, 그들은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고 모두 구원을 박았습니다. 이 역사는 바울의 능력이 아니라, 바울의 믿음과 사명을 통해 하나님께서 276명 전원의 생명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위기의 때가 오자, 누가 진짜 목자인지, 누가 삯꾼인지는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바울과 같은 선한 목자가 있었기에 모두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기 251년에 키프리아누스 역병이 로마 제국을 덮쳤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병든 가족을 길거리에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 공동체는 정반대로 행동했습니다. 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버려진 병자들을 찾아가 간호했고, 시신을 묻어주었습니다. 로마 사회는 혼란 속에서 유일하게 질서와 사랑이 존재하는 공동체를 목격했습니다. 절망의 '파선'을 맞은 세상에서, 교회가 구명정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일을 기독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광범위하게 확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파선'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통계 자료만 보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의 불안도는 역대 최고 수준에 달하고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절망의 폭풍우 속에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파선, 가정의 파선, 관계의 파선을 경험하며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매년 수많은 이들이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는 비극적인 현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깊은 절망 속에 잠겨 있는지를 웅변합니다.
바로 이때, 사람을 살리는 목자의 역할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삯꾼처럼 자신의 이익과 안전만을 위해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276명의 생명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믿고 모든 사람을 살리려 했던 바울처럼 책임감 있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처럼, 우리 교회가 절망의 파선 속에서 구원의 방주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이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한 목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자격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사명 때문에 우리에게 이 귀한 부르심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안전과 이익만 구하는 삯꾼이 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끝까지 약속을 붙드는 믿음의 항해
우리의 삶에도 순풍의 때가 있고, 광풍의 때가 있으며, 난파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때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순풍의 때에 교만하지 않고, 광풍의 때에 낙심하지 않으며, 난파의 때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때, 우리는 결코 침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믿음이 우리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방주가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세상이 흔들릴 때 믿음으로 중심을 잡고, 절망한 이들을 붙들어 세우는 사람, 말씀을 붙들고 끝까지 항해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한 사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의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그리고 우리의 항해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끝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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