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사도행전 제 32강 / 이창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말씀 / 사도행전 26:1-32
요절 / 사도행전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서론 - 어둠 속에 비추는 하나님의 빛
빛과 어둠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이미지입니다. 창세기는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고, 요한계시록은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빛은 단순히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진리, 생명을 상징합니다. 반면 어둠은 죄와 무지, 죽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사도행전 26장은 한 사람이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진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가 다른 이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번 가을 수양회에서도 ‘빛 가운데 행하는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바로 이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삶에 비추신 그 빛이 오늘 우리 안에도 비추어, 우리의 걸음을 새롭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1.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빛이 없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법정에는 쇠사슬에 묶인 한 죄수가 서 있습니다. 이름은 바울입니다. 그 앞에 앉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수많은 고위 관리들의 시선이 그를 향합니다. 보통의 죄수라면 '억울합니다!', '제가 언제요?' 이러지 않을까요? 그런데 바울은 달랐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2)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놀랍게도 "다행히 여기나이다”였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왕 앞에 선 것이 어찌 다행이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에게 이 자리는 단순히 '재판'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는 감히 접촉할 수 없던 이 나라의 권력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하나님이 친히 마련해 주신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감사는 하나님 섭리를 향한 신뢰와, 복음을 향한 열정에서 비롯된 고백이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영리하게 왕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왕이여, 당신은 우리 유대인의 풍속과 문제를 잘 아시지요. 그러니 제 말을 너그러이 들어주십시오." 이 요청은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복음을 전하겠다'는 진심 어린 초대였습니다.
바울은 가장 먼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으로 살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의 글자 하나하나를 목숨처럼 지키려 했던, 유대 사회의 '극보수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 속하여 철저히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았고, 이스라엘의 '소망', 곧 메시아의 오심을 누구보다 간절히 기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심문을 받는 이유는 바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소망 때문입니다!"라고 바울은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입니까? 과거에는 그 '소망'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그가, 이제는 그 소망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빛을 받기 전, 가장 어두웠던 자신의 모습을 꺼내 놓습니다. 끔찍했던 자신의 과거를 숨 막힐 정도로 구체적으로 고백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해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죽일 때에 찬성 투표를 하였고…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9-11)
바울은 수많은 사람을 옥에 가두었고,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에 직접적으로 가담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고문하여 예수님을 저주하는 말을 강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열심의 강도가 얼마나 컸던지, 예루살렘을 넘어 멀리 외국 도시까지 쫓아가 박해했습니다. 가장 소름 끼치는 구절은 이것입니다. "나도 ...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바울은 그 모든 악행을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고 싶어 합니다. 실패, 죄, 수치, 방황의 순간들을 가리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자신의 흑역사를 가감없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빛은 어둠을 드러내야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드러날 때, 그 위로 비추는 하나님의 빛이 얼마나 찬란한지를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어둠을 기억하고 고백하는 것은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은혜의 무게를 아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은혜는 과거의 어둠을 잊은 사람에게는 값싸 보이지만, 자신의 죄와 무지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어둠을 깊이 알수록 빛은 더 눈부십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교만을 막는 영적 훈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이 깊어졌다고 생각하며 은근한 우월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어둠을 기억하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멸시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한때 같은 어둠 속에 있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의 죄를 볼 때 정죄하기보다, 불쌍히 여기고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어둠을 드러내는 것은 복음의 빛을 드러내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내 어둠을 어떻게 빛으로 바꾸셨는지를 증언하는 것만큼이나 호소력 있게 복음을 전할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과거를 통해 빛의 능력을 증언합니다. 어둠의 깊이를 아는 사람만이, 은혜의 깊이를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이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도, 지난 여름 수양회에서 인생 소감이 그토록 은혜가 되었던 이유도 모두 다 빛이 없던 과거를 기억하고 은혜의 빛 아래에서 진솔하게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과거의 어둠을 잊지 않게 하시고, 그 속에서 역사하신 은혜를 늘 기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어둠에서 불러내신 주님을 찬양하며, 그 빛 가운데 담대히 걷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2.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빛을 만난 사람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인생에 찾아왔던 결정적인 전환점에 대해 말합니다. 바로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들고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예수의 추종자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13)
정오의 태양은 세상의 가장 강력한 빛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밝은 빛이 그를 덮쳤습니다! 이 빛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의 빛이었습니다. 바울과 그의 동행들은 그 강력한 빛 앞에서 저항할 수 없이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때 바울은 눈이 멀었습니다. 칠흑 같던 어둠 속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
바울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믿었는데,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은 그를 '박해자'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박해의 대상이 누구인지 밝혀졌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15)
이 짧은 한 마디가 바울이 평생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단숨에 산산조각 냈습니다. 그가 그렇게 경멸하며 짓밟았던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계셨습니다. 그 동안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 자들을 괴롭히고 가두고 죽이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껏 내가 소방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방화범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이 네게 고생이다." 마치 억지로 끌려가면서도 버티다가 가시채에 더 세게 찔리는 소처럼,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은 결국 자신에게 상처만 더하는 고통스러운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열심히 살았으나, 그 방향이 잘못되었기에 스스로를 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쓰러진 바울을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이것은 일어서라는 명령이 아니라 "네 정체성을 완전히 바꿔라! 새로운 사명으로 서라!"는 선포였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율법의 광신도도, 성도들의 박해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주님의 종과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새로운 임무는 명확했습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18)
이 말씀 속에는 네 가지 위대한 전환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눈을 뜨는 전환입니다. 영적으로 눈이 감긴 상태에서 보는 상태로의 전환입니다.
둘째,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입니다. 이것은 무지에서 진리로, 죄에서 의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셋째,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의 전환입니다. 지배자가 바뀌는 것입니다.
넷째, 죄 사함과 기업을 얻는 전환입니다. 과거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놀라운 전환입니다.
바울은 이 네 가지 전환을 자신이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는 빛을 만났고, 어둠에서 뽑혀 나왔으며, 사탄의 하수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심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예수님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알았지만, 그를 박해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처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 만남이 우리의 모든 방향과 정체성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말씀공부를 중심으로 신앙의 기초를 세워 온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예수님에 대해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해온 사람일수록,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익숙할수록 이 질문이 더 절실합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곧 주님과의 만남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어릴 적부터 여기서 말씀을 듣고 자라온 분들이 많습니다. BBF 때부터 성경을 배우고, 각종 수양회를 통해 신앙의 언어를 배워온 세대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부모의 신앙, 공동체의 분위기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진정한 나의 ‘다메섹의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교회의 빛 아래서 자랐지만, 정작 그 빛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건입니다. 그 만남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며, 사명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성경공부를 잘하는 공동체’에서 멈추지 않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공동체’, ‘빛을 비추는 증인의 공동체’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럴 때, 오래된 믿음은 새로워지고, 어릴 적부터 자라온 신앙은 자신의 고백으로 단단해질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빛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새로워 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안암 1부가 빛을 만난 증인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빛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왕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19)
이 한 마디는 지금까지 그의 인생 전체를 규정하는 선언문이었습니다. 빛을 만난 이후, 바울의 삶의 방향은 더 이상 자신이 주도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빛의 명령이 가리키는 곳으로 걸었습니다. “거스르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히 반항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태도가 아닙니다. ‘빛의 명령에 완전히 자신을 맡긴 삶’, 곧 전적인 순종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걸고 이 선언을 한 것입니다.
바울의 순종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다메섹에서 시작된 복음 전파의 물결은 예루살렘과 유대 온 땅을 넘어, 이방의 땅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그는‘빛을 본 자’로서 그 빛을 나누기 위해 멈추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과거에는 예수의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던 그의 발걸음이, 이제는 그들을 구원할 복음을 들고 가는 발걸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개와 순종의 삶을 통해 빛을 만났음을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종의 대가는 적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는 오늘까지 서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23)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셔서 모든 사람에게 빛이 되셨습니다. 빛을 만난 사람은 빛의 통로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그 놀라운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는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안전을 포기하고, 명예를 포기하고,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이때 총독 베스도는 바울의 말을 “미쳤다”고 비웃었지만, 바울은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라고 담대히 응답했습니다. 베스도 입장에서는 이해가 갑니다. '하늘에서 빛이 비췄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당신 정신 좀 차리세요!' 이랬을 겁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의 설득에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구나”라며 머뭇거렸습니다. 그는 진리 앞에서 살짝 마음이 움직였지만 끝내 복음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결박된 손을 들어 “이 결박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결박된 자가 자유를 선포하고, 세상의 권력자가 죄의 결박에 묶여 머뭇거리는 역설이 일어난 것입니다. 빛에 순종하는 삶은 세상의 척도로 볼 때 '손해'이고 '어리석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종을 통해 바울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영혼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 러너스는 11월 2일에 전도 데이를 잡고 주변 사람들을 초청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전도 경험담을 러너스 카톡방에 올리고 있는데 참 감동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봉사활동 후 카페 한켠에서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며 복음의 다리를 놓았습니다. 또 다른 분은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3–4)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어떤 분은 전도 데이를 준비하며 “나 같은 친구도 초청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이 모두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진’ 순종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이 공통적으로 이 말씀을 함께 언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다니엘 12:3)
러너스의 걸음은 작지만,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식사 약속을 잡고,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는 그 모든 순간이 바로 복음의 빛이 비추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그물은 아직 찢어질 만큼 가득 차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그물은 반드시 채워질 것입니다. 사랑과 섬김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러너스의 순종은 이미 주님께서 일하시는 현장입니다. 작은 순종을 통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러너스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분의 빛이 우리를 통해 반사되어,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순종 속에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경험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빛 가운데 사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다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점점 더 어두워져 가는 세상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상대주의와 물질만능주의, 쾌락주의와 이기주의가 일상처럼 자리 잡은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진리의 기준을 잃고 방황하며, 소망 없이 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하나님은 우리를 빛 가운데 사는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빛이 없던 과거를 기억하고, 빛이신 예수님을 날마다 새롭게 만나며, 그 빛에 순종하여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가정과 직장, 학교와 이웃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사람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세상의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하나님의 빛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빛 안에 거하며, 세상 속에서 꺼지지 않는 빛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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