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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by 목자 이창무 2025.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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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사도행전 제 31 강 / 이창무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말씀 / 사도행전 25:1-27
요절 / 사도행전 25: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서론 - 섭리의 실타래를 푸시는 하나님

요즘 드라마나 웹툰을 보면, 작가가 초반에 던져 놓은 소위 ‘떡밥’을 마지막에 멋지게 회수할 때 우리는 감탄합니다. “와, 이게 여기서 이렇게 이어지네!” 처음엔 의미 없어 보였던 대사, 별것 아닌 장면이 알고 보니 다 큰 그림이었을 때, 우리는 소름이 돋습니다.

그런데 이런 ‘떡밥 회수’의 원조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장면 속에 떡밥을 심어 두셨다가, 때가 되면 완벽하게 회수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 이 사건이, 이 만남이, 그때의 눈물이 이걸 위한 거였구나.”

이것을 가리켜 섭리(攝理)라고 부릅니다. 섭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던져 두신 복선들이 있습니다. 당장은 그것들이 혼란스럽고, 엉킨 줄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 하나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실마리를 회수하시고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사도행전 25장의 바울 역시 그렇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고, 정치인들은 음모를 꾸미며, 모든 것이 꼬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복선을 엮어 로마 복음화라는 대서사를 완성해 가십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바울의 인생 여정을 어떻게 이끌고 있는지 세 가지로 함께 살펴 보고자 합니다.

Ⅰ. 하나님의 섭리는 악으로부터 택한 자를 보호합니다

새로운 총독 베스도가 부임했습니다. 베스도는 뇌물을 사랑했던 전임자 벨릭스와는 달리 유능하고 공정한 총독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부임하자 마자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찾아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꽃바달을 들고 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신 바울에 대한 고발장을 들고 왔습니다. 2년이 지났지만 바울에 대한 악의를 조금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신임 총독이 어리버리할 때 새로운 기회를 만들려 했습니다.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재판을 받게 해달라." 그들의 요청은 겉으로 보기에는 합리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음흉한 계획이 숨어 있었습니다. 길에서 매복하여 바울을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살인 음모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40여 명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던 일이 있었습니다(행 23:12-13). 그때는 실패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악의 본질을 봅니다. 악은 끈질깁니다. 마치 좀비들 같습니다. 끝났나 싶을 때 또 일어납니다. 악은 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립니다. 이 악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일꾼을 끊어버리려는 영적 세력이 있었습니다. 사탄은 복음의 전진을 막기 위해 바울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이제 갓 부임한 신임 총독 베스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요청에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4,5)

베스도는 그들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새로 부임한 총독으로서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전임 벨릭스가 유대인들과의 갈등으로 해임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부임 초부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일은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베스도는 원칙을 지켰습니다. 로마 시민인 바울은 로마 법정에서 재판받아야 한다는 법적 원칙이었습니다. 그가 정의감에서든, 정치적 계산에서든, 결과는 같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암살 음모로부터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이 결과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시점에 베스도를 총독으로 세우셨습니다. 만약 소심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이송되어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사람을, 가장 필요한 때에 세우셔서 당신의 종을 지키셨습니다.

물론 베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는 단지 행정적 판단을 내렸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그 판단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보호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자의 결정조차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계획 속에서도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악의 세력이 강해 보이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동유럽, 중동 등등 세계 곳곳에서 참혹한 전쟁의 소식이 계속 들려 옵니다. 다음 차례는 어디가 될라 불안합니다. 대만일까요? 한반도일까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 안에서 내전이 발발할 수도 있다는 믿기 힘든 뉴스까지 들려오고 있습니다. 세상이 정말 어떻게 되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기 쉽습니다. "이렇게까지 악이 강한데, 과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의심이 듭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악이 강해 보일수록, 하나님의 섭리는 더 깊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섭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상황은 우리를 속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 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합니다.

지난주, 마태 게루스 목자님과 권희 레베카 선교사님 가정이 마침내 우크라이나로 출국하셨습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그 땅으로 떠난다는 소식에 많은 분들이 마음으로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지금까지 이 가정을 놀랍게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며 믿음으로 그들을 맡겨 드립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사역은 인간적으로 보면 위험하고 불확실한 여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그들의 믿음은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과 감동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의 어둠 속에서도 그들을 지키시고, 복음의 빛을 전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기도로 동역하는 것입니다. 이 가정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그리고 우크라이나 땅에 하나님의 평화와 회복이 임하도록 계속 기도합시다.

Ⅱ. 하나님의 섭리는 길을 찾는 자에게 길을 보여줍니다

베스도는 예루살렘에서 8~10일을 머문 뒤 가이사랴로 내려와 재판을 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바울을 둘러싸고 여러 혐의를 제기했으나, 그 어떤 증거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들의 법이나 성전, 혹은 가이사에게도 죄를 범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자 베스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울에게 묻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겠느냐?” (9절) 이 제안은 겉보기엔 합리적이었지만, 실상은 바울을 죽음의 위험 속으로 몰아넣는 함정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바울을 매복하여 죽이려는 암살단원들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바울은 신속하고 분명한 결단을 내립니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11)

이 상소는 법적으로 무죄 선고를 위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감옥에 갇힌 그날 밤에 주신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행 23:11)

그 약속은 바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 있고, 자유를 잃은 몸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길을 찾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고 해서 수동적으로 앉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로 갈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고, 주신 기회가 올 때 즉시 붙잡았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로마법 그중에서 형사 소송법을 샅샅이 찾아 공부한 것 같습니다. 변호사 자격이 없으면서 법률에 대해 해박한 사람을 만주 변호사라고 부르는데, 바울도 거의 만주 변호사 급이었습니다.

결국 베스도는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다.”(12절)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 한마디로, 바울은 로마로 향하는 공식적인 길을 얻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길은 로마 제국의 군인들에 의해 호위받는 안전한 여정이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건, 모든 비용이 ‘로마 정부 지원금’으로 충당되었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국비 선교 여행’이 된 셈입니다. 감옥 신분으로 출발했는데, 하나님이 항공권과 비자를 다 처리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섭리입니까? 인간의 제도와 법, 심지어 정치적 이해관계까지도 하나님은 복음의 길로 사용하십니다. 로마의 시민권, 로마의 법정, 로마의 상소 제도,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했다면, 그는 길에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결단했고, 하나님은 그 결단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 로마까지 전해지는 사도행전의 대서사 속에서, 바울의 상소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을 실현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결단은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를 현실 속으로 끌어오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붙들고 믿음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믿음의 순종은 '운명적 체념'이 아닙니다. "에이, 어쩔 수 없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무책임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능동적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과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떠올리면,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겹쳐집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십 년을 감옥에서 보냈던 앤디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일 밤 작은 망치로 벽을 조금씩 파내며 ‘길’을 만들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그 길은, 어느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그를 자유로 인도했습니다. 그가 좁은 하수구를 지나 밖으로 나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비를 맞는 장면은, 절망의 감옥 속에서도 길을 찾는 자에게 결국 자유의 문이 열린다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막연히 기다리기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길을 물으며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며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는 자에게 하나님은 길을 보여주십니다. 혹시 지금 막막한 상황에 처해 계십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한데 길이 보이지 않습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고민하십시오. 연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이 반드시 있습니다.

Ⅲ. 하나님의 섭리는 복음을 증언할 새로운 기회를 엽니다

수일 후, 가이사랴에 놀라운 방문이 있었습니다. 아그립바 2세와 그의 누이 버니게가 새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을 예방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겉보기에는 의례 있을 법한 정치적 인사 방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만남 뒤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아그립바는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으로, 유대 종교 문제에 정통한 인물이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해했습니다. 황제에게 보고서를 올려야 하는데, ‘혐의 없음’이라고 쓰자니 이상하고, ‘혐의 모름’이라고 쓰자니 더 이상했습니다. 그때 베스도가 아그립바에게 이 사건을 이야기했고, 아그립바는 흥미를 보였습니다.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22)

이 단순한 대화 한마디가 하나님의 섭리의 문을 열었습니다. 다음 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위엄 있는 복장을 하고 천부장들과 도시의 고위 인사들과 함께 접견장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이스라엘 땅 안에서 힘 좀 있다는 모든 사람들을 한 자리에 다 모아 놓고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렇게 역설적으로 역사합니다. 세상의 법정은 바울을 심문하려고 열렸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를 복음이 증언되는 강단으로 바꾸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고위층 인사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 억울한 죄수의 신분마저도 복음의 도구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합니다. 때로 우리는 직장, 학교, 또는 가정 등에서 어쩔 수 없는 제약에 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조차 복음의 문을 여십니다. 바울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에 왕 앞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제약과 한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불리한 현실을 복음의 가장 유리한 기회로 바꾸십니다.

이것이 바로 섭리의 역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복음의 문을 여시고, 그 문을 통해 당신의 구속사를 완성해 가십니다.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과거 벤처 회사의 창업 멤버로 일할 때였습니다. 하루 종일 회사에 매여 살았습니다.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전도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살면 언제 복음을 전할 수 있나” 하는 답답함이 늘 마음에 있었습니다. 몸에는 쇠사슬이 없었지만, 마음은 묶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가 전도할 사람들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이 회사 안에 있다.” 그 순간 제 시야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일터가 사역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조심스럽게 성경공부를 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명이 응했고, 곧 두 명, 세 명이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마다 회의실에 모여 김밥을 나누며 요한복음을 공부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믿음 안에 굳게 서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제한되어 있어도, 하나님은 그 안에서 복음의 길을 여신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다음 주 우리 가운데 영혼의 힐링 콘서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묶여 있던 바울에게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친구 관계 속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십니다.

이번 한 주를 복음의 문을 여는 한 주로 삼았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 떠오르시게 하는 한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초대해 봅시다. 그 초청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생명의 문을 여는 초대장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 - 삶은 복잡한 것이 아니라 미완성일 뿐

우리는 종종 인생이 너무 복잡하다고 말합니다. 일이 꼬이고, 관계가 엉키고,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보면, 우리의 삶은 복잡한 것이 아니라 아직 미완성일 뿐입니다.

예술가가 한 폭의 그림을 그릴 때, 중간 단계에서는 색이 뒤섞이고 형태가 불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작가의 손 안에서 모든 선과 색은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어 갑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고난과 실패, 기다림의 시간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엮어 당신의 완전한 섭리 속에서 이루어 가십니다.

믿음이란 ‘완성된 인생’을 보는 눈이 아니라, ‘완성될 인생’을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지금은 복잡하고 어두워 보여도, 하나님은 한 줄 한 줄 복선을 엮으시며 선한 계획을 완성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들까지도 결국 하나님의 완벽한 이야기 안에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미완성의 시간을 믿음으로 견디어야 합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모든 복선을 회수하실 날이 옵니다. 그날 우리는 고백할 것입니다. “아, 이 눈물도, 이 기다림도, 다 주님의 완벽한 계획이었구나.”

우리의 인생이 얽혀 있는 것 같을 때에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완성의 시간을 조급함이 아니라 감사로 견디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성하실 그날 이렇게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주는 참으로 완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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