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사도행전 제 28 강 / 이 창무
담대히 복음을 증언한 바울
말씀 / 사도행전 21:27–22:29
요절 / 사도행전 22: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서론: 증인은 누구인가
1894년,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스파이 혐의로 억울하게 종신형을 선고받은 것입니다. 그는 무죄였지만,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반유대주의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법과 정의는 침묵했고, 사람들은 권력 앞에 굴복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소설가 에밀 졸라였습니다. 그는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발표하며 군과 정부의 부당함을 정면으로 지적했습니다. 그 한마디로 그는 재판에 넘겨지고 결국 망명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용기 있는 증언은 사회를 뒤흔들었고, 결국 드레퓌스는 무죄 판결을 받고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증언이 역사를 바꾼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도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에밀 졸라처럼 용기 있게 증언할 사람으로 그렇게 해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증인이 누구인지 배우고자 합니다.
1. 증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습니다 (21:27-40)
먼저 바울이 처한 상황을 살펴봅시다. 아시아로부터 예루살렘에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발견하자마자 온 무리를 이렇게 거짓 뉴스로 선동합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28)
그 소리는 삽시간에 불길처럼 번졌습니다. 성전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바울을 끌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최근 네팔에서 일어난 폭동 사태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주먹과 발길질이 쏟아지고, 분노의 외침이 뒤엉킨 그곳에서 바울의 생명은 한 순간에 꺼져버릴 듯 위태로웠습니다.
그런데 이때 로마군의 천부장이 급히 달려옵니다.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수비대가 성전 광장의 소동을 보고 급히 출동한 것입니다. 천부장은 상황을 진압하기 위해 바울을 체포하고 쇠사슬로 결박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끌려가면서 천부장에게 한 가지를 요청합니다.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39)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재앙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을 제게 허락하셨습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고난을 주시나요?” 하고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을 “하나님이 주신 복음 증언의 기회”로 보았습니다. 자신을 죽이려 달려든 바로 그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무대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에게 연설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허락해 줄지 안 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던져 본 것입니다.
죽음을 외치는 군중 앞에 서겠다는 이 요청이 얼마나 비상식적으로 들립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증인의 모습입니다. 바울에게는 자신의 명예와 안전보다 복음을 전할 기회가 더 소중했습니다. 그는 폭도의 눈빛 속에서도 영혼의 갈급함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그는 그들 안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할 영혼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종종 현실을 탓하곤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내가 어떻게 복음을 말하나, 조금 더 분위기가 좋아지면 말해야지.” 그런데 솔직히 복음 전하기 좋은 분위기는 도대체 언제 오는 것일까요? 그러다가 영영 다시 기회가 안 오면 어떻게 합니까? 때로는 기다림이 필요한 순간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복음 전도는 소방관의 구조 작업과 같습니다. 소방관은 불길이 잦아들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화염 속에서도 뚫고 들어가서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증인은 상황이 절망적일수록, 길이 막힌 것 같을수록, 그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 새로운 기회를 찾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사회 전반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는 교회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거센 세속화의 물결 때문입니다. 동시에 교회 스스로 신뢰를 잃어버린 결과이기도 합니다. 언론을 통해 반복적으로 드러난 일부 목회자의 비리와 교회 내 갈등은 개신교 전체의 이미지를 크게 훼손했습니다. 코로나19 시기 방역 지침과 관련한 불협화음, 정치적 이슈에 대한 교회의 입장 표명 과정에서 생긴 오해들이 교회에 대한 사회적 반감을 키웠습니다.그 결과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받는 시선이 예전만큼 우호적이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복음을 전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에게서 복음의 증인은 상황을 탓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 실낱 같은 기회라도 찾고자 애를 씁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삶으로 복음을 증언할 기회를 구해야 합니다.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 그리고 그 기회를 통해 열매를 거두게 될지 말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증인으로 세우셨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전도를 섬기는 분들이 계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입술과 삶이 언제나 복음을 증언하는 통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증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복음의 증언으로 바꿉니다 (22:1-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22;1)
드디어 바울의 증언이 시작됩니다. 바울은 먼저 청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갑니다. 자신의 출생(3절), 교육 배경(3절), 과거 유대교에 대한 열심(4-5절)을 말하며 공통점을 찾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나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나도 당신들과 같은 뿌리와 열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단순히 교회를 반대한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까지" 박해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6절부터 그의 이야기는 완전히 바뀝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경험을 생생하게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부터 바울의 인생은 180도 바뀝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의 증인인 아나니아의 말을 이렇게 인용합니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15)
여기서도 ‘증인’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증인은 사상을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철학을 논하는 학자가 아닙니다. 증인은 자신이 직접 본 것, 직접 들은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가감없이 열어 보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증언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흑역사조차 결국 은혜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이야기로 바꾸십니다. 상처 많던 지난날, 실패로 얼룩진 과거, 죄로 인해 무너졌던 시간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언하는 도구가 됩니다. 어거스틴이 자기 방탕했던 삶을 고백록으로 남겼던 것처럼, 존 뉴턴이 노예선을 몰던 끔찍한 과거를 찬송시로 바꾼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예수님에 대한 증언의 소재로 사용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감추려 합니다. 실패는 드러내기 부끄럽고, 상처는 감추고 싶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증인은 그 감추어진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드러낼 증언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과거는 빛을 더욱 밝게 드러내는 배경이 되고, 절망의 골짜기는 은혜의 샘물이 솟아나는 우물터가 됩니다.
오늘날 AI 기술이 발달하면서 가짜뉴스와 딥페이크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온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발산합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 중에는 과장이나 비교와 자랑이 섞여 있기도 합니다. 진솔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에 목말라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 우리가 복음의 증인으로 서면 어떨까요? 화려하지 않아도 "내가 만난 예수님, 그분이 내 삶을 어떻게 바꾸셨는가"를 말하는 소박한 이야기가 그들에게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꼭 극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의 신앙 여정은 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작은 변화라도 괜찮습니다. 거창한 체험이 아니어도 충분합니다. 변한 듯 변한지 않은 것 같은 조용한 성장도 좋습니다. 솔직한 간증, 은혜의 고백을 나눌 때, 누군가의 마음이 열리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 대부분 다 이미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처와 회복, 눈물과 기쁨, 작은 순종과 성장이 곧 복음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나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이야기와 연결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과거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하고 현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 봅시다. 그리고 주저하지 말고 그 은혜를 내 주위 사람들에게 진솔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설득력 있게 증언하는 길입니다. 그때 우리는 복음의 증인이 되고, 듣는 이들 중의 누군가의 마음에 울림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3. 증인은 자신의 조건을 복음을 증언할 도구로 사용합니다 (22:22-29)
바울의 라이프 테스티모니를 들은 유대인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바울이 기대했던 반응과는 정반대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다메섹에서의 회심 경험을 증언하고,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상을 본 것까지는 참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를 폭발시키고 말았습니다.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22절)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그때 그 무리들처럼 외쳤던 소리가 또 터져나왔습니다. “없이 하소서!” 상황은 다시 순식간에 폭력적인 위기로 치닫습니다. 천부장은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바울을 채찍질하며 심문하라고 명령합니다(24절). 이제 바울은 피투성이가 되어 죽음 직전까지 몰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은 뜻밖의 한마디를 던집니다.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25절)
순간 분위기가 싸해집니다. 로마 시민을 정죄 절차 없이 채찍질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불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천부장이 놀라 “나도 돈을 많이 주고 이 시민권을 얻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얼마를 주고 샀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시크하게 한 마디를 합니다. “응, 나는 태어날 때부터야.”
지금까지 바울은 돈 주고도 쉽게 살 수 없는 로마시민이라는 특권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사람들과 위화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순간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얻기 위해서 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후에 그는 총독 앞에서, 왕 앞에서, 심지어 로마 황제 앞에서도 복음을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조건을 자기 자랑거리로 쓰지 않고, 복음을 증언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증인의 태도입니다. 로마 시민권 뿐만 아니라 바울은 정통파 히브리인으로서의 모든 조건, 헬라어 실력과 헬라 문화를 이해하는 교양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신의 영광이나 성공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오직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꼭 필요한 순간에 조심스럽게 꺼내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각기 다른 조건들을 주셨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박사 학위가 있고, 어떤 분에게는 한 분야에서 수십년 쌓아올린 경험이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적 재능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언어적 재능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교수나 대기업 임원 같은 사회적 지위가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 조건들을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씁니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큰 명예를 얻기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증인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 조건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도구로 씁니다. 그것이 복음의 증인으로 살려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입니다.
모세는 애굽 왕궁에서 배운 지혜와 권위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드려 이스라엘을 인도했고, 다윗은 목동 시절 익힌 물맷돌과 음악의 재능을 하나님께 드려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시편의 찬양을 남겼습니다. 어거스틴은 방탕한 삶을 회개한 뒤, 철학과 수사학을 복음을 변증하는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출신과 재능, 배경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질 때 복음을 증언하는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조건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의 출신, 교육, 직업, 재능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자리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드릴 때, 하나님은 놀라운 방식으로 그 조건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으로, 주어진 조건을 복음의 도구로 바치며, 오직 예수님을 높이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전도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바울의 모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절망적인 상황도 기회로 바꾸고, 자신의 어두운 과거도 복음의 증언으로 바꾸며, 로마 시민권이라는 특권까지도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요? 바울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서라도 복음을 증언하게 만든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의무감이었을까요? 물론 의무감도 있었겠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해야 한다"는 당위성만으로는 죽음까지 각오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목숨을 걸고 군중들 앞에서 서게 만든 힘을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특별히 동족 유대인을 향한 애타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로마서 9:1-3)
바울의 마음에는 동족들의 구원을 위한 간절함이 산모의 해산 고통처럼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구원까지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동족을 향한 사랑은 이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전혀 모르고 도리어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들처럼 복음의 원수되었던 자신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힌 바울은, 그 사랑을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그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에 대해, 복음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전도는 사랑입니다. 의무감만으로 하는 전도는 부담스럽습니다. 거부당하면 상처받고, 어려움이 오면 쉽게 포기합니다.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무거운 짐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하는 전도는 다릅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거부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을 만난 은혜와 사랑에 사로잡혀 증언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탓하지 말고, 두려움에 주저앉지도 말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와 조건을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곁에는 그 사랑의 증언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가족 가운데, 직장과 학교 가운데, 이웃 가운데, 캠퍼스 가운데 심지어 SNS를 통해 연결된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히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증언을 사용하여 그들의 마음을 여시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이 땅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울처럼 사랑으로 증언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차갑고, 전도가 어렵다 해도,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 사랑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성도가 될 때, 하나님은 반드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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