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사도행전 제 27 강 / 이창무
주를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한 바울
말씀 / 사도행전 21:1-26
요절 / 사도행전 21: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서론 - B와 D 사이의 C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라고 했습니다.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 즉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인생은 선택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서 서게 됩니다. 어떤 학교에 갈 것인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같은 큰 선택부터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을 것인가, 짬뽕을 먹을 것인가, 짬짜면을 먹을 것인가 같은 작은 선택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 안에서는 내적인 갈등이 일어납니다. 본능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가치를 따를 것인가 하는 고민입니다.
그때마다 우리 안에서 두 목소리가 부딪칩니다. 본능은 속삭입니다. “조금만 쉬어. 안전한 쪽으로 가. 상처받지 않는 길을 택해.” 반면 가치가 외칩니다. “비록 손해가 있어도 옳은 길로. 편안함보다 진실로. 이익보다 사랑으로.” 본능의 계산과 복음의 확신이 충돌할 때, 우리의 선택은 곧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우리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인격이 됩니다. 인생은 결국 선택의 총합이고, 그 합은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갈림길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우리는 바울의 선택을 따라가며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주님의 제자는 무엇을 기준으로 결단하는지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1. 때로는 고난이 있음을 알면서도 가야할 때가 있습니다 (21:1-11)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중에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예루살렘에 가야만 하는 특별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이방인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모은 구제 헌금을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단순한 물질 전달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한 몸”임을 눈에 보이게 하는 일, 복음이 민족과 문화를 넘어 하나로 묶는다는 하나님의 뜻을 세상 앞에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너무도 중요했고, 바울 자신이 직접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행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곳곳에서 경고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먼저 두로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4).
그들은 성령을 통해 바울에게 고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인간적으로 차마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 구체적인 경고는 가이사랴에서 있었습니다.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유대에서 내려온 선지자 아가보가 갑자기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으며 모노 드라마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11b).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였습니다. 마치 법정에서 판사의 집행 명령을 듣는 것처럼, 바울의 앞길에 결박과 고난이 기다린다는 사실이 선명히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경고들을 들은 바울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하나님, 이렇게 분명한 경고를 주시는 것을 보니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는 뜻이군요. 알겠습니다. 계획을 바꾸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결심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은 이런 경고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예루살렘 행을 막으시는 신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앞으로 당할 고난을 미리 보여주심으로써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시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에게는 이미 성령님을 통해 받은 분명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명은 고난이 있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으실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제자들도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막 8:31)을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우리의 본능은 언제나 고난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위험하면 도망가고 싶고, 어려우면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신 자리는 종종 그 고난의 길 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각오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바울처럼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나는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캠퍼스나 직장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거절당하거나 조롱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입을 열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괜히 관계만 어색해지지 않을까? 내가 괜히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본능처럼 올라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영혼 사랑의 마음과 사명 의식이 있을 때, 복음을 전하는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한 영혼을 향한 눈물의 기도가, 선배와 동료를 향한 책임감이, 결국 고난의 길을 선택하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최근 코스타리카로 나가신 파블로 오 선교사님은 편안한 노후 생활 대신 복음의 부르심을 따라 나아갔습니다. 낯선 언어와 문화, 건강의 제약과 생활의 불편 속에서도 선교사님은 “주님이 부르신 자리”라는 확신을 붙드셨습니다. 그 결과 코스타리카에서 새로운 영혼들이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다. 현재 여섯 명의 양들이 매주 일대일 성경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선교사님의 삶은 고난을 피하지 않고 순종할 때 복음의 역사가 열리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해, 나의 편안함을 내려놓고 고난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진정한 신앙은 축복과 형통만이 아니라, 때로는 십자가의 무게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2. 때로는 마음이 아파도 뿌리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21:12-16)
아가보의 예언이 선포되자, 상황은 더 격렬해졌습니다. 이제는 바울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들—누가를 비롯한 선교팀까지 합세하여 울며 바울을 붙잡았습니다. 가이사랴 교회의 성도들까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외쳤습니다. “바울, 제발 가지 마십시오!” 이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랑하는 가족이, 평생의 친구가, 혹은 동역자가 눈물로 매달려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모습입니다. 이들은 결코 바울의 원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의 안전과 생명을 진심으로 염려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바울도 사람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어떤 대답을 내놓았습니까?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13).
바울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습니다. 그들을 안아주고 ‘걱정하지 마, 나 안 갈게’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그의 가슴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머금고 주 예수의 이름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14).
동역자들과 성도들도 마음이 아프지만 바울의 뜻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들의 감정과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항복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참된 제자도는 인간 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7).
이 말씀이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때 가족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부모님은 자녀의 장래를 염려하며 안정된 길을 권합니다. 배우자와 자녀들은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더 안전하고 편안한 길을 선택하자고 합니다. 또 친구들은 “너만은 힘든 길을 가지 않았으면 한다”고 진심으로 조언합니다. 우리의 본능은 이런 말 앞에서 약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과 걱정을 외면하기 힘들고, 가까운 사람이 고난받는 것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드러날 때는, 그 눈물을 다 받아 안으면서도 주님의 길을 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뿌리치거나 보내주어야 하는 결단과 각오가 필요합니다. 발걸음이 무겁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 앞에서 아픈 마음을 움켜쥘 각오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바울처럼 마음이 상해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 바울의 동역자들처럼, 끝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때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길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마음이 아파도, 주님의 뜻을 먼저 따르겠습니다.”
3. 때로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만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21:17-26)
드디어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긴 여정을 마치고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기쁨으로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바울은 이방 교회들이 모아 보낸 구제 헌금을 전하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고했습니다.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환영의 분위기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1).
‘바울이 유대인들더러 할례를 받지 말라 했다 카더라’, ‘모세의 율법은 무시해도 된다고 했다 카더라’ … 바울이 결코 말한 적 없는 가짜 뉴스와 카더라 통신이 이미 퍼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만 율법의 의무를 강요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관습을 지키는 것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이미 굳어졌고, 수많은 신자들이 바울에 대해 마음을 닫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교회 지도자들이 바울에게 제안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23-24).
이것은 나실인 서원을 마치는 결례 의식을 행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서원 기간이 끝나면 성전에서 결례 의식을 행하는데, 이때 상당한 비용이 듭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부유한 사람이 대신 비용을 부담해주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은 바울이 이런 일을 함으로써 자신이 여전히 율법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바울에 대한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제안을 받은 바울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바울이 분노했을까요? "저는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왜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제가 이런 일을 해야 합니까? 저는 그런 율법주의로부터 자유롭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는"여러분, 그것은 오해입니다. 제가 언제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까? 제가 언제 율법을 무시하라고 했습니까? 제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 보시면 설교가 다 올라와 있습니다.”라고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무 말 없이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26).
바울이 왜 이렇게 했을까요?
첫째, 바울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방인 교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함으로써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하나 됨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권리나 체면을 주장하다가 교회에 분열이 일어난다면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목적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양보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한, 주변의 약한 사람들을 위해 얼마든지 자신을 낮출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셋째, 바울은 진정성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말로 변명하는 것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오해가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해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의심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여러 오해나 소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 대해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퍼뜨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할 수도 있고, 내 말을 의도하지 않은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어디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본능은 오해받을 때 분노하고 해명하고 싶어합니다. 억울하다고 소리치고 싶고, 나를 오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화를 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바울처럼 때로는 해명할 권리를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분노하고 억울해하는 대신, 오히려 참고 기다리고 행동으로 진심으로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바울도 분명히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유대인 동족들에게 오해받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하지만 바울은 더 큰 가치를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내 권리를 주장하는가, 아니면 교회의 화평을 위해 내려놓는가?” 진정한 신앙의 성숙은, 권리를 지키는 데 있지 않고,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면서까지 더 큰 가치를 붙드는 데 있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삶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의 삶 속에서 드러난 진정한 제자의 세 가지 각오를 보았습니다. 첫째, 편안함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는 각오. 둘째, 사랑하는 이들의 만류와 눈물 앞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붙드는 각오. 셋째, 억울함을 해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연합을 위해 권리를 내려놓는 각오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 세 가지는 우리 본성과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찾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눈물 앞에 무너집니다. 우리는 억울하면 목이 터져라 해명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이런 본성을 넘어설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은 단 한 마디, 그의 고백 속에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바울이 이토록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저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근거는 오직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그 사랑이 그의 가슴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그 사랑이 그의 두려움을 이기게 했고, 그 사랑이 그로 하여금 눈물을 딛고 일어서게 했으며, 그 사랑이 그의 권리를 포기하게 했습니다.
우리도 이 사랑을 기억합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 안에도 바울과 같은 각오가 생겨납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이 고백이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고, 우리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복음이 땅끝까지 확장된 것처럼, 우리의 작은 헌신과 결단을 통해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고, 복음의 빛이 더 넓게 퍼져 나갈 것입니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입니다. 그 C는 과연 무엇입니까? 내 편안함, 내 유익, 내 권리를 선택하는 ‘Choice’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C는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Christ입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어떤 눈물이 흘러도, 어떤 억울함이 몰려와도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만은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설교 >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에서도 증언하리라 (2) | 2025.09.28 |
---|---|
담대히 복음을 증언한 바울 (2) | 2025.09.21 |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바울 (7) | 2025.08.31 |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4) | 2025.08.24 |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9) | 2025.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