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사도행전 제 24 강 / 이창무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말씀 / 사도행전 18:1-23
요절 / 사도행전 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서론 - 침묵은 금인가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줄이고 잠잠할 때 지혜롭게 보이고, 불필요한 다툼을 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분명 지혜로운 말이지만, 모든 상황에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침묵이 금이 아니라 무겁고 차가운 쇠사슬이 될 때가 있습니다. 말해야 할 순간에 침묵한다면,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두려움의 굴레가 되고 맙니다.
직장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인생의 허무함을 토로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는 마음이 불처럼 일어나곤 합니다. 하지만, 분위기를 깨뜨릴까, 관계가 틀어질까 두려워 결국 미소로 대신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가족 모임이나 오랜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복음의 진리를 말하고 싶지만 끝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다시 가라앉아 버린 경험은 없으십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룹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조차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외롭고 지쳐 있었습니다. 다가올 핍박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움 속에 있는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으로 침묵하려던 바울의 입술을 열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두려움 때문에 입을 닫고 싶은 순간에도 왜 복음을 말해야 하는지, 그 용기가 어디서 오는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기 때문에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헬라 철학자들을 상대로 지혜롭고 논리적인 설교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미미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바울의 말을 조롱했습니다. 소수의 사람만이 회심했습니다. 그는 깊은 좌절과 실망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게 지쳐 있던 바울이 도착한 곳이 바로 고린도였습니다.
고린도는 당시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또한 동서양을 잇는 중요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인구를 자랑하며 물질적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 풍요의 이면에는 영적 타락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에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수백 명의 신전 창녀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고린도 사람처럼 살다'라는 말이 성적 부도덕의 대명사로 쓰일 만큼, 고린도는 물질주의와 음란함으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험난하고 영적으로 황폐한 땅에 동역자 없이 홀로 발을 디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바울을 하나님께서 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2)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귀한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황제의 칙령으로 인해 로마에서 추방되어 고린도에 정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직업은 바울과 같은 천막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에게 두 가지 중요한 선물을 제공했습니다.
첫째, 자비량 선교의 기반입니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천막을 만들며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직 복음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자비량 선교'의 훌륭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둘째, 동역자들과 따뜻한 교제입니다. 홀로 아덴에서 지쳐 있던 바울에게, 같은 처지에서 신앙을 지켜온 이 부부와의 만남은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동업자가 아니라, 바울의 평생 사역을 함께하는 든든한 동역자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정치적 명령까지도 복음 사역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셔서, 바울에게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필요한 동역자들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이 이끄신 만남이었고, 복음 사역을 지속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홀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믿음의 공동체 안으로 불러주셨습니다. 혼자서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우리를 붙잡아 줄 기도의 동역자, 말씀을 함께 붙드는 믿음의 형제자매, 눈물과 기쁨을 함께 나눌 영적 가족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공동체는 하나님의 보호막이자 은혜의 그릇입니다.
이 사실은 성경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에게는 엘리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디모데와 누가 같은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제자 공동체를 세우시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혼자가 아닌 ‘함께’를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파블로 오 선교사님께서 코스타리카에 가실 때, 하나님은 비행기 안에 멕시코 출신 선교사 오시리스 선교사님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분을 통해 현지 교회와 기독학생회 공동체를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연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홀로 선교지로 향하신 파블로 오 선교사님에게 가장 적합한 동역자를 기막힌 타이밍에 붙여 주신 사건입니다.
혹시 지금 홀로 싸우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그러나 눈을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우리 교회, 우리 팀, 우리 가정 안에 귀한 동역자들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의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우리가 은혜의 공동체를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기를 힘쓰고, 서로의 짐을 나누며, 동역자를 존중하고 세워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5)
바울이 고린도에서 자비량으로 사역하던 중,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도착했습니다. 그들의 도착은 바울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따르면, 빌립보를 비롯한 마게도냐 교회들은 바울의 사역을 위해 헌금을 모아 이들에게 보냈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천막 만드는 일에 시간을 쏟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들이 전해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장 소식은 바울의 마음을 크게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재정적인 염려와 외로움이 해소되자 바울은 이전보다 더욱 강력하게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말씀에 사로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확신에 차서 밝히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의 증언을 대적하고 비방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거부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을 다했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역의 주된 방향을 유대인 회당에서 이방인 지역사회로 전환했습니다. 바울은 곧바로 회당 바로 옆에 있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러한 사역의 전환은 어떻게 결과를 낳았을까요? 즉각적으로 놀라운 결실을 맺었습니다. 놀랍게도, 고린도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인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가족과 함께 예수를 믿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수많은 고린도 이방인들이 말씀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 속에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는 바울에게 핍박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말씀에 붙잡힌 바 되어 정신없이 복음을 전했지만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누우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은 상처가 욱신거렸습니다. 빌립보에서 채찍에 맞으며 감옥에 갇혔을 때 뼈가 으스러졌던 부분이 신경통이 되어 온몸이 시려왔습니다.
그는 지난 선교 여행에서 복음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때마다 유대인들의 거센 핍박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이제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난 고린도에서 더 강력한 핍박이 몰아칠 것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도시를 떠나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모를 때는 두렵지 않았는데 경험이 쌓이고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더 두려워졌습니다.
바로 그때, 밤에 주님께서 환상 중에 바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9-10)
이 말씀은 바울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는 음성이었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복음 전파를 멈추려는 유혹에 맞서도록, “침묵하지 말고 계속 말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어서 두 가지 확고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째, 임재와 보호의 약속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 말씀은 마치 전쟁터에서 장군이 군사에게 “내가 네 뒤를 지킨다”라고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전진하면 되었습니다.
둘째, 구원의 약속입니다.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아직 복음을 듣지도 않은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는 영혼들이 이곳에 많이 남아 있다는 이 선언은, 바울로 하여금 사명을 포기하지 않도록 붙잡아 주었습니다. 이 약속 덕분에 바울은 '지금'을 넘어 '미래'의 열매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이라는 확실한 약속을 받은 바울은 이제 굳건히 고린도에 머물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무려 1년 6개월 동안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지금까지 한 곳에 평균 3개월 정도 머물렀던 것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로서 고린도 교회의 든든한 기초가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사역의 현장에서 종종 두려움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마음을 다해 복음을 전했지만 냉랭한 반응만 돌아올 때, 기도로 준비한 결정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때, 때로는 가정과 직장, 건강의 문제까지 겹쳐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순간에 우리의 심령은 바울처럼 주저앉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신 것처럼,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실패와 좌절의 기억 때문에 입을 닫으려 할 때, 주님은 다시금 입술을 열게 하십니다. 우리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을지라도, 주님의 이 음성이 두려움에 갇힌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깨웁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다.” 바울에게 주셨던 이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친척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캠퍼스에서 전도할 때, 직장에서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야만 할 때 —주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십니다.
혹시 지금 열매가 없는 것으로 낙심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내가 전하는 복음이 그냥 사라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지 않으십니까? 이 때가 주님의 말씀을 붙들 때입니다. 두려움은 약속을 붙드는 순간 힘을 잃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통해 반드시 열매를 거두실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주님의 약속에 힘입어 두려움 대신 담대함을, 좌절 대신 소망을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말씀을 가르쳤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 이곳의 자리에서 묵묵히 우리의 소명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울의 예상대로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아가야의 새로운 총독 갈리오 앞으로 끌고 가,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며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꾀고 있습니다"라고 고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로마법을 어겼다고 직접 주장하지 않고, 유대교의 율법을 어겼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로마가 공인한 종교였던 유대교의 권위를 내세워, 바울의 전도가 자신들의 종교 질서를 파괴하는 불법적인 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고소의 내용은 매우 교묘했습니다. 아마도 그들 중에 대형 로펌 출신 베테랑 변호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만약 갈리오가 이 문제를 유대인의 편에 서서 처리했다면, 바울의 복음 전파는 로마 제국 내에서 불법적인 행위로 낙인찍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리오는 달랐습니다. 그는 바울이 변론하기도 전에 유대인들의 주장을 일축했습니다.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15)
이 사이다 같은 판결은 복음 역사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판결로 인해 복음 전파는 로마법 아래에서 합법적인 종교 활동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선례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더 이상 복음 전파를 불법적인 행위로 고발당할 위험이 없어졌습니다. 적어도 고린도 시 안에서는 로마 제국의 보호 아래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프리 패스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앞서 밤에 주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주셨던 약속이 정확히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의 권력과 법률 시스템까지도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몇 해 전 미국에서 큰 화제가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워싱턴주 브레머튼 고등학교의 미식축구 코치였던 조셉 케넌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경기마다 끝난 후, 혼자 조용히 운동장 한가운데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진심에 감동한 선수들과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학교 측은 이를 문제 삼아 그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고 내쫓아 버렸습니다. 케넌디도 여기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미국 대법원까지 올라갔습니다. 2022년, 대법원은 “케넌디의 기도는 개인의 종교적 표현이며,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라고 판결했습니다. 학교가 이를 금지한 것은 오히려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 선언한 것입니다. 이 판결은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무엇보다 신앙의 자유가 여전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우리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고려대 동아리 박람회에 참가 신청을 했으니 거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한 번 분위기를 보기 위해 박람회 현장에 가보았습니다. 한 맥주 회사에서 나온 트럭이 한 켠에 서서 있었습니다. 판촉 사원들이 길 가는 학생들을 붙잡고 열심히 홍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외부 사람인데 술을 권하는 사람은 허용이 되나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허락되지 않는 현실이 답답했습니다. 듣지 않을 자유가 존중을 받아야 하지만, 말할 자유도 역시 존중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품 광고와 선전은 허용이 되지만, 복음을 선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불공평한 일 아닐까요?
그러나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권력과 제도마저도 당신의 손에 두시고, 결국 복음이 전해지도록 길을 여십니다. 우리의 역할은 단순합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붙잡고 담대히 입을 여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자유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기도합시다. 이 자유가 제대로 지켜지고, 진리의 말씀이 담대하게 선포되는 사회가 되도록. 그리고 우리가 그 자유 안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용기 내어 복음을 전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복음을 전하는 길에는 언제나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방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에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 동역자를 붙여 주시고, 약속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 주십니다. 심지어 세상의 권력과 제도까지도 사용하셔서 복음의 길을 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침묵 속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우리의 입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의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어둠을 깨는 빛이 되고, 절망 가운데 있는 영혼에게는 붙잡을 수 있는 생명의 줄이 될 수 있습니다.
혹시 여전히 마음이 떨리고 용기가 나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바로 그 자리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음성을 붙잡을 때, 침묵은 담대한 선포로 바뀝니다.
이제 우리가 침묵을 믿음의 선포로 바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입술을 사용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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