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사도행전 제23강 / 이창무
이제는 다 회개하라 하셨으니
말씀: 사도행전 17:1-34
요절: 사도행전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서론
몇 년 전, 미국 워싱턴 D.C. 지하철역에서 매우 흥미로운 실험이 진행된 적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평상복 차림으로 평범한 출근길 인파 속에 섰습니다. 그의 손에는 1713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 들려 있었고, 그가 연주한 곡은 바흐의 명곡이었습니다.
45분 동안 울려 퍼진 이 연주는, 콘서트홀에서는 수백 달러를 지불하고도 듣기 어려운 수준의 명연주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의 연주 앞에 멈춰 선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그가 받은 팁은 고작 32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을 귀가 없었고, 잠시 멈출 마음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세 도시에서 동일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이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소리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했습니다. 누군가는 그 복음을 붙들고 인생이 완전히 변화되었으나, 또 다른 이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스쳐 지나갔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왜 어떤 곳에서는 복음이 열매를 맺고, 어떤 곳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일까요? 오늘 말씀 속에서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복음이 열매를 맺으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를 떠나 마게도냐의 핵심 도시인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은 무역과 문화가 발달한 항구 도시로, 사람과 물자가 끊임없이 오가는 곳이었으며, 유대인의 회당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도 평소와 같이 회당에 들어가 세 번의 안식일 동안 성경을 풀어 가르쳤습니다. 그가 전한 주제는 단 하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 수백 년 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가 바로 나사렛 예수시다.”
누군가가 세상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선포한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의 이 선언은 당시 사회의 질서와 권력을 뒤흔드는 폭탄과 같은 발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복음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이들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경건한 헬라인들의 큰 무리와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귀부인들이었습니다. 복음은 민족과 계층의 장벽을 단숨에 넘어, 전혀 예상치 못한 이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격렬한 반대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 중 많은 이들이 분노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적 근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 자신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느꼈고, 영향력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상류층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그 분노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을 모아 도시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바울이 머물던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습니다. 바울을 찾지 못하자, 대신 야손과 형제들을 붙잡아 다음과 같이 고발하였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6b-7절)
이 고발은 왜곡된 것이었지만, 동시에 복음의 본질을 정확히 건드린 말이기도 했습니다. 복음은 “예수께서 주이시다”라는 선포입니다. 이 선포는 언제나 세상의 왕과 주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기에, 복음은 필연적으로 반대와 저항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런 위험을 감수했을까요? 왜 조용하고 안전하게, 적당히 전하지 않았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그의 삶은 ‘내가 주인인 인생’에서 ‘예수님이 주인이신 인생’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 부르심 앞에서 그는 안전보다 순종을, 평판보다 진리를, 편안함보다 십자가를 선택하였습니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는 “진정한 자유는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때 시작된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복음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택한다면, 사람들의 미움과 오해, 배척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복음을 무해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와 심판, 회개와 순종을 빼버리고, 사랑과 위로만 남겨 놓은 ‘안전한 복음’.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맹물에 복음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과 같습니다. 복음은 불편합니다. 우리의 자아의 왕좌를 무너뜨리고, 예수님의 주 되심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죽음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향기니라”(고후 2:16)
같은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생명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거부와 적대의 이유가 됩니다. 중립은 없습니다. 복음은 반드시 반응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전도 기술이 아니라, 미움받을 용기, 거절당할 용기, 손해를 감수할 믿음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이 위험을 감수했기에, 복음은 헬라인과 귀부인, 그리고 수많은 이방인에게 전해졌습니다. 이제 그 바통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인정을 붙드시겠습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좋은 사람으로 남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복음의 사람으로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결단의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위험해질 일은 없겠지만, 한 영혼을 구원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악플보다 무서운 것은 무플입니다. 복음에 충실하다면 칭찬과 미움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건강성을 칭찬이나 비난의 여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얼마나 복음에 충실한가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전도는 냉소와 피로감, 그리고 노골적인 적대에 부딪힙니다. 캠퍼스에서는 “개인 신념은 존중하되 권유는 사양한다”는 분위기가 강해졌고, 직장에서는 규정과 분위기 때문에 신앙 대화 자체가 어렵습니다. 온라인에서는 조롱과 공격이 손쉽게 퍼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주이시다”는 선포는 언제나 시대의 주권과 우상의 질서를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결박되지 않습니다.
지난 주, 내년 전국 청년·대학생 수양회 말씀 강사 후보를 선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절반가량이 대학교에서 처음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근래 2세 출신들이 주로 강사로 섬기던 흐름에서 나타난 변화였습니다. 통계적으로는 적대와 무관심이 쌓이지만, 구원은 오늘도 ‘사건’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번 가을 바이블 카페는 우리가 그 용기를 실제 행동으로 옮길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거절과 무응답을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한 명을 정하여 꾸준히 초대합시다. 러너스 모임에서도 내년 1월 전국 청년·대학생 수양회에 각자 한 사람을 초청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미움과 오해를 감수하되, 사랑과 존중으로 끝까지 동행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사건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둘째, 복음이 열매를 맺으려면 진리를 갈망하고 바르게 분별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거센 박해를 받은 바울과 실라는 형제들의 도움으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베뢰아로 피신하였습니다. 그곳에도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고, 바울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회당으로 들어가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과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여기서 말하는 ‘너그러움’은 단순히 성격이 온화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어로는 ‘고귀한 마음가짐’을 뜻하며, 이는 진리를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 둔 상태를 가리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처음부터 거부하지 않았으며, 고정관념 속에 가두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든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탁월함은 두 가지 태도에서 드러났습니다. 첫째,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생명을 얻고자 하는 갈급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하나의 철학 강연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단순히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비교하고 검토하며 깊이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구약 성경에 비추어 복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열정과 분별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태도가 결합되자 복음은 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렸고, 계층과 배경을 초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믿는 사람이 많고,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상류층 남성들, 곧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이들까지 회심하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도 베뢰아 교회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1:1 성경공부와 깊은 묵상을 통해 말씀을 연구하고, 그 뜻을 삶에 적용하려고 힘씁니다. 또한 질문과 토론을 기꺼이 환영하며, 모든 사람이 말씀 앞에서 배우는 제자의 태도를 가지려 합니다. 그 결과, 말씀을 깊이 연구한 이들의 인격과 가치관, 인생의 방향이 변화되고, 하나님께 헌신된 일꾼들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은혜입니다.
올여름 수양회에서 우리는 그 열매를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빚으시는 성품’이라는 주제로 다윗의 인생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강사들이 말씀을 깊이 소화하고 삶의 고백을 담아 전하였기에, 그 말씀 속에 향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생애 처음으로 메시지를 전한 러너스 강사들의 설교는 놀라웠습니다. 20대 후반의 첫 설교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동안 보고 듣고 배운 것이 깊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익숙해질수록 위험이 있습니다. 익숙함이 경외심을 갉아먹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재 학사 목자 세대는 직장과 가정, 재정과 건강 문제로 분주하여 말씀에 대한 갈망을 잃기 쉽습니다. 주일 메시지가 단지 ‘좋은 이야기’로 소비되고, 성경공부는 바쁘면 건너뛰며, 대신 유튜브 시청 시간이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래 신앙생활했으니 괜찮다”는 착각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부모 세대가 말씀에서 멀어지면, 자녀 세대는 말씀에 관심조차 갖지 않게 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듣기 좋은 말씀의 소비자입니까, 아니면 말씀을 삶으로 소화하는 제자입니까?” 성경 지식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를 살립니다.
하루를 말씀으로 열고 말씀으로 마무리하는 삶, 이것이 다음 세대에 남기는 가장 강력한 설교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길은 단지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세대를 살릴 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향해 갈급한 사람에게 복음의 열매를 맡기십니다.
셋째, 복음이 열매를 맺으려면 회개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베뢰아에서도 바울은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쫓아와 복음을 방해하였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은 바울을 급히 아덴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아덴은 당시 철학과 예술, 지성의 중심지였습니다. 거리마다 장인들의 조각상이 서 있었고, 화려한 신전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사상과 토론에 열광하였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빛나 보이는 이 도시가 바울의 눈에는 온통 우상 숭배로 가득 찬 영적 어두움으로 비쳤습니다. 그는 마음에 격분하였습니다. 그 격분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헛된 신을 섬기는 영혼들을 향한 거룩한 슬픔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슬픔을 전도의 열정으로 바꾸었습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토론하였고, 아고라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향해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라며 비웃었으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이야기라며 호기심을 품고 더 듣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불러 그의 말을 청취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수준에 맞춰 복음을 설명하였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생명과 질서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 날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복음은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옵션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바울은 그 근거로 예수님의 부활을 제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그분이 온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이심을 확증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의 반응은 세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조롱하는 사람들, ‘나중에 다시 듣겠다’며 미루는 사람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유보’는 결코 중립이 아닙니다. 내일 회개하겠다는 말은 오늘 하나님께 불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마치 의사의 처방전을 받아 “좋은 설명이네요” 하고 액자에 걸어두지만 약을 복용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감탄만 하고 변화가 없는 신앙, 설교를 듣고 감동은 받았지만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습관은 결국 영혼을 메마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감동이 아니라 변화와 순종을 원하십니다. 회개란 방향 전환이며, 가던 길을 멈추고 유턴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었던 자리에서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것이며, 관계, 시간 사용, 재정과 우선순위 속에서 구체적인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하나님보다 앞세우던 것을 내려놓으며, 무너졌던 말씀 생활을 다시 세우고, 미루던 헌신을 실행하는 것이 바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이번 여름수양회의 소감 발표가 힘 있고 은혜로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감동받았다”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과정이 있었고, 구체적인 죄를 버리며 순종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결단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듣는 이들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순간’을 목격하였습니다. 말씀–자기 성찰–회개–결단의 흐름이 분명하였기에 실제적인 영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지적 호기심이나 순간적인 감동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고 방향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계속해서 말씀–성찰–회개–순종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
사도 바울의 제2차 선교 여정은 동일한 복음이라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복음이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거센 도전이 되었습니다.
베뢰아에서는 진리를 향한 갈망과 성경적 분별력이 만나 복음이 깊이 뿌리내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아덴에서는 철학과 지성이 넘치고, 종교적 다양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복음이 담대하게 선포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롱하였고, 어떤 이들은 결정을 미루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믿고 회심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조롱하는 사람, 결정을 미루는 사람, 그리고 그 자리에서 믿고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명확합니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복음은 단순한 정보나 감동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회개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나는 지금 복음 앞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복음을 삶의 가장 중요한 진리로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유보하며 안전한 거리를 두고 있는가?”
진정한 복음의 반응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한 눈물이나 감정의 발현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는 존재의 전환입니다. 내가 주인이었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분을 따르는 순종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다시 회개로 향하고, 우리의 삶이 복음에 합당하게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살아 있는 증인으로 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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