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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by 목자 이창무 2025.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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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사도행전 제 30 강 / 이창무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말씀 / 사도행전 24:1–27
요절 / 사도행전 24: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서론 — 소망이 가진 힘

사람을 끝까지 버티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명예일까요? 아니면 의지력일까요?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그 답을 자신이 갇혀 있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찾았습니다.
그곳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프랭클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일을 향한 소망, 즉 기다림의 이유를 지닌 사람이 생존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래를 믿는 사람은 수용소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희망이 사람을 살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본문 속에서 사도 바울은
지금 쇠사슬에 묶인 죄수의 신분입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억울한 고발 앞에서도, 불의한 재판 앞에서도,
2년이라는 기약없는 기다림 속에서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을까요?
오늘 말씀의 제목 속에 답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향한 소망’이었습니다.
그 소망이 어떻게 절망을 이기며,
어떻게 우리를 견디게 하고,
결국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배우고자 합니다.


1. 소망은 진실을 말하게 합니다 (1–13절)

오늘 장면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는 대제사장이 고용한 대형 로펌 변호사 더둘로의 목소리입니다.
그는 경험 많은 변호사 답게 능숙하게 말을 엮습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3)

참 화려한 말이지요.
하지만 그저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얄팍한 아부와 아첨일 뿐입니다.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벨릭스는 로마 총독 중에서도 가장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물이었다고요.
그런 사람에게 “당신 덕분에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말입니까?
그리고 그 스스로 이렇게 자백합니다. 
“대강 말씀드리겠습니다. 알맹이는 없습니다. 그냥 넘어가 주세요”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비어 있습니다.

더둘로가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물론 재판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이겠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그의 마음속 소망이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면 어떤 아부나 아첨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승리해서 성공 보수를 받기 위해서라면 실체적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법정의 반대편에 누가 서 있습니까?
바로 바울입니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10)

더불로의 첫 마디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참 담백합니다.
과장도 억지로 꾸민 말도 없습니다.
적절한 예의를 갖추되, 어떠한 아첨도 없습니다.
그저 정직하게, 사실 그대로를 말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성전이나 회당이나 성 안에서 아무와도 다투거나 소동을 일으킨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들이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당신 앞에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리이다.”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담백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바울의 소망의 근원이 더둘로와 달리 하늘에 확고히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악 간이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변호하시며,
거짓을 드러내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미 벨릭스의 재판정보다 더 높은 법정,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권력자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아부와 화려한 언변을 무기로 사용합니다.
오늘의 세상은 ‘좋아요’와 ‘구독’으로 움직입니다.
유튜브에서는 진실보다 클릭률이 중요합니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실제 모습보다 어떤 필터를 썼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팩트'보다 '느낌'을 좋아하고, 
'진실한 이야기'보다 '듣기 좋은 이야기'에 더 반응합니다.
심지어 인공지능도 듣기 좋은 말로만 답변을 합니다.
거짓말까지 합니다.
이것은 인공지능의 책임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인간의 언어 습관을 학습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은 아첨에 끌릴까요?
그것은 그들의 소망이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땅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합니다.
인정받고, 칭찬받고, 자리 잃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희생하고서라도 상대의 기분을 맞춥니다.
하지만 하늘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평가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비록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인기를 좇지 않으셨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이 며칠 후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아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직 진리를 말하셨고, 그 진리가 결국 십자가의 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선택의 순간은 계속 찾아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하나님의 마음을 따를 것인가.
땅의 박수를 받을 것인가, 하늘의 칭찬을 받을 것인가.
우리의 말이 땅의 소망에서 나오는가, 하늘의 소망에서 나오는가가 그것을 결정합니다.

진실은 언제나 외롭지만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늘의 소망을 가진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아첨은 순간의 평안을 주지만, 진실은 영원의 평화를 줍니다.

그러므로 이미지가 진리를 덮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담대히 진실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우리의 말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2. 소망은 양심의 법정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소망이 진실을 말하게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둘로는 땅의 소망 때문에 아첨했고, 바울은 하늘의 소망 때문에 진실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말과 삶이 일치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는 자신의 삶 전체가 그 소망 위에 서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떤 소망이었을까요?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15)

바로 하나님께 대한 소망, 곧 부활의 소망입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고,
진리의 최종 판결을 내리신다는 믿음.
이 확신이 바울을 지탱한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16)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연결점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향한 소망과 깨끗한 양심.
이 둘은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양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생존의 논리가 강해질수록 양심의 목소리는 작아집니다. 
“어차피 세상은 다 그렇지”, “정직해 봐야 손해야”라고들 말합니다.
이 말은 절망의 언어입니다.
소망이 사라지면 양심은 쉽게 무너집니다.
양심은 요즘 세상에서 멸종 위기 종입니다.
정직하면 손해 보고, 진실하면 외로워지는 시대 속에서 누가 양심을 붙들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품은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지금의 불의가 끝이 아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그를 다시 일으키고, 그 소망이 오늘의 정직한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람은 소망이 있을 때 양심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방학 때마다 천안에 있는 외가집에 가서 경험한 일이 있습니다.
동네 이웃들이 쌀을 꾸러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 외할아버지께서 외삼촌에게 그 이웃이 교회에 다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맞다고 하면 무조건 쌀을 꾸어주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불교 신자였던 외할아비지의 이런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 시대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은 곧 양심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더 양심적이라는 인식은 거의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의 가장 큰 위기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들게 된 결정적인 원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신앙의 겉모습은 유지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 향한 소망,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이 사라지고 이 땅에 소망을 두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이 사라질 때,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을 향한 증언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먼저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이 소망을 회복해야 합니다.
건물의 크기나 재정의 풍요가 교회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교회를 살리고, 그 소망이 양심을 일으킵니다.
양심이 살아 있는 교회는 작아도 빛나고, 가난해도 거룩하며,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교회가 세상의 어둠을 밝힙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으로 살고 있는가?”
“내 양심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자유한가?”
“우리 교회는 정말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진리의 길을 걷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결단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다시 우리 안에 불 붙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소망의 힘으로 양심대로 살아가고 다시 우리가 가진 증언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3. 소망은 기다림 속에 더욱 단단해집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의 마지막 장면으로 들어갑니다.
두 사람이 서 있습니다.
한 사람은 세상의 권력자, 로마 총독 벨릭스.
다른 한 사람은 쇠사슬에 묶인 죄수, 사도 바울.

22절을 보면 벨릭스는 “이 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출신인 아내 드루실라 덕분에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갈등에 대해 어느 정도 상황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얼마든지 “이 사건은 로마법에 따른 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하면서 기각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면 다시 판단하겠다.” 판결을 미룹니다.
그럴듯한 명분이지만, 사실은 유대인의 반발을 피하려는 핑계였습니다.

며칠 후, 벨릭스는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다시 불러들입니다.
그때 바울이 전한 메시지는 단호했습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25)

바울은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담대히 강론했습니다.
바울은 듣기 좋은 말만 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자 앞에서도 진리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한 말씀은 벨릭스의 양심을 찌르는 칼과 같았습니다.
벨릭스는 그 말을 듣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회개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말합니다.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틈이 있으면"이라고 했지만, 그는 결국 그 틈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회개의 연관 검색어는 "나중에", 결단의 연관 검색어는 “다음에”인 것 같습니다.
그는 마음이 찔렸지만, 결단하지 않았습니다. 진리 앞에서 멈췄습니다.

왜일까요?
그의 마음이 여전히 땅에 속한 소망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물, 권력, 명예—그것이 그의 신(神)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였지만,
사실은 탐욕의 쇠사슬에 묶인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판결을 미루는 총독에게도, 불의한 세상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 총독 앞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서 있었습니다.
그는 쇠사슬에 묶였지만, 하나님께 향한 소망으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왜일까요?
그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27)

2년입니다. 무려 730일. 17,520시간. 
요즘 같으면 항소, 상고 다 하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이유도 불분명했습니다.
죄목도 없었습니다.
그저 정치적 이유로 묶여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2년의 기다림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소망은 더 단단해졌습니다.

사람의 삶을 결정짓는 것은 그가 어디에 소망을 두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땅에 소망을 둔 사람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사라지고, 명예는 옮겨 다니며, 젊음은 금세 시듭니다. 
그러니 이 땅에 소망을 둔 사람은 늘 조급합니다. 
오늘을 붙들지 않으면 내일이 무너질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회개를 미룹니다. 탐욕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높이 오르려 하지만, 결국 그 끝은 공허와 피로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이 없고, 아무리 오래 살아도 평안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붙든 것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기다릴 줄 압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더디게 와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봄을 기다리듯,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합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고, 손해를 보아도 평안을 잃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자유합니다. 
세상의 성공이 전부가 아니기에, 잃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보상이심을 알기에, 비교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도 이 고백 위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 향한 소망이 우리의 영혼을 일으킵니다. 
그때 우리는 탐욕의 사슬에서 풀려나고,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출국 소감을 발표하실 권희 레베카 선교사님이 이 하늘 소망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의 소망은 우리를 좁게 만들지만, 하늘의 소망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하늘을 향한 소망이 오늘도 우리의 삶을 붙드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 — 하나님께 향한 소망의 사람으로 살라

오늘 우리는 세 가지를 배웠습니다.
첫째, 소망이 우리의 말을 바꿉니다. 하늘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아첨이 아니라 진실을 말합니다.
둘째, 소망이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하늘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양심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셋째, 소망이 우리의 미래를 바꿉니다. 하늘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기다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답이, 당신의 오늘과 내일과 영원을 결정합니다.

오늘, 바울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읍시다.

“나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노라.”

하나님께 향한 소망의 사람으로,
진리의 법정에서도, 기다림의 자리에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소망이 우리를 붙들고,
변화시키며, 마침내 승리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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