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이창무 2024. 9. 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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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16강 / 이창무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말씀/ 마가복음 8:1-26
요절/ 마가복음 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최근 미국 프로야구에서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로 유명한 선수가 있습니다. 바로 일본 출신의 오타니 쇼헤이 선수입니다. 그는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는 동시에 시속 160 Km가 넘는 공을 뿌리는 강속구 투수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타격에만 전념하고 있는데 벌써 홈런 40개, 도루 40개를 동시에 넘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야구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오타니 선수는 끊임없는 자기 관리와 훈련을 통해 성장해 왔습니다.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하여 꾸준히 연습하고, 특히나 멘탈을 관리하는 데 아주 철저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기 위해 우리 마음을 관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제시합니다.

첫째로, 과거의 교훈을 잊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인 7장 끝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을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장소는 갈릴리 호수 동편의 이방인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이곳에 머무르고 계실 때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떡 일곱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입니다. 이 사건은 앞선 오병이어 사건과 매우 흡사합니다. 물론 대상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점, 떡이 두 개 더 늘었다는 점, 무리의 숫자가 사천 명으로 줄었다는 점 등등 소소한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무리를 먹이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동기는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2)

이번에도 예수님의 동기는 긍휼이었습니다. 2박 3일 수양회를 끝내고 나니 먹을 것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대로 그들을 돌려보낸다면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고 매우 안타까우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굶주린 이 불쌍한 사람들을 먹이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4)

제자들의 반응 역시 이번에도 똑같았습니다. 믿음도 없고 심정도 없고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하고도 어떻게 이렇게 배운 것이 없을까요? 예수님이 얼마나 실망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마치 그런 대답이 나올 줄 다 아셨다는 듯이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다만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신 후에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무리가 배부르게 먹은 후 남은 것을 거두어 보니 지난번 열두 광주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완전수 중 하나인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자들이 그 이전의 경험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과거를 현재에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제자들의 기억력이 나빠서’일까요? 그런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항상 문제 해결에만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씨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도 없고 성장도 없고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큰 경고가 됩니다.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곤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쉽게 그 경험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문제 앞에서 동일한 의심과 불신을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거의 교훈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의 교훈은 단순한 기억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기억하는 것은 마치 은혜를 저축하는 것과 같습니다. 위기 때마다 우리는 이 저축을 꺼내 사용하여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되며, 미래의 어려움 앞에서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게 하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신 순간들을 떠올리며 감사하고, 그 경험들이 우리의 영적 삶을 더욱 견고하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사건으로 깨닫지 못한 제자들에게 칠병이어 사건을 한 번 더 경험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 번에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은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학교에는 폐강이 없습니다. 한 번 F를 받았어도 재수강, 재수강에 또 재수강이 가능합니다. 이 또한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 안에서 성장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과거의 교훈 속에서 현재의 삶에 두신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현 세대의 그릇된 가치관에 물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 서쪽에 위치한 달마누다 지역을 가셨을 때였습니다. 유대인의 땅에 들어오자 마자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인들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청은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의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불신앙 그 자체였고,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예수님을 믿고 싶지 않다는 강한 고집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이렇게 믿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불신앙은 교만과 시기심, 그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적 스승이나 구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고 그저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위협하는 경쟁자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12)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한숨과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하지만 그 사람이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으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단순히 바리새인만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대가 어찌하여 표적을 구하느냐” 하시면서, 그 시대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셨습니다. 바리새주의가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로서 바리새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과연 제자들은 이것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15)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엄중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의 누룩이고 다른 하나는 헤롯의 누룩입니다. 누룩이란 마음에 스며들어 서서히 퍼지는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헤롯에게 영향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누룩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바리새인의 누룩은 교만과 위선 그리고 불신앙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교만 때문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다음으로 헤롯의 누룩은 세속주의와 쾌락주의를 상징합니다. 헤롯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음모와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잘 먹고 즐기며 살자는 물질적이고 쾌락적인 삶을 추구했습니다. 영적인 것에는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가방 끈이 긴 바리새인과 금수저 출신인 헤롯,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서로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 보이지 않습니까? 갈릴리에서 물고기 잡던 순박한 어부 출신 제자들이 설마 바리새인과 헤롯처럼 변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소박하고 겸손하던 사람도 지위가 높아지고 권력을 얻게 되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뇌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일반적으로 뇌구조가 변한다고 합니다.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자신의 충동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이 감소한다고 합니다. 바리새인과 헤롯의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바리새인과 헤롯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면서 많은 무리들의 주목을 계속 받다 보니 어느새 제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닮아가고 있었을 지 모릅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허기진 채 먼 길을 가야 하는 무리들의 처지에 공감하지 못하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식의 태도를 보인 점이 그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 9장에 보면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하며 쟁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나도 한 자리 차지해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욕망이 어느새 그들 마음에 스며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바리새인의 누룩은 교회 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교만하고 위선적인 태도를 갖는 것, 이것이 바리새인의 누룩입니다. 반면에, 헤롯의 누룩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누룩들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정말 깨어 있지 않으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바리새인이나 헤롯으로 변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다 마음에 깊이 새기고 새겨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16)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떡이 왜 나옵니까? 그 이유는 제자들이 이미 떡에 꽂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까부터 제자들은 배에 떡은 하나이고 사람은 열 셋인데 이를 어떻게 하나 계속 이 고민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이 누룩을 언급하시자 곧바로 누룩으로 만드는 떡 이야기를 하시는 줄 알고 이렇게 반응한 것입니다. 아마도 “왜 네가 떡을 안 챙겨서 예수님께 한 소리 듣게 하느냐?”면서 서로 티격태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어찌 수군거리느냐? 어찌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 이리 둔하냐? 어찌 듣지 못하느냐? 어찌 기억하지 못하느냐?” 속사포로 다섯 개의 질문을 쏟아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내 진정하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19,20)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많은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떡 문제, 현실 문제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수천 명을 먹이고 남은 것을 거두게 하신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먹이시지 못하시겠습니까? 제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떡은 혈당 수치를 급격하게 높이는 탄수화물 덩어리인 떡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스텝 목자님이 계십니다. 이분과 저는 나이 차이가 한참 나고 스텝으로서 경력 차이는 훨씬 더 차이가 납니다. 안 지가 꽤 되었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주위에 있는 한 사람을 친구처럼 대하시고 존중해 주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항상 드는 느낌은 겉모습은 늙으셨지만 속은 늘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순수할 수 있을까” 신기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비결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의 명예나 지위나 힘에 별로 관심이 없으십니다. 항상 예수님만 바라보고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일생 동안 예수님을 배우는 일에 몰입하면 저렇게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문제에 너무 얽매여서 말씀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이와 같은 일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직장에서의 문제, 가정에서의 갈등, 경제적인 어려움 등 현실적인 문제들이 우리를 압도할 때,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인간적인 해결책만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통해 더 깊은 신앙과 더 큰 믿음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주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기적인 욕망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늘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셋째로, 장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벳새다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어보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러자 맹인이 대답했습니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24)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안수하셨습니다. 그 맹인이 모든 것을 밝고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예수님이 맹인을 치유하신 방식이 다른 때와는 조금 다릅니다. 처음엔 흐릿한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던 그의 시야가, 두 번째에는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이는 찬란한 빛으로 채워졌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을 두 단계에 걸쳐 고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한 번에 고치지 못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단번에 고치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여기에는 분명 예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 의도를 오늘 본문 앞부분 제자들의 상태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맹인이 처음 회복되었을 때 사람과 나무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희미하게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제자들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수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제자들은 영적으로 아직 미완성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있지만 흐릿하고 명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었던 소망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맹인이 두 번째 안수로 완전히 회복되었듯이, 제자들도 마침내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직은 믿음이 부족하고 이해력도 둔하지만,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끌어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눈이 완전히 열리기를 소망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소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셨을 때 제자들은 영적인 눈을 떴습니다. 복음과 영적인 세계를 또렷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제자들을 보다가 사도행전의 사도들을 보면 이 두 사람이 과연 동일인일까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일취월장하여 영적인 세계의 오타니처럼 보입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소망을 줍니다. 우리 중에 예수님과 영적 세계를 전혀 보지 못하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성경을 알고 믿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제자들처럼 아직 어리석고 둔하며, 믿음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아예 아무것도 모르면 속이라도 편할 텐데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것도 아닙니다. 보이는 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도 저도 아닌 이런 어중간한 상태가 가장 힘들고 답답한 법입니다.

그러나 좌절하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영적으로 점진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완전히 주님의 뜻을 이해하게 될 때까지, 주님은 우리의 손을 놓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온전히 눈을 뜰 그날을 기다리시며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두 번째 안수가 임하는 날 우리는 예수님을 또렷이 보게 될 것입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예수님이 바로 내 곁에 계신 분처럼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영적 세계의 놀라운 아름다움과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날부터 새 인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다 함께 주님께서 우리에게 두번째 안수를 베풀어 주시기를 사모합시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세 가지를 주의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과거의 교훈을 잊지 말고,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에 물들지 않으며, 장래에 대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을 따라 더욱 신실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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