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이창무 2024. 6. 9.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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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3 강 / 이창무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말씀/ 마가복음 6:30-56
요절/ 마가복음 6: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쓴, 매우 유명하지만 실제로 읽어 본 사람은 거의 없다는 ‘목민심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목민’과 ‘심서’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목민은 지방 관리는 백성들을 양처럼 보살피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목자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은 제목입니다. 심서는 지방 관리가 백성을 돌보는 데 있어서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제목입니다.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 버전의 목민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목자이신지, 그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목자 잃은 양 떼를 먹이시는 참 목자이십니다.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다녀오느라 몹시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엠티를 가 휴식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고을에서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보다 그곳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역력했습니다. “이 사람들! 해도 해도 너무 하네. 정말 징글징글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리들을 어떻게 보셨을까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34)

제자들은 많은 무리를 보고 부담스러워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목자 역할을 해야 할 헤롯 왕은 허구한 날 성대한 잔치를 벌여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배고픈 삶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교권 다툼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갈급한 영혼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목자를 잃었던 백성들은 예수님에게서 드디어 목자의 향기를 맡고 몰려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자신 안에 있는 긍휼의 마음에 불이 붙었습니다. 안타까워하시고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열심히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연스럽게 엠티는 취소되고 대신 수양회가 열렸습니다. 저녁 은혜 말씀, 주제 강의 말씀 전부다 강사는 예수님 한 분이었습니다. 무리들은 꼼짝 않고 예수님이 공급해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에게서 참 목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다음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참 목자는 공감하는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현재 역사를 섬기느라 얼마나 피곤한 지,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해 얼마나 배 고픈지 깊이 이해하시고 공감하셨습니다. 아울러 무리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지, 얼마나 진리의 말씀에 목말라 하고 있는지 깊이 이해하시고 공감하셨습니다. 참 목자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양들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둘째, 참 목자는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목자입니다. 제자들만 피곤하고 배 고픈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피곤하고 배 고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처럼 얻게 된 휴식 시간을 기꺼이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정된 여행 계획도 깔끔하게 접으셨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마침내 자기 양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하셨습니다. 이처럼 참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유익과 계획을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습니다. 

셋째, 참 목자는 양들의 필요에 반응하는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무리를 동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영적인 굶주림과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수동적이지 않았습니다. 양들의 필요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었습니다. 추상적이지 않고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참 목자이신 예수님에 대해 묵상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아직 참 목자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마음이 얼마나 메말라 있는지, 희생하는 것을 싫어하는지, 다른 이들의 필요에 반응하는 것이 둔한 지 모릅니다. 목자라고 불리는 것이 참 부끄럽습니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당시 제자들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을 목자로 빚으셨듯이 지금도 나를 빚어가고 있으시다는 점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35,36)

어느새 많은 시간이 흘러 갈릴리 바다 서편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나와서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이제 무리들을 보냅시다. 각자 여러 촌과 마을에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합시다.” 이 제안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과연 정말 그럴까요? 당시는 지금처럼 24시간 편의점이 있어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본인들 말대로 이곳은 빈들이고 곧 밤이 될 텐데 무리들이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냉정하게 평가하면 제자들의 제안은 문제 해결보다는 책임 회피에 더 가깝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37a)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이 말씀을 원어로 보면 ‘너희’라는 말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려던 제자들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집어 내신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결국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는 양 떼를 먹이러 온 목자이다. 그런데 너희도 이 일에 동참하기를 원한다. 너희는 이 일을 위해 너희를 불렀다.”

이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이리까” 한 데나리온을 노동자 하루 일당 십만 원으로 잡으면, 이백 데나리온은 이천만 원 정도됩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헤롯이면 몰라도 우리에게 이천 만원이 어디 있습니까? 잘 아시면서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약간의 힐난조가 담긴 대답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미안하다.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구나!” 하셨을까요?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3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슨 수를 쓰든지 이백 데나리온을 만들어 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없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있는 것을 가져와 봐라.’고 하셨습니다. 찾아보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어떻게 먹입니까? 분자 단위로 쪼개서 한 사람 당 탄수화물 다섯 분자와 단백질 두 분자 씩 나누어 줄까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랍니다. 그 부족한 부분은 어찌 합니까?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들을 백 명 또는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잔디 위에 앉게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기도 후 예수님이 떡과 물고기를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오천이 넘는 무리들이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그때까지 제자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예수님과 무리들 사이를 오락가락했을까요? 우리들은 제자들을 원조 ‘배달의 민족’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역할과 제자들의 역할이 확실하게 구분됩니다. 양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 주시는 은혜의 원천이 되십니다. 떡과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제자들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미 가지고 있는 떡과 물고기를 찾아서 예수님께 가져오는 것, 예수님께서 주신 음식을 받아서 양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제자들의 역할입니다.

현재 우리 손에 풍성한 떡과 물고기가 없다고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은혜의 원천이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이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긍휼의 심정과 목자로서 책임감입니다. 양들을 돕기 위해 나는 할 만큼 다 했고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우리 손이 텅 비어 있을지라도, 아니 우리 손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양손을 내밀어 예수님이 공급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떼어 주시는 그 떡과 물고기를 받아 가정과 사회와 캠퍼스에 전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두려움에 빠진 양 떼를 건지시는 참 목자이십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건너편 벳새다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무리를 흩으시고 나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예수님과 떨어져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은 한밤 중에 역풍을 만났습니다. 조금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 봤지만 힘만 들 뿐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광풍 사건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배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방금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기적을 목도하고 감격으로 찬송했는데 지금은 거의 죽게 된 지경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 생활의 현장입니다. 이럴 때 ‘이러다 망하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빠지거나, “왜 하필 이럴 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냐!”며 예수님을 원망하게 되기 쉽습니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47, 48)

그러나 제자들이 몰랐을 뿐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다 한 복판 배 위에서 역풍과 씨름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다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 위로 걸어 제자들의 배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어둠을 뚫고 먼 곳에 있는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중력의 법칙을 어기고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을까요? 두 질문에 답은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신성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캄캄한 가운데 멀리서도 제자들을 볼 수 있었고, 물 위를 걸어서 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더욱 명확하게 해 주는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지나가려고 하셨다는 표현입니다(48). 구약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똑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오해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던 제자들에 하신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표현입니다(50). 여기서 ‘내니’라는 말은 영어로 ‘I am’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는 나다. I am who I am.”이라고 말씀하셨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다양한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사실 방금 전 있었던 오병이어 사건 전체가 예수님이 과거 광야에서 굶주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셨던 바로 그 하나님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제자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구나!”하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요? 깨닫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51,52)

제자들은 마치 예수님의 신성을 처음 경험해 보는 사람들처럼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직접 경험하고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응용력이 없는가? 어떻게 이렇게 기억력이 나쁜가?” 제자들의 둔감함에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 우리가 별반 더 나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자들도 쉽게 길을 잃어버리는 예수님의 양 떼입니다. 목자가 돌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양 무리일 뿐입니다. 우리가 목자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실은 얼마나 내면이 연약한 지 모릅니다. 얼마나 두려움이 많은 지 심지어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서 나를 도와주려고 나타나신 분을 향해 유령이라고 소리칠 지도 모릅니다.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노를 젓기 어려울 때, 한밤중에 유령 같은 물체가 희미하게 물 위로 내 곁을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것은 또 얼마나 색다른 경험입니까? 이것 역시 우리 인생에서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건지시고 안전하게 돌보시는 영원하신 참 목자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참 목자 예수님은 우리 손을 계속 붙잡고 계시고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윗은 참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이 다윗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폭풍 속에서 그것을 뚫고 나에게 다가오시는 참 목자 참 하나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양 떼를 고치시는 참 목자이십니다.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53,54)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서 내려 게네사렛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도착은 질병으로 고통받던 그곳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이었습니다.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55, 56)

사람들은 도시나 농촌 지역 모두에서 예수님께로 병자들을 메고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병든 이들을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치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양 떼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긍휼의 목자 예수님은 그들을 질병의 고통에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이곳 게네사렛 사람들의 자세는 앞선 사건들과 대비가 됩니다. 제자들은 배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오해했던 반면, 게네사렛 사람들은 배에 내리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즉각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 사건 때 이백 데나리온이 없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대답을 한 반면,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기만 해도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던 반면, 게네사렛 사람들은 모두가 다 나와서 예수님을 뜨겁게 환영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게네사렛 사람들은 오늘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고향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예수님을 알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오래 만난 사람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라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게네사렛이 원래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려고 했던 곳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애초에는 갈릴리 북쪽 벳새다가 목표 지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탄 배가 역풍을 만나 헤매다가 전혀 계획에 없던 곳에 도착한 곳이 바로 게네사렛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런 부흥이 일어날 줄, 이곳 사람들의 믿음이 이렇게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두 가지 점 모두 일반적인 기대와 상식을 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계획에 없던 곳, 새로운 사람들에게서 하나님 나라가 꽃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 옥토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게네사렛은 어디일까요? 예수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준비된 양들이 있는 그곳은 어디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밤 새워 역풍에 맞서 씨름하다가 우연히 계획에도 없던 그곳에 가게 된 것은 압니다. 우리도 이 시대의 역풍에 맞서 씨름하다 보면 어느새 게네사렛에 도착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그곳에서 우리보다 더 믿음 좋은 사람들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요? 선하신 목자 예수님은 때로는 거스르는 바람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베스트의 장소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발견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목자 없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양을 먹이시고, 두려움과 위기에 빠진 양을 건지시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양 떼를 구원해 주시는 참 목자이십니다. 우리가 받은 최고의 복은 영원하신 참 목자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목자 예수님을 배우고, 세상에 목자 예수님을 전파하며 가르치는 우리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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