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둘씩 둘씩 보내시며

이창무 2024. 6. 4.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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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2강 / 이창무

둘씩 둘씩 보내시며

말씀/ 마가복음 6:1-29
요절/ 마가복음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일본에서 1991년 첫 방송을 시작해서 현재까지 방영되고 있는 “나의 첫 심부름”이라는 제목의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보통 3세부터 6세 사이의 어린아이의 첫 심부름을 숨어서 관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예를 들어 슈퍼에서 물건을 사 오거나 아버지의 회사에 물건을 가져다 주는 등의 심부름을 합니다. 어른에게 너무 쉬운 미션이지만 아이들은 이 모든 것을 혼자서 해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거친 세상과 아직은 어리고 연약한 제자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거친 세상을 향해 첫 심부름을 보내십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제자도의 핵심이 되는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제자는 세상으로부터 배척 받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1)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가셨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적인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자 "마리아의 아들"로만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배척하여 마을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고향 사람들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나? 더 이상 말씀 전하고 싶지 않다.’하시며 낙심하셨을까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4)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사람이 막상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제 고등학교 때 친구입니다. 전교 등수가 저랑 앞서거니뒤서거니 했던 사이였습니다. 뉴스에 그 친구가 나오자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하! 니가?” 이처럼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평범한 사람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습니까?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5,6)

예수님은 그곳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몇몇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놀라워하셨습니다. 이는 믿음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도 믿음을 지키는 일에서나 믿음을 전달하는 일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문화 속에는 예수님 당시처럼 여러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받아들여야 할 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규범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이런 규범들이 그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어떤 규범들이 있을까요? 예를 들자면 “증명할 수 없다면 가치가 없다. 믿음은 헛된 것이다.” “오직 이생만이 전부다. 내세 따위는 아무 관심 없다.” “너 자신을 항상 제일 우선에 두어야 한다. 이 우주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 등등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생각들에 익숙해 있고, 이 범주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믿음을 말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우주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 내용 중 일부이기에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배척합니다. 심지어 캠퍼스 폴리스에게 신고까지 합니다. 그 결과 캠퍼스 가운데 예수님의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능력이 잘 나타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사렛 마을처럼 오직 소수에게만 그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도 배척을 받으셨는데, 심지어 가장 가까운 고향 사람들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으셨는데, 우리도 당연히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형성된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오해, 복음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으로 돌돌 뭉쳐 있습니다. 우리도 전도할 때 배척을 경험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배척 때문에 위축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살짝 의기소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말입니다. 예수님도 분명 속이 상하긴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여기에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향을 떠나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습니다. 교회에 단 한 번도 다녀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세대가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 오히려 그들이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말씀 앞으로 나아올 수 있는 새 시대가 오지 않을까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세상의 배척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제자는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모험을 시도해야 합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7)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둘씩 짝을 짓게 하신 것은 연약한 제자들이 서로를 의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제자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힘을 실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자신의 권능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준비시키신 후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두 가지 당부를 하셨습니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8,9)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만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은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양식이나 주머니나 돈도 가지지 말며, 신발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역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10,11)

둘째,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곳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떠나라 하셨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그들을 영접하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나며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거부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낙심하지 말고 다른 곳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준비는 끝났습니다. 남은 것은 ‘제자들이 어떻게 하느냐’였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12,13)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나가서 회개하라고 전파했습니다. 또한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제자들 스스로 놀랐습니다. “아니, 이게 되네!” “우리가 말씀을 전하고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고 우리가 병자를 고치다니! 예수님의 이름 권세가 정말 엄청난데!”

결말은 행복했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도록 보내신 것은 사실 너무나 큰 모험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마가복음에서 우리가 제자들에게 받은 인상은 그들이 전혀 칭찬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둔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가르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도록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둘씩 짝을 지어서’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여기에 담긴 함축적인 의미는 제자들이 아무리 많이 듣고 가르침을 받고 기적을 목격하고 심지어 예수님과 24시간 함께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보는 것만으로 엄청난 만족과 도전을 받습니다. 하지만 내 자신이 직접 복음을 전할 때 참된 성장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배척하는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고, 그래서 긴장되고 떨리는 가운데 주님만 의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너무 안전한 곳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우리를 배척할 리가 없는 안전한 사람들과 주로 함께 지내려고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 주위에 불신자 친구가 다 사라지고 없게 됩니다. 그 결과는 우리는 제자들처럼 복음을 시험해 볼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게 됩니다. 복음의 능력과 그 가능성에 대한 우리들의 경험이 점점 더 좁아지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나름 할 말이 없지는 않습니다.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하곤 합니다. “나는 아직 말씀을 잘 알지 못해요.” “내 믿음은 내 한 몸 감당하기에도 벅찬 형편이에요.” “나는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해요.” 그러나 이런 변명은 본문의 제자들의 형편 또한 현재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간단한 사실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어찌되었던 그들은 보냄을 받았고 효과적으로 그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우리는 열흘 전에 바이블 카페를 열었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세번째로 열린 청년들을 초청하는 봄학기 바이블 카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초청 받아 올만 한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두 번의 바이블 카페 때 초청할 만한 사람은 다 해서 이젠 남은 사람이 없다는 말도 들렸습니다. 그래서 걱정이 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카페가 열리고 나니 초청 받아 온 사람이 그리 적지 않았습니다. 막상 친구를 초청을 하려니 죽을 것 같았는데, 큰 맘 먹고 도전한 러너스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바이블 카페를 축복하시고 도전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시고 그곳에서 정체성을 드러내고 복음을 전하는 모험을 감행해 보도록 도전하십니다. 그 모험의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배척을 당해 실패할 수도 있고, 영접을 받아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우리는 많은 것을 체험하고,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마냥 안전한 삶에는 성장이나 성숙도 없습니다. 안전한 교회가 영향력 있는 교회인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의 공수부대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제자는 세상에서 박해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15,16)

제자들의 전도여행 덕분에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헤롯 왕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이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헤롯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요?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17,18)

전에 헤롯이 바람이 나 조강지처를 버리고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1조 3,800억 재산분할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고 세례 요한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헤로디아는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겨 요한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보호하며 그의 말을 듣고자 했습니다.

헤롯이 지지부진 시간만 끌자 헤로디아가 음모를 꾸몄습니다.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연회에서 배꼽 티를 입고 야릇한 춤을 추어 헤롯과 그의 손님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헤롯은 그녀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무엇을 원했을까요? 최신 아이폰? 맥북? 성형수술? 세례 요한의 머리였습니다. 헤롯은 어떻게 했을까요?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26)

헤롯은 매우 근심했지만, 손님들 앞에서 체면을 지키기 위해 요한의 머리를 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요한은 감옥에서 처형되었고, 그의 머리는 소녀에게 주어져 어머니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 지냈습니다.

마가는 왜 지점에서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인 세례 요한의 죽음 사건을 상세하고 다루고 있는 것일까요? 내용은 세례 요한에 관한 것이지만 대상은 예수님의 제자를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진리를 말했기 때문에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예수님이 가실 길을 보여주는 예고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같은 길을 가게 되실 것입니다. 옳은 것을 옳다 하시고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 하시기에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제자들 차례입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뒤를 따라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목격하고 유명해지는 것이 제자도의 본질이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진리를 증언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는 ‘승리주의’라는 흐름이 있습니다. 승리주의는 예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믿는 자의 삶에도 반드시 승리가 나타난다는 사고 방식을 견지하는 태도입니다. 승리주의는 믿음을 통해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성공을 이루는 것을 강조합니다. 또한 교회와 개인의 신앙 생활에서 물질적, 영적 축복을 강조합니다. 믿는 자들에게 영적 권세가 있으니 이를 활용해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만들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승리주의에는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승리주의는 믿는 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고취시킵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신앙 생활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덕분에 승리주의는 신앙 공동체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통해 믿음의 승리를 직접 경험해 보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러나 승리주의만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승리주의는 때때로 고난과 역경의 현실을 무시하거나 축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축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믿음을 번영과 성공의 수단처럼 여기게 되기 쉽습니다. 처음에는 매력적이지만 우리들의 다양한 인생 경험과 인간성의 깊이를 다 담아 내기에는 한계를 드러내곤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면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사람인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의해 풀려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 끝까지 신실했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에 성공과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제자도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 대가가 엄청난 시련과 고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리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성공과 승리가 아니라 주님께 대한 신실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 드린 “나의 첫 심부름”이라는 프로그램은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보려고 가볍게 틀었다가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프로그램으로 유명합니다. 어떤 지점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가 하면 그 작은 꼬마들이 어떻게 하든 미션을 완수하려고 끝까지 고군분투하는 장면에서 입니다. 어떤 아이는 물건이 너무 커서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질질 끕니다. 그래도 고사리 손으로 끝까지 놓치지 않고 집까지 가져옵니다. 어떤 아이의 경우 엄마는 아이가 수퍼에 가서 사오라고 한 물건 대신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를 사올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과자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엄마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왔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너무 대견해서 눈물을 펑펑 쏟습니다. 설령 아이가 완벽하게 해내지 못했더라도 다그치는 어른은 아무도 없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장하다고 안아줄 뿐입니다. 시청자들은 처음으로 혼자 세상과 마주는 하는 아이들의 책임감과 용기에 감탄합니다. 아울러 끝까지 아이를 믿고 지지해주는 부모의 신뢰에 큰 감동과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세상은 거칠고 험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아직 어리고 연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심부름을 보내셨습니다. 심부름의 내용은 세상 각 사람들에게 복음이라는 선물을 배송해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냥 보내시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 도움을 주실 성령님과 함께 보내셨습니다. 보내고 나 몰라라 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모니터링하고 계십니다. 남몰래 보호해 주시고 응원하고 계십니다. 서툴고 부족하더라도 우리가 드디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했을 때 무척 기뻐하십니다. ‘잘 하고 못하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심부름을 어떻게 하든 이루고자 하는 책임감과 용기가 필요할 뿐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모른다 하여도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마음에 새기셨습니다. 세상이 주님의 이름을 모른다 하기에 우리는 오늘도 그 이름을 전파할 따름입니다. 잃어 버린 영혼들을 돌아오게 하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뤄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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