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창무 2024. 5. 1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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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9강 / 이창무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말씀/ 마가복음 4:26-41
요절/ 마가복음 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지난 주 수요예배 때 이 요한 목자님께서 ‘반지의 제왕’ 이야기를 한참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프로도 배긴스입니다. 그는 아라곤이나 레골라스처럼 싸움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간달프처럼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 키가 아담한 호빗 족속에 속한 평범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프로도에게 절대 반지를 파괴하라는 위험하고도 중대한 사명이 주어졌을까요? 한 마디로 프로도는 이 작품에서 믿음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위험과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친구와 동료에 대한 믿음, 선이 악에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지키려 합니다. 이 믿음이 그의 여정을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길 떠나는 사람들, 바로 우리들에게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기를 기대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첫째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렇게 다소 낙심한 제자들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입니다. “땅의 상태가 엉망진창인 곳이 많구나! 밭도 갈고 돌도 들어내고 가시도 뽑아야 하다니! 말씀 농사는 너무 힘든 것 같아. 그냥 접을까?” 그들을 위해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2탄을 준비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26)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혹시 식물을 키워 보셨습니까? 제 동역자는 여러 가지 화초를 심고 가꾸는 것에 진심입니다. 바쁜 중에도 베란다 곳곳에 다양한 반려식물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씨를 뿌린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경험하길래 이처럼 식물 키우는 일에 매료되는 것일까요?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27-29)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리고 나면 얼마 동안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매일 거기서 거기 같습니다. 그러나 농부의 눈으로 관찰할 수 없을 뿐이지 씨는 자라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물질대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농부는 이 과정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자고 깨고 할 뿐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농부가 하는 일보다 훨씬 많은 일을 땅이 합니다. 그 결과 씨는 싹이 나고 이삭이 자라고 곡식이 되고 어느새 추수할 때가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씨앗이 가진 생명의 신비입니다. 여기에 씨 뿌리는 자의 희열이 있습니다.

말씀을 뿌려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도 그대로이고, 세상도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뿌리나 안 뿌리나 똑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뿌린 사람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하나님 나라는 지금도 어디선가 자라고 있습니다. 말씀 안에 영적인 생명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 나라가 눈에 띄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확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여기에 말씀을 뿌리는 사람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런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친히 이루어 가신다는 믿음입니다. 말씀이 자라서 열매 맺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열일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자고 깨고 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경험하며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신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니라”(고전3:6,7)

둘째로, 하나님 나라는 엄청난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31,32)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습니다. 겨자씨를 보신 적이 있나요? 지름이 1mm에서 2mm 정도로 우리가 음식에 뿌려 먹는 참깨 한 알 크기와 비슷합니다. 이 정도로 작은 겨자씨가 나중에는 1미터에서 3미터 정도로 천 배 이상 자라게 됩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그늘에 깃들일 정도로 커집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출신의 어부 네 명으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3년 동안 열 두 명의 공동체를 이루셨습니다. 어떤 사람도 이들을 한 나라의 시작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한 하나님 나라가 장차 큰 나라가 될 비전을 보셨습니다. 그 나라에 열방 나라 사람들이 몰려와 구원과 평안을 얻게 될 미래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이 작은 시작에서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가능성을 보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작은 미약하지만 결국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는 빨리 뛰어내려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상황이나 조직이 실패를 향해 치닫고 있을 때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그 상황이나 조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상황을, 특히 청년 대학생 사역의 현실을 침몰하는 배에 비유하는 분석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뛰어내리는 것이 정답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바다에 침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친히 이루어 가시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실제로 로마 제국에 박해를 받던 교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제국 전체를 삼켜 버렸습니다. 박해 속에서는 교회는 오히려 더 강해졌고 더 순수해졌습니다.

얼마 전 가천 UBF에서 두 분이 풀 타임 스텝 목자에 지원을 하셨습니다. 가천 UBF는 주일 예배 인원이 30명 정도입니다. 이런 곳에서 두 사람이나 풀 타임으로 세우다니 다들 놀라워했습니다. 이에 대해 가천의 박 아브라함 목자님은 ‘당장의 필요가 아니라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고 세웠습니다.’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겨자씨 같은 현실이 아니라 장차 우뚝 솟아오를 큰 나무를 보신 것입니다.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올라타셨습니다.

이런 믿음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한 알의 씨를 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쉴 곳을 찾아 헤매는 영혼들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그늘 아래 들어와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길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35)

예수님께서 앞선 두 개의 비유를 말씀하신 그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바다 건너편은 평소 제자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이방인의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익숙한 곳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자 제안하신 셈입니다. 이 여정에서 예수님 일행은 어떤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37)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순식간에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제자들이 어떻게 하든 손을 써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배가 곧 전복되어 바다에 빠질 수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38)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거친 파도에 배는 널뛰기를 하고 날카로운 바람 소리, 제자들의 찢어지는 고함 소리가 난무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으셨을까요? 사역을 감당하느라 너무 피곤하셨을까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는 밖에는 광풍이 휘몰아치고 있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지극히 평안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평안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요? 앞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은 씨앗에서 시작해서 큰 가지를 내고 결실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자라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겨자씨입니다. 이 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만약 이번 광풍에 의해 배가 침몰해 버린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다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이 친히 키우시고 보호하시기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셨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예수님은 평안 가운데 자고 깨고 하실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많이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왜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내 가족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우리는 예수님과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가 처해 있는 위험한 상황에 이토록 무관심하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너무 평안하신 것 때문에 도무지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39)

제자들의 성화에 깨어나신 예수님은 마치 바람이 귀가 있고 바다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랬더니 즉시 미친 것처럼 날뛰던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구약에서 바다를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바다의 광풍을 잠재우심으로 자신의 신적인 권위를 나타내셨습니다.

이제는 모든 상황이 끝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제자들과 해결해야 할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4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이렇게까지 두려워하지 않을 근거가 충분한데, 왜 두려워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풍랑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으셨던 근거와 정확하게 같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관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그 비유의 말씀들입니다. 분명 제자들은 말씀을 기쁘게 받기는 했는데, 아직 그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는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편에 나오는 네 종류의 땅 중에 어디에 해당합니까? 바로 돌밭과 같은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광풍을 통해 돌밭과 같은 제자들의 마음에서 돌을 들어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을 하셨다는 것은 이전에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었을 때 제자들에게 믿음이 생겼습니다. 문제는 광풍이 불어오자 그 거센 바람에 말씀도 날아가고 그들의 믿음까지 다 날아가 버렸다는 점입니다. 알고 보니 진짜 광풍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제자들의 마음 속에 불어온 두려움과 의심의 광풍이었습니다.

만약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 역시 예수님처럼 광풍의 한 가운데서도 평안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광풍을 요람을 흔드는 손으로 삼아 예수님 옆에 나란히 누워서 함께 잠을 잘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게 가능하냐고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믿음만 있다면 말입니다.

저는 동역자가 막내를 임신했을 때 검사를 한 결과 기형아일 확률이 90%가 넘는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정확한 결과를 알기 위해 양수 검사를 했습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2주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저는 “만약 정말 장애가 있는 아이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가? 평생 여기에 매인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등등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염려와 걱정,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제 영혼에 광풍이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말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로마서 8장 28절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붙들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기로 했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결과를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좀전까지 있던 모든 불안과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이 일순간에 다 사라졌습니다. 평소보다도 더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단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최종 양수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습니다만, 제가 평안을 얻게 된 시점은 결과지를 받은 시점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을 갖게 된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평안은 광풍이냐 순풍이냐가 아니라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가 미국에서 집회를 마치고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던 때였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갑자기 거센 폭풍우가 몰아쳐 배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웨슬리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배 밑바닥 쪽에서 희미하게 노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내려가보니 모라비안 교도들이 옹기종기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웨슬리가 그들의 얼굴을 보니 전혀 두려움이나 불안함이 보이지 않은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순간 웨슬리는 정작 목사인 자신은 믿음이 없는데 평신도인 모라비안 교도들이 참된 믿음을 가진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영국으로 살아 돌아온 웨슬리는 처음부터 다시 복음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시 회복하게 된 믿음과 은혜를 그는 제 2의 축복이라고 불렀습니다. 광풍을 통해 새로워진 믿음으로 웨슬리는 이후 어떤 역경에도 흔들림 없이 복음 역사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존 웨슬리처럼 제자들은 광풍 사건으로 자기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 실제적인 믿음이 부족한 자들인지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광풍이 주는 첫번째 발견입니다. 더 중요한 두번째 발견도 있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41)

제자들의 반응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나옵니다. 방금 전까지 두려움의 대상은 광풍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을 두려워합니다. 말씀 한 마디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이분은 도대체 누구인가? 경외심으로 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원어로 보면 ‘큰’이라는 뜻을 지닌 ‘메가’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메가톤, 메가 커피, 메가 스터디의 바로 그 메가입니다. 처음은 ‘큰 광풍’에서, 두번째는 ‘아주 잔잔하여졌더라’에서, 세번째는 ‘심히 두려워하여’에서 나옵니다. 큰 광풍이 큰 고요함으로, 결국 큰 두려움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큰 광풍을 큰 고요함으로 바꾸어 놓았습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 앞에 제자들은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재발견하게 된 것이 광풍이 주는 가장 큰 유익입니다. 광풍이 제일 큰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광풍보다 더 큰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알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내가 알던 예수님, 그 이상의 예수님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제 2의 축복이 아닐까요?

광풍, 미친 바람입니다. 반가운 손님은 아닙니다. 솔직히 제발 나에게는 불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라면 오히려 광풍이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때로는 광풍을 통해 우리 마음 밭을 갈아 엎으시고 돌을 치우시고 가시떨기를 제거하십니다.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광풍으로 믿음의 뿌리를 내립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붙들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씨름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성장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이 행동에 나서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이 예수님을 신뢰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에 우리는 폭풍 중에서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은 예수님이 그 길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그 길에서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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