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창무 2024. 5. 26.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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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1강 / 이창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 마가복음 5:21-43
요절/ 마가복음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제가 인사팀 채용 담당자로 일하면서 임원들이 면접 볼 때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습니다. 임원들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이 승승장구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실패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위기를 딛고 다시 일어난 경험이 있는 사람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발전과 성장의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좋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은 여러 가지면에서 대조가 되는 사람이지만 한 가지 지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위기를 거치면서 발전하고 성장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 나타난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믿음은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을 뛰어넘게 합니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21)

예수님이 거라사 지역을 떠나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선착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내릴 때 가장 먼저 앞으로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22)

바로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였습니다. 회당장은 회당을 관리하고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지역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지도자였습니다. 대부분 회당장들은 유대교의 전통을 전폭적으로 따르지 않는 예수님께 대해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께 나아왔고, 그 발 아래 엎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23)

야이로에게는 큰 위로와 기쁨을 주었던 열 두 살 된 딸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야이로가 회당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아빠’하고 달려 나가 그의 품에 안기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갑자기 중병에 걸렸습니다. 이대로 있다가 곧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때 야이로는 예수님이 근처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가 간구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스치듯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동료들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렇게 하면 내 체면은 뭐가 될까?” 하는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 따위 체면이나 평판 따위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오시면 죽어가던 딸이 살 수 있으리라는 믿음 하나로 나아왔습니다.

야이로의 간구에 예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딸이 있는 곳을 향해 출발하셨습니다. 이때 큰 무리가 따라가면서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습니다. 그들 중에 몰래 나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25,26)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않아온 여자였습니다. 혈루증은 부정기적으로 피를 흘리는 부인과 질환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까지 많은 의사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재산을 모두 다 탕진했습니다. 하지만 병이 낫기는 커녕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만성적인 빈혈에 시달렸습니다. 여인의 고통은 육체적인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 여인의 병은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마저 손을 잡을 수도 안아줄 수도 없었습니다. 여인은 지난 12년 동안 뼈에 사무치는 처절한 고독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집에 누워 죽는 날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27,28)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면서 반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시고,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어 깨끗하게 하셨고 한 손 마른 사람의 손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소문만 듣고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불을 박차고 밖으로 나와 예수님이 계신 곳을 향해 갔습니다.

하지만 앞에는 큰 장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부정한 여인이라서 야이로처럼 공개적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여인은 여기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갈 수 없으니 대신 뒤로 갔습니다. 몸을 만지면 들킬 테니 느끼지 못하게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믿어도 되는 것일까요? 이게 무슨 아무 믿음 대잔치입니까? 그런데 이 믿음이 역사했습니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29)

Just one touch! 단 한 번의 접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12년 동안 흐르던 혈루 근원이 말랐습니다. 서서히 말라 죽어가던 여인의 온 몸에 생명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인생의 위기를 만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야이로는 12년 동안 회당장으로 존경받으며 사랑하는 외동딸과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딸이 몹쓸 병에 걸려 목숨을 잃을 지 모르는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반면 혈루증 않던 여인은 같은 12년 동안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1/n로 나누어진 위기를 매일매일 겪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양상은 이렇게 사뭇 달랐지만, 인생의 위기가 두 사람 모두에게 예수님을 믿음으로 붙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힘들고 절박했기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예수님을 꼭 붙들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너무 높은 지위가, 다른 한 사람에게는 너무 낮은 지위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에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믿음으로 장애물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 건져주세요. 주님! 살려주세요.” 그렇게 기도할 때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혹시 지금 야이로처럼 가족의 문제로, 아니면 혈루증 여인처럼 질병의 문제로 위기를 겪고 있는 분이 있나요? 우리는 종종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아무 일도 없이 평안하기만 하다면, 예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부르짖거나 매달릴 기회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번에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내가 평생 기도했던 것보다 더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의 위기를 오히려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로 만든 것입니다. 단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위기는 기회가 되지 못하고 그냥 위기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자의식이나 절망감 같은 내적인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하고 주저 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만났을 때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간절한 기도로 주님께 매달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믿음은 우리에게 온전한 구원을 가져오는 통로입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30)

여인은 아무도 모르게 왔으니 아무도 모르게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이 자기에서 나간 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신비한 현상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사람이 몰래 빼내 갈 수 있는 은행 계좌 같은 것일까요?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이 충만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물이 가득 찬 그릇에 손을 대기만 해도 물이 흘러 넘치듯이, 예수님의 충만한 은혜는 여인이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저절로 흘러 넘치는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은혜를 베푸신 후 옷에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 찾으셨습니다. 왜 찾으셨을까요? 기어코 찾아내서 치료비를 받으려 하셨을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려워 떨며 나아온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이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

첫째,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딸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여인은 조금 전에 야이로가 예수님께 내 딸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여인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에게도 저런 아빠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인은 야이로 같은 아빠가 없어서 너무 슬펐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향해 예수님의 입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 나왔습니다. “딸아” 여인이 12년 만에 처음으로 듣게 된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다시는 병들었다고 해서 멀어지지 않을 아버지, 자비하시고 영원하신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으면 이전까지 평안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만약 여인이 여기서 그냥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은총을 도둑질했다는 죄의식과 두려움이 남았을 것입니다. 비록 몸은 건강하게 되었을지라도 마음은 계속 어두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당하게 예의를 갖춰서 제대로 나오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 없었던, 감사를 표현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이 여인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셨습니다. “네가 내 능력을 훔쳐간 것도 아니고 무례하게 행동한 것도 아니다. 너는 믿음으로 나아왔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말씀하시며 여인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이미 병이 다 나았습니다. 여인 자신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여인보다는 주위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여인이 병이 나은 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따돌림을 당하는 일을 예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몸과 마음과 더 나아가서 사람 사이의 관계까지 회복해 주시기자 하셨습니다. 여인이 오래 잃어버렸던 공동체를 되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야이로는 부자지만, 혈루증 여인은 빈털터리입니다. 야이로는 명망 있는 유지이지만, 혈루증 여인은 마을 안에 들어오지는 못하는 부정한 여인입니다. 야이로는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간청했지만, 혈루증 여인은 아무도 모르게 무례하게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이 둘을 비교한다면 누가 봐도 야이로를 우선으로 여기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혈루증 여인의 병이 나았으니 그냥 지나쳐도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온전한 구원을 베풀어 주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육체 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함께 사는 삶까지 회복시켜 주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금쪽같은 시간을 여인에게 온전히 내어 주셨습니다. 물론 야이로의 딸도 소중하지만, 예수님에게 혈루증 여인도 똑같이 소중한 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믿음만 보셨습니다. 그 외에 다른 인간 조건들은 예수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를 부르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일 시켜 부려 먹으려고 부르실까요? 소감에 자기 이야기를 다 털어놓으라 압박하려고 부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여름 수양회를 앞두고 이런 생각을 하기 쉬운데 오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이유는 우리를 온전한 사람, 건강한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몸과 마음과 관계까지 전인격적인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아들과 딸로 영접해 주시고 우리의 상한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께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뿐입니다. 부끄럽지만 예수님이 영접해 주실 것을 믿고 있는 모습 그대로 그분 앞에 나아가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찾으실 때 숨지 맙시다. 도망가지 맙시다. 혈루증 여인처럼 우리를 찾으시는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고치실 것입니다. 이번 여름수양회 때 우리 가운데 이런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믿음은 두려워하는 대신 계속해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딸의 생명이 꺼져가는 심지처럼 위태로운 순간에 나타난 이 여인이 얄미웠습니다. 그런 여인을 굳이 불러 세우신 예수님도 야속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닥치고 말았습니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35)

예수님이 아직 여자와 말씀하실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딸이 이미 죽어버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야이로에게 예수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말고 보내 드리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나를 배려해 주어서 고맙다고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36)

예수님은 소식을 가져온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무시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야이로도 그들의 말을 무시해야 했습니다. 대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첫번째로 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였습니다. 야이로는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딸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딸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을 믿었었는데 결국 딸이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한 일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마비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두번째로 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은 “믿기만 하라”였습니다. 믿다가 상황이 악화된다고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딸이 죽었는데도 야이로에게 계속해서 믿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죽음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야이로는 내 생각과 기대보다 훨씬 더 크신 주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믿으면 항상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현상 유지도 아닌 상황 악화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 시점이 믿음의 시험을 만나는 때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괜히 믿었나 보다 하면서 믿음을 접기도 합니다. 믿음을 잃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믿음에 대해 냉소적인 사람으로 갑자기 변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옆 사람에게 믿어봐야 아무 소용없으니 믿지 말라고 불신을 권장하는 몹쓸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아예 믿지 않았으면 모를까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사람이 언젠가는 겪게 될 가능성이 있는 위기의 순간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혈루증 여인과 야이로에게서 두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할 때,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마저 역전시킬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모든 승리 중에 가장 짜릿한 승리인 역전승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우리도 삶의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믿음이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보여주시기 위해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말씀하시자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신의 사람들을 다 내보내신 후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셨습니다. 차갑게 굳은 아이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아침에 잠자는 아이를 깨우듯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 “아이야, 일어나라.”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나 걸었습니다. 겨우 호흡이 미세하게 돌아온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곧바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살아났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죽은 소녀도 살릴 수 있단 말인가!?”

지난 주 우리는 세리토스 UBF 김한나 선교사님의 인생 소감을 들었습니다. 선교사님은 믿음으로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정말 우직하게 사명에 충성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 외동 아들이 게임에 빠져 학교에 가지 않는 등 방황하기 시작하면서 큰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한없는 절망과 심각한 우울증에 헤어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때 세리토스 UBF의 선교사님들이 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날마다 모여서 김한나 선교사님 한 분을 위해 합심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도록 계속해서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한나야! 일어나라” 말씀하시며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 결과 이제 김한나 선교사님은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시고 깊은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위기 앞에 두려움과 절망으로 벌벌 떨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게 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계속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기만 하면 주님께서 죽을 것 같은 현실도 반드시 변화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만을 가지고 나아가서 주님께 간구함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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