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큰 일을 행하신 예수님

이창무 2024. 5. 19.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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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0강 / 이창무

큰 일을 행하신 예수님

말씀/ 마가복음 5:1-20
요절/ 마가복음 5: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한 사람이 지닌 가치를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사람들은 그 사람이 받는 연봉으로 가치 평가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면에서 그렇지만 특히 운동 선수 세계에서는 매우 심합니다. 현재 세계 최고의 연봉을 받는 선수는 축구 선수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라고 합니다. 일년 수입이 3,523억원으로 하루에 10억원씩 벌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에 최저 임금에도 못 치는 연봉을 받아 ‘투잡, 쓰리잡’을 해야 하는 선수들도 꽤 많다고 합니다.

과연 연봉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진정한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수입이 많으면 가치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가치한 사람일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사람의 가치에 대해 성경적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탄의 세력은 사람을 가치 없는 존재로 망가뜨리려 합니다.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1,2)

예수님 일행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일찍부터 헬라 문화가 이식된 곳이고 로마 군단이 주둔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이태원이나 동두천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갈릴리 지역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거리 곳곳에 우상의 신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술과 마약과 성매매가 만연하고, 폭력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런 곳이야말로 더러운 귀신이 활동하기에 최적의 장소 아닐까요?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이 도착하자마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뛰쳐나왔습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을 많이 만나 보셨지만, 이번에는 정말 역대급이었습니다. 그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3,4)

그는 무덤 사이에 거처했습니다. 귀신에 들린 후 그는 통제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 여러 사고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놓았습니다. 어디서 온 지 알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해 그는 고랑과 쇠사슬을 끊고 이곳 무덤에 오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이 내가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과연 정말 그럴까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5)

이곳에서 그는 밤낮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그는 돌로 자기 몸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왜 자신을 이렇게 학대합니까? 자기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놈은 인간 쓰레기라고, 살 가치가 없는 놈이라고 계속 되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전혀 자유롭지도 않았고, 편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영혼이 더러운 귀신의 세력에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사람의 모습과 지금 이 사람의 모습과 비교를 해 보십시오. 그 거리가 지구와 안드로메다 사이의 거리보다도 더 멀어 보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하나님의 형상이 곧 의와 거룩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귀신들린 이 사람에게서 의와 거룩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덤 사이에 거하는 이 사람에게서 생기를 찾을 수 없습니다. 본래 사람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을 학대하며 저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사람은 괴물이지 도저히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망가질 대로 망가지게 되었습니까? 오은영 박사님에게 물어보면 문제 부모가 원인이라고 답해줄 지 모릅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회가 문제라고 분석해 줄 지 모릅니다. 맞는 말입니다. 분명 이런 것들이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일 뿐입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악한 영들, 사탄의 세력이 있습니다.

21세기에 무슨 악한 영이냐고 반문할 지 모릅니다. 그런 것은 공포 영화나 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지 모릅니다. C.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사탄의 최고 전략이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전략은 오늘날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악한 영의 존재를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사탄과 그가 부리는 악한 영들은 분명히 실재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인격을 무너뜨리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을 파괴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모든 관계를 끊고 자기만의 무덤을 만들어 거기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사람들, 통제가 되지 않는 사람들, 의미 없이 악을 쓰고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누가 도울 수 있습니까? 누가 이들을 구원하고 온전하게 할 수 있습니까?

둘째로, 예수님은 사람의 가치를 회복시키기 위해 사탄의 세력과 맞서 싸우십니다.

예수님은 놀랍게도 이방인의 땅에서 귀신 들린 사람과 대화를 하셨습니다. 사실 귀신 들린 사람과 대화를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있는 귀신과 대화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6-8)

먼저 귀신은 예수님의 정체를 폭로했습니다. “나 당신이 누구인지 다 알아! 나 귀신이야!” 이로써 기선 제압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를 괴롭게 하지 말아 달라.” 거칠게 저항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 나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 영화 시장에서 ‘범죄도시’ 시리즈가 큰 흥행을 거두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에는 ‘장이수’라는 개그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그는 이수파 두목이자 사기 국제 결혼 업체를 운영하는 범죄자입니다. 이런 그가 마석도 형사(배우 마동석)가 나타날 때마다 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또 못살게 구네!”

범죄 도시 거라사에 마동석처럼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분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귀신의 세력은 예수님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역사하기 시작하면 귀신의 세력은 “또 못살게 구네!” 하면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귀신의 세력을 때려잡을 예수님의 강력한 펀치 한 방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9)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왜 이름을 물으셨을까요? 귀신의 정체를 드러나면 귀신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파이가 정체가 탄로하면 더 이상 스파이 노릇을 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의 추궁에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자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군대는 6,000명가량 되는 로마의 군단을 의미합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떼귀신이 이 사람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혼자입니다. 1 대 6,000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귀신들은 상대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나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대신 우리를 마침 근처에 있던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13)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자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돼지 떼가 다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돼지 이천 마리를 희생하심으로 이 귀신 들린 사람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인간 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할지라도 그 한 사람의 가치가 크고 소중한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단지 악한 영에 사로잡혀 사람 답게 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보셨습니다. 악한 영으로부터 해방되기만 하면 이 사람도 얼마든지 온전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귀신의 세력을 윽박질러서 결국에는 그 사람을 포기하고 떠나게 하셨습니다.

범죄 도시를 보면 마동석이 아무리 압도적인 피지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안 맞는 것은 아닙니다. 때리면서 많이 맞습니다. 때로 머리가 깨지고 피를 철철 흘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악당이 쓰러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 싸웁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끝까지 싸우셨습니다.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시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마침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다 내어 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죄 가운데 뒹굴면서 정신없이 살던 우리를 어느 날 말씀은 찾아오신 주님이 너무나도 보배롭고 가치 있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사람 같지 않던 우리를 사람 답게 빚어가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사탄의 세력과 끝까지 싸우시고 승리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셋째로,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망각한 세상을 향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전파해야 합니다.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14,15)

돼지를 치던 자들이 이 일을 보고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알렸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러 나왔다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에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더욱 두렵게 한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16,17)

바로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죽어서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충격 받은 그들은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 지역에는 귀신 들린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속 머무시면 지역 축산업이 붕괴될 것만 같았습니다. 한 영혼이 온전하게 되는 것보다도 돼지 떼를 지키는 것이 그들에게 더 중요했습니다.

돼지는 잡식성으로 사람과 같은 것을 먹습니다. 게다가 그 먹는 양도 어마어마합니다. 그렇기에 식량이 한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돼지를 키운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이 먹을 식량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결국 돼지를 키운다는 것은 부자가 미식을 즐기기 위해 가난한 자의 식량을 줄어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거라사 땅은 최소한 수천 마리의 돼지를 키우던 동네였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얼마나 돈을 중요하게 여기고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지를 알려줍니다. 이곳은 사람보다 돼지가 더 높은 가치가 매겨지는 동네이고, 사람보다 돈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마을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헬라어로 맘몬이라서 여기에서부터 맘몬이즘이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맘몬이란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에게 경배의 대상이 되는 물질을 의미합니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돈귀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돈귀신에 사로잡히면 생명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돈귀신에 사로잡히면 사람보다 돈을 더 가치 있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귀신 들린 사람입니까? 군대 귀신에 들린 사람은 당연히 귀신 들린 사람입니다. 그러면 돈귀신에 사로잡힌 마을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아닙니까?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께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요청했고, 돈귀신이 사로잡힌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우리 나라는 군대 귀신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도 군대 같았고 회사도 군대 같았고 군대는 그냥 군대 같았고 나라 전체가 군대 같았습니다. 폭력이 날마다 행해지고 억압이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음에 한이 맺힌 사람들, 내면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 자신을 놓아버린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군대 귀신의 힘은 많이 약해진 것 같습니다. 폭력과 억압은 대부분 사라지고 부드럽고 신사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군대 귀신이 떠난 자리를 돈귀신이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 전형적인 사례가 10년 전 세월호 사건입니다. 당시 사고가 일어난 이유는 오래된 배를 중고로 싸게 구매해서 더 많은 물자를 나르기 위해 무리하게 증축한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세월호 사태는 사람의 생명과 안전보다 돈과 물질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겨왔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돼지 이천 마리를 키우는 동네는 사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24년의 대한민국 아닐까요? 이런 세상을 향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18,19)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너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 주께서 너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는지를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데가볼리 지역의 선교사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후 그는 예수님의 방향에 순종했습니다. 증언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과거 치부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 데가볼리 지역에 전파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변화된 그 사람 자체가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는 힘과 돈에 미친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침묵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일을 행하셨는지, 얼마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는지 세상이 알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악한 영들에 사로 잡혀 고통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편안한 곳에 숨어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널리 전파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 속에 있는 광기를 치료하고 당신 속에 있는 악령을 쫓아낼 것이라고 외쳐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우리의 영광입니다. 우리의 증언을 통해 주님 안에서 한 사람의 가치가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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