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

이창무 2024. 4. 2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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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7강 / 이창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

말씀/ 마가복음 3:20-35
요절/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지난 스텝 목자 봄 수양회에서 강의하신 한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사 결과 현재 캠퍼스 내에 복음화 비율이 2% 내외로 본다고 합니다. 선교학에서는 일반적으로 4% 미만을 미전도종족으로 분류한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캠퍼스는 미전도종족이라 불러야 할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 캠퍼스에 다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새 역사가 새롭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성령님의 일하심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되고자 하는 소원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성령의 역사에는 항상 오해와 비난이 뒤따릅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20)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였습니다.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 말씀에 목마른 사람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병이든지 예수님에게 가기만 하면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도 모두 다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느라 너무 바빠서 식사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역사가 잠잠하던 유대 사회를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점점 더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 부대를 터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오해하는 친족들입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21)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 왔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예수님은 아주 얌전한 분이셨던 것 같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변했습니다. 더 이상 예전에 그들이 알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정면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 담대한 분이 되셨습니다. ‘I’였던 분이 갑자기 ‘E’가 되었습니다. 친족들은 암만 봐도 예수님이 이러다 큰 일을 낼 것 같았습니다.

친족들이 예수님께 원하는 삶은 한 마디로 말해서 안정된 삶, 편안한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목수 일 하면서 남들처럼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평범한 삶이면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기 삶을 내팽개치고 세상을 뒤집으려 하는 것처럼 보이니 미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무 걱정이 되는 나머지 더 늦기 전에 멈추게 하려고 잡으러 온 것입니다. 친족들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아끼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기만 하면 단순히 이 세상에서 좀 더 편하게 살고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것만으로 도저히 만족할 수 없게 됩니다. 성령께서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경험해 본 사람은 이 역사에 동참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을 일어납니다. 누구도 복음 때문에 뛰는 이 가슴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세계 선교 보고 대회에서 선교 보고를 발표하신 선교사님들이 다 이런 분들입니다. 한국에서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브라질에 선교사로 가신 분도 계시고, 60이 넘어 은퇴한 후에 아프리카 르완다에 선교사로 가신 분도 계십니다. 이분들의 친족들이 보기에는 역시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미치고 말씀에 미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으니 그분을 따르는 제자 역시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정상이 아닐까요? 이에 반해 오늘날 우리는 너무 정상적이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한번 성령에 사로잡혀 예수님에게 미치고 복음에 미쳐보면 어떨까요?

둘째, 비난하는 서기관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22)

수도인 예루살렘에서부터 서기관들이 내려왔습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의 최고 엘리트들이며 고상한 학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뒷조사를 마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는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힌 것이 틀림없다! 그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귀신의 왕 곧 사탄의 힘으로 한 것이다!”

‘바알세불’이란 파리떼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왜 하필 이런 단어로 예수님을 규정한 것일까요? 이는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지저분하고 천박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서기관들은 하루 종일 도서관에 파묻혀 책 읽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와서 보니 예수님은 진물이 흘러나오는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어 고치고 계셨습니다. 귀신이 쫓겨날 때 그냥 나가지 않았습니다. 괴성을 지르고 입에서 거품을 흘리며 경련을 일으키면서 나갔습니다. 딱 봐도 제자들은 가방 끈이 짧아 보였습니다. 스스로를 고상하다고 믿고 있는 서기관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천박한 파리들의 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에 대한 지식인들,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의 시각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정치적 올바름(PC주의), 인본주의, 상대주의, 페미니즘 등이 대세입니다. 이런 생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보고 “기독교는 독선적이다. 배타적이다. 반지성적이다.” 이런 판단을 내립니다. 기독교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프레임을 덧씌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기에 영향을 받아 덩달아 기독교를 적대시입니다. 포털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기사에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 많은 비난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고 기가 찰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급적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이 좋은데 내가 이런 부정적인 프레임에 갇히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출세도 하고 성공도 하려면 사람들의 평판이 중요합니다. 그냥 가만히 조용히 있는 것이 제일 좋지 않을까요?

문제는 ‘과연 예수님도 이렇게 생각하셨을까’ 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먼저 살피고, 나아가 그 길을 우리도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지혜로운 변증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23a)

예수님은 움츠려 들거나 숨지 않으셨습니다.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비유를 통해 적극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변호하셨습니다.

첫째, 모순을 드러내십니다.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23b,26)

예수님은 먼저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는 질문을 통해 서기관들의 프레임에 치명적인 모순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어려운 질문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리가 있겠습니까? 서기관들의 주장대로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왜 말이 안 됩니까?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사장과 직원들이 맨날 싸우면 그 회사는 곧 망합니다. 집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매일 싸우면 그 집은 얼마 가지 않아 박살이 날 것입니다. 사탄이 누구 좋으라고 스스로 분쟁을 일으켜 망하는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서기관들의 씌운 부정적인 프레임의 허점을 찾으시고 이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에 씌워진 부정적인 프레임에도 분명 빈틈이 있고 모순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이것을 찾아서 드러낼 수 있다면 사람들의 선입관과 고정 관념을 충분히 흔들어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진실을 밝히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거짓 프레임을 벗겨내고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 주셨습니다. 진실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27)

여기서 강한 자는 사탄을 가리킵니다. 그 집의 세간은 사탄에 매여서 종 노릇 하고 있는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예수님은 사탄을 결박해 놓고 사탄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을 사탄에게서 빼앗아 그들을 해방시켜 주고 계십니다. 언제 결박하셨습니까?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사십일 간 시험 받으실 때 사탄과 대결에서 승리하여 그를 결박하셨습니다. 그 이후 예수님은 병의 사슬에 매였던 사람들, 귀신에게 지배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풀어내어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한가한 여가 활동이 아닙니다. 악령의 세력과의 치열한 전쟁입니다. 어떻게 전쟁을 점잖게 고상하게 할 수 있습니까? 싸우다 보면 단추가 떨어지고 바지가 찢어질 수도 있습니다. 영적 싸움을 하다 보면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격하게 책망할 수도 있습니다. 거칠어 보이고 촌스럽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들에게 보이는 이미지가 아닙니다. 한 영혼을 죄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미쳤다는 소리, 귀신의 왕과 한통속이라는 누명을 쓸 각오가 되어 있으셨습니다.

소식지 크로스 4월호에 실린 강 모세 선교사님의 글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선교사님이 어느 날 학생회관 화장실에서 우연히 학생회 간부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운동권 선배가 후배들을 이렇게 질책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야 이놈들아 지금 UBF에서 몇 명이 모여 집회하는 줄 아냐? UBF를 좀 배워라 배워” 선교사님은 속으로 ‘할렐루야’를 외쳤다고 합니다.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얼마나 열띤 투쟁을 했습니까? 목자들은 그보다 더 가열찬 투쟁을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죄와 죽음의 세력에 매인 사람들을 풀어내어 살리는 일에 우리를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자랑스러워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고 달라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경고를 주십니다.

만약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이 성령의 역사에 부정적인 프레임을 덧씌우는 일을 계속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28,29)

서기관들은 영원히 죄를 용서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그들에게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왜 이 일이 그토록 심각한 것입니까?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프레임을 뒤집어 씌움으로 성령의 역사를 훼방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할 뿐더러 다른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을 가로 막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담긴 뜻은 ‘너희는 끝장 났어! 다 지옥 갈거야!’라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은 안 돼. 지금 당장 멈춰야 해!’라는 뜻입니다. 이제까지는 몰라서 그랬다 할 수 있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방금 예수님께서 무엇이 오류인지, 무엇이 진실인지 다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들도 여기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 예수님께 씌운 프레임을 고집하고 안티 활동을 해 나간다면 고의로 진리를 거스르고 죄를 짓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기독교에 씌워진 잘못된 프레임을 걷어내고 복음 진리를 드러내는 활동을 가리켜 ‘변증’이라고 부릅니다. 초대 교회 이레니우스, 오리겐, 터툴리안 등부터 20세기 C.S.루이스까지 훌륭한 변증가들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왜곡과 악선전이 난무하는 21세기에도 변증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다 꼭 유명한 변증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내 주위에서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비난이 가해질 때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 설득력 있게 복음을 변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필요는 공감하지만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변증을 하려면 실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경과 교리 공부를 통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깊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님을 힘입어 비겁한 침묵 대신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친족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다가 실패하자 이제는 직계 가족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동생들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집 안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밖에 가족들이 와서 당신을 찾고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33,34)

예수님은 먼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당연히 저 밖에 와있는 분들이겠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빙 둘러 앉은 제자들을 향해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에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감격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계신 줄은 몰랐는데 알고 보니 츤데레 성향이 있으시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밖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 있나?’ 섭섭하고 속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결코 마리아와 친동생과 의절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진의는 다음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5)

예수님은 ‘누구든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누구든지’ 안에는 어머니 마리아와 친동생들도 포함이 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면 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들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혈연 관계만이 가족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진정한 가족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바로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긴 한데 피 중에 가장 진한 피는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한 가족입니다. 교회에서 괜히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혈연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당장 우리만 해도 온 가족이 다 함께 이곳에서 신앙 생활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습니다. 남편이나 아내 중 한 분만 나오기도 하고 결혼을 하지 않고 계속 솔로이신 분도 있습니다. 러너스에는 소위 2세 출신이 다수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분도 있습니다. 혈연이 너무 강조되면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족의 일원으로 항상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린 곳이 되어야 합니다.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래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친족들과 어머니와 친동생들의 요구를 뿌리치심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가족 관계를 모두 무시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으로서 기대와 요구가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잠시 오해와 아픔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할 수 없고,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정말 가족으로 여기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서로 관심을 가지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힘쓸 것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시간을 할애해 함께 하고 섬기고자 할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조선일보에 “흡연, 과음, 비만보다 해롭다 … 사망 위험 2배 높은 생활 습관”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한 편 실렸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사망 위험을 2배나 높이는 최악의 생활 습관일까요? 답은 외로움과 고립이었습니다. 특히 미혼 여성과 중년 남성의 고독감이 심각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한 분 한 분이 우리로 하여금 외로움과 고립에서 벗어나게 해 준, 사망 위험을 절반 이하로 낮춰 준 너무 고마운 분들입니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성경 공부하고 함께 기도하는 믿음의 동지이고 친구이며 나의 형제이요 자매이며 아버지이며 어머니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우리가 모인 이곳에 성령께서 친히 임재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사탄의 종 노릇하던 사람들이 해방되는 성령의 새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시대에 굴복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변증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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