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이창무 2024. 4. 21.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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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6강 / 이창무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말씀/ 마가복음 3:1-19
요절/ 마가복음 3:13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967년도 처음에 출시된 ‘용각산’이라는 가래를 멈추게 하는 약이 있습니다. 이 약은 초창기 TV 광고로 유명합니다. 화면에 용각산을 세 번 흔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중 처음 두 번은 ‘사각사각’ 소리가 납니다. 그때 “이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라는 멘트가, 마지막 세번째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으면서,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라는 멘트가 흘러나옵니다. 진짜 용각산은 워낙 입자가 고와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점을 어필하는 광고였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세 가지 테스트가 나옵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진짜 용각산처럼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로, 바리새인이 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였습니다. 그 자리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 사람의 본래 직업이 석공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한쪽 손이 마비되어 더 이상 석공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2)

그러나 이 불쌍한 한 손 마른 사람의 치유와 회복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그를 이용할 궁리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6절에 볼 때 그들은 바로 앞선 네 번의 예수님과 대결에서 판판히 깨지기만 했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독이 잔뜩 오른 그들은 만약 예수님이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기만 하면 곧바로 안식일에 치료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고발할 심산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증거를 채집하려고 계속 스마트폰 카메라 앱을 켜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분위기 살벌하니 오늘은 조용히 있어야겠다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3,4)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정면승부를 선택하셨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을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도록 회당 한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질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 즉 생명을 죽이는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께서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는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유구무언, 입이 있어도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5)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보시고 깊은 한숨을 쉬시며 분노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라고 주신 안식일 법으로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예수님이 어떻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 손 마른 사람에게 예수님은 안식을 주시기 위해 “네 손을 내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순종하여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이 곧바로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뉘우칠 법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6)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당시 헤롯당은 친(親)로마 세력이었던 반면, 바리새인들은 뼈 속까지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이 둘은 평소 앙숙 중의 앙숙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의기투합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얼마나 미웠으면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우리가 이런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면 머리에 뿔 달린 괴물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 당시 바리새인의 모습은 그런 이미지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스튜어트 블랜치’라는 영국의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바리새인이라고 말할 때 내포되는 경멸적인 의미로서의 바리새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백성들의 영적 갱신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경건한 생활과 고결한 행동으로 대단한 평판을 누리고 있던,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보기에 선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점잖고 진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비판적 시각으로 차분하게 고찰하려 하는 지성인들이었습니다. 이런 태도가 나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변화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기만, 한 번 변화되면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신실하고 충성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자기들만 옳고 선한 것을 독점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의도는 선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하게 형성하고, 그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명분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자신들이 세운 원칙들에 과도하게 집착한 것입니다. 이 원칙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유익을 주고 있는지, 전혀 성찰과 검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원칙을 끝까지 고수해야만 자신들의 권위와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한 명분 뒤에는 자신의 영향력을 지키고 싶은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자신들을 무너뜨리려 하는 위협적인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바리새인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이 그들처럼 선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사람, 해 놓은 일이 많은 사람일수록 바리새인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사실입니다. 선한 사람이 내가 선한 것을 독점하고 있다고 믿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자칫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을 따르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이념으로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념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원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바리새인의 함정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무리가 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7,8)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로 몸을 피하셨습니다. 그런데 남쪽 유대와 이두매 지역으로부터, 동쪽 요단 강 건너편으로부터, 북쪽 두로와 시돈 근처로부터 많은 무리가 그곳에 몰려왔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인기는 오늘날 아이돌 이상이었습니다. 여차하면 군중에게 밀려 바다에 빠질 지경이 되자, 예수님은 작은 배로 옮겨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 것입니까? 이는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만 예수님께 몰려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11,12)

더러운 귀신들이, 정확하게는 귀신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들도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들을 꾸짖어 이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맞는 말인데 왜 못하게 하셨을까요? 안 그래도 열광하고 있는 무리들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고백이 담고 있는 의미는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예수님을 마치 엄청 난 신통력이 가진 무당처럼 떠받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태를 전혀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귀신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무리들은 앞에 나온 바리새인들과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가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회의 지성인들이고 엘리트이지만, 무리들은 소박하고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들을 의심하고 따지지만, 무리들은 무조건 영접하고 환영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인기가 없지만 무리들에게는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는 ‘바리새인보다는 무리들이 훨씬 더 낫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들이 십자가 현장에서 총독 빌라도를 향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소리쳤던 그 무리들이라는 점입니다. 서로 사뭇 달라 보이던 바리새인들과 무리들이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는 한통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때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던 무리들이 왜 이렇게 변하고 말았을까요? 이는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함 받고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만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는 무리들은 열광합니다. 뜨거운 지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고 여길 때는 돌변합니다. 미련없이 자신을 만족시켜 줄 다른 대상을 찾아 떠납니다. 그냥 떠나지 않고, 공격해서 깊은 상처를 남기고 떠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지나치게 인기와 주목을 받는 것을 피하고자 하셨습니다. 병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나가서 알리지 말도록 당부하시거나, 귀신 들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엄청난 고백을 가로 막으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밀물처럼 몰려온 무리들이 언제든지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을 아셨습니다. 무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지만, 무리를 의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려되는 점은 오늘날 기독교에는 예수님이 가신 길과 역행하는 큰 흐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몇몇 인기 있는 목회자나 교회가 있고 그런 곳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연예계의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처럼 교계에도 아주 유명한 셀럽(Celeb)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광범위한 팬덤(Fandom)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셀럽들에게 열광합니다. 그들의 설교나 사역으로부터 자신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기는 오래 동안 지속되지 어렵습니다.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 같은 교회를 찾던 사람들은 어느새 싫증을 내고 다른 셀럽을 찾아 떠나갑니다.

이런 셀럽과 팬덤 중심의 신앙 생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얇아도 너무 얄팍한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필요하고 절박할 때 잠시 부르는 대상일 뿐입니다. 삶의 변화와 인격과 성품의 변화를 전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만 바라보고 기적만 찾는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열렬한 팬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셋째로, 제자가 되십시오.

누가복음에 보면 이때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밤새 기도하신 예수님은 어떤 방향을 잡으셨습니까?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13)

바리새인에게 분노하시고 무리들에게 소망을 두실 수 없었던 예수님이 선택하신 길은 바로 제자 양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단 무리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 되고 싶은 손 들어 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이에 택함을 받은 자들이 응답하여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임무가 세 가지 있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14,15)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십니다. 제자는 예수님과 늘 함께 하면서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 점이 제자가 바리새인들이나 무리들과 다른 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지적질만 했지 배우고자 하는 마음, 열린 마음이 없었습니다. 무리들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순간 잠깐 함께 했을 뿐 그 외 시간에는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진지하고 일관되게 예수님을 알고자 하고 그 예수님을 닮아 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잠깐 동안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하기, 소감 쓰기, 일용할 양식 먹기, 개인 기도하기,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기 등등을 왜 합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수단을 통해서 제자로 부르심 받은 우리는 매일 예수님과 깊은 사귐을 갖고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배우고 그분을 닮아가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 보내어 전도를 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키우려 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신 후 그들을 거친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십니다. 전도는 어렵습니다. 숱하게 거절당하는 일을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에게 전도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어려워도 해야 하는 필수 과목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전도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전도하면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전도하면서 한 영혼을 구원하는 큰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매주 화요일, 수요일 오후 1시에 주중 전도 모임을, 매주 토요일 11시에 주말 전도 모임을 이루고 있습니다. 서울 교대에서도 꾸준히 전도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당장 눈에 확 띄는 열매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전도 모임을 계속하는 것일까요? ‘교인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어 전도를 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도가 우리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에 상관없이 미련할 정도로 우직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이 주신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해야 할 일은 전도만이 아닙니다. 귀신을 내쫓는 것 곧 사탄의 지배 아래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 곳곳에 만연해 있는 부정 부패와 부당한 차별, 음란함과 폭력, 인간성을 파괴하는 각종 중독 현상의 배후에는 사탄의 세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 모든 악의 축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 일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부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입을 때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우리나라에 온라인 도박에 빠진 청소년이 3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돈을 잃으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절도와 폭력과 같은 2차 범죄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단순히 사회 현상만으로 치부할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존재인 사탄과 그의 부하들이 우리가 다니고 있는 학교 안에서, 우리가 매일 출근하고 있는 직장에서,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파멸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들을 건져내는 일에 부르고 계십니다. 자기 한 몸 감당하기 버거운 우리지만 기도하며 성령의 능력을 구할 때 주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기독교는 바리새인의 종교도 아니고 많은 무리들의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제자도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제자가 있고 제자가 아닌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제자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바리새인입니까? 무리입니까? 제자입니까?”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겠습니까? 혹시 예전에는 제자였는데 어느새 지금은 바리새인인 된 것은 아닐까요? 혹시 제자 되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냥 무리로 남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주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실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처음 부르신 열 두 명의 제자 모두 다 연약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대한 사도로 빚으셨습니다. 나 역시 연약하지만 나를 부르신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고 오직 감사와 순종으로 주님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완전한 길로 이끄실 주님의 계획을 믿으며 끝까지 제가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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