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창무 2024. 3. 2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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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4강 / 이창무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마가복음 2:1-17
요절/ 마가복음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긍정의 힘”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조엘 오스틴 목사가 있습니다. 이분이 한 방송국과 인터뷰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앵커가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대형 교회를 이룬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스틴 목사가 답합니다. “그것은 제가 죄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교에서 죄를 말하는 것은 교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고 봐요.”

그러나 우리는 죄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대형 교회가 될 수 없을지라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줄곧 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길지 않은 오늘 본문 말씀 안에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를 다루십니다. 죄 문제와 그 해결에 대해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알기를 원하셨을까요?

첫째로, 우리들의 가장 절실한 필요는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발 디딜 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그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를 깨는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중풍병자를 둔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자 지붕을 뜯은 것입니다. 그들은 남의 집 지붕에 구멍을 내고 그 사이로 중풍병자를 침상 채 달아 내렸습니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의 머리 위로 갑자기 밝은 빛이 쏟아지더니 그 사이로 침대 하나가 서서히 내려왔습니다. 한 동안 적막이 흐르다 여기저기 웅성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머! 선! 일이고!” “이거 새치기인데. 아! 킹 받네!” 무리들의 눈에 그들의 행동은 너무 무례하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보셨을까요?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5)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얼마든지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는 믿음, 예수님이 결코 중풍병자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으로 나아온 중풍병자를 향해 ‘작은 자야!” 이렇게 불러 주셨습니다. “작은 자”를 영어 성경에서 보면 “Son” “아들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호칭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일차적으로는 이 중풍병자가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젊은 나이에 전신마비가 되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더 나아가 이 호칭은 예수님께서 그를 기쁘게 영접해 주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를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만 주는 사람”으로 여기고 외면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만큼 “내 아들아” 하시며 친자식처럼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결국 이 말씀은 하기는 하시지만 그 전에 먼저 이 말씀부터 하십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참 생뚱맞다는 느낌이 듭니다. 혹시 이 말씀이 지붕 뜯은 것을 용서해 주겠다는 말씀일까요? 그러나 뒤에서 서기관들이 이 말을 신성 모독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가 이제까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들을 용서해 주겠다 하신 말씀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왜 중풍병자에게 그가 전혀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던 죄사함을 선포하셨을까요? 이는 중풍병자에게 당장 치유보다 죄 사함이 더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도소에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한 죄수가 중풍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대통령 비서실장이 찾아와서 이런 제안을 합니다. “중풍병을 고칠 수 있는 치료약과 당장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특별 사면, 당신에게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습니다.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해서 뭐가 뭔 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또 당장 눈 앞의 이익만 생각하면 치료약을 택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석방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석방되면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고 좋은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유의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본문에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직 젊은 나이에 전신 마비가 된 것은 이 중풍병자의 실수나 잘못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술독에 빠져 살다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지 모릅니다. 아니면 젊은 날의 객기를 부리다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직접적인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 하더라도 중풍병자는 내가 지은 죄가 많아 이 병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워서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을까요? 죄의식에 짓눌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이런 그가 단지 중풍병이 낫는 것만으로 온전히 치유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그의 영혼은 여전히 죄의 감옥에 꽁꽁 묶여 옴짝달싹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그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물로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죄의 무거운 짐을 벗고 청년 답게 나비처럼 훨훨 날 수 있게 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질병이 큰 문제지만 죄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멀리 도망친 사람에게도 근원적인 죄의식이 있습니다. 아무리 책임을 전가하고 죄를 덮어버리거나 합리화하려고 해도 죄의 흔적과 상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죄짐으로 인한 영혼의 눌림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는 사함을 받아야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선포하십니다. “내 아들아! 내 딸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죄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눈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이 교회로 와서 이 죄사함의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는 오직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죄 사함의 음성을 듣고 깜짝 놀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6,7)

그들은 바로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신성 모독하는 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 외에 죄를 사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신성 모독을 했다는 주장은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의 근본 문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과 생각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인지 나타내 보이고자 하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9)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말만 하면 되니까 쉬울 것 같지만 감히 할 엄두를 낼 수 없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은 할 수는 있지만 증거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결국 정답은 ‘둘 다 어렵다’입니다. 둘 다 사람이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10a)

만약 둘 중 어느 하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나머지 하나도 할 자격이 된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사죄의 권세자이신 것을 입증하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중풍병자가 즉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보란듯이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들고 나갔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고 소감 발표를 했습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간 것만이 새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이 진짜 새 일입니다.

구약 시대 죄인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세 가지가 반드시 있어야 했습니다. 첫째로 죄를 짊어질 희생제물이 있어야 했고, 둘째로 화해를 중재할 제사장이 있어야 했고, 셋째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양이나 염소 같은 희생 제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제사장은 고사하고 레위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그러니 죄 사함이 어떻게 선포될 수 있느냐고 그들이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제물과 제사장과 성전이 정말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희생 제물이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제사장도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2장 21절에 보면 ‘예수님이 곧 성전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도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필수적인 모든 것이 다 예수님 안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만약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지금 우리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서 이스라엘 행 비행기 티켓부터 끊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시세로 왕복 최소한 154만원 이상이 들고, 직항이 없어서 반드시 한 곳 이상을 경유해야 합니다. 도착한 뒤에는 소나 양을 사야 하고 도축은 반드시 자기 손으로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어렵게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성전이 2천년 전에 무너져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와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죄를 범하고 허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그렇습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죄가 쌓여만 가고 있습니다. 그 무게가 서서히 어깨를 짓누르고 목을 조여오게 됩니다. 죄 사함을 받을 길이 막혀 있다면 우리 영혼은 점점 시들고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새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너무 많이 들어 본 말이라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으로 단 번에 완전한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기에 가능하게 된 일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매일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 죄 사함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우리들의 죄로 병든 내면을 치유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14)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상종해서는 안 될 사람, 공공의 적, 인간 말종, 사회의 암적 존재였습니다. 과거 어부 시절 레위에게 숱하게 삥 뜯겼던 제자들은 혐오와 멸시가 가득한 눈으로 그를 째려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길은 그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레위를 동정심 어린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셨습니다.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 숨겨진 죄로 깊이 병든 그 내면의 아픔과 고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앞서 첫번째 제자들을 부르실 때와 같은 명령이지만 의미는 좀 다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싸울 군사를 부르시는 소집 명령이었다면 이번에는 병든 레위 곁에 24시간 함께 하시며 그를 치유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입원 명령이었습니다.

이에 레위는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두말없이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레위는 이 부르심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았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영접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다른 세리와 죄인들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도 따뜻하게 영접하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러나 이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남들과 비교해 자신들은 어느 정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과 제자들이 더러운 죄인들과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따져 묻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저들의 죄에 너희도 물들고 싶은 것이냐? 아니면 저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냐?” 제자들을 대신해 예수님께서 답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7)

예수님은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셨습니다. 의사가 빛을 발할 때가 언제입니까? 병든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의사는 병든 사람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든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 의로운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세리 레위와 같이 죄로 인해 깊이 병든 사람을 부르기 위해 오셨습니다.

서기관들은 검사의 눈으로 레위를 판단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사의 눈으로 레위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레위가 살아온 과거만을 기억했기에 심판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미래에 소망을 두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결과 세리 레위는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레위의 또 다른 이름이 마태입니다. 신약성경의 첫 머리에는 그가 쓴 마태복음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전혀 언급이 없으나 마태복음에만 언급된 이사야서 말씀이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12:20)

세리 레위 자신이 바로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심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랜 세월 동안 그를 참고 감당해 주셨습니다. 과거 세리로서 저지른 모든 악행과 죄악을 용서의 지우개로 다 지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예수님 자신의 아름답고 거룩한 형상과 성품을 새겨 넣으셨습니다. 그 결과 어느새 그는 성 마태가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죄인들의 죄 없으신 친구이십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도록 찾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죄로 깊이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위대한 영적 의사이십니다.

레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은 친구요 목자요 의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우리가 바리새인의 서기관처럼 죄인이 아닌 척, 의로운 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병들었는지 잘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인인지 다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무너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인지 잘 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고치시려고, 죄로 더러워진 우리를 자신의 피로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한 사람으로 빚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방이 막힌 좁은 세관처럼 자기만의 이기적인 세계 속에 갇혀 있는 우리들의 삶 한 가운데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 와서 나와 함께 하자고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만드신 사랑의 공동체 안에 입원시키셔서 우리의 죄로 병든 내면을 치유하고 계십니다.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다만 은혜로 부르시고 고치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존 브로크만이 쓴 ‘지난 2000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쇄술, 전기, 비행기, 컴퓨터, 인터넷 등 인류가 발명한 121가지의 위대한 발명품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발명품 중에는 지우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깟 지우개가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우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과 같은 위대한 음악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 번 실수를 해도 지우개로 지울 수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얼마나 많은 잘못과 실수와 허물이 있습니까? 그런데 만약 한번 죄를 범하면 다시는 지울 길이 없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죄로 얼룩진 우리 인생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하시는 음성으로 병들어 못 쓰게 된 우리 인생을 치유하십니다. 믿음으로, 순종으로, 우리 삶을 주님께 맡길 때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최고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죄사함의 권세자이시며 영혼의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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