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병든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이창무 2024. 3. 2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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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3강 / 이창무

병든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말씀/ 마가복음 1:29-45
요절/ 마가복음 1: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생물학에서 인류를 가리키는 종명이 있습니다. 바로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이것은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인간성의 본질이라는 사상을 깔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도 있고 ‘호모 파베르’(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도 있습니다. 이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기독교 세계관 쪽에는 많이 언급하는 ‘호모 레스폰덴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응답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맺는 모든 관계성은 응답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한 인물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면 어떤 것에 응답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려면 예수님이 무엇에 응답하시는 지를 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 답이 오늘 말씀 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인생들의 절박한 필요에 응답해 주시는 분입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29,30)

안식일 예배가 끝난 후 예수님께서 회당을 떠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가버나움에서 최고로 요리를 잘 하는 사람들 중 하나로 꼽히는 시몬의 장모가 손수 점심 식사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날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코로나에 걸린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독감이었을까요? 구체적인 병명은 알 수 없으나 상태가 심각했습니다.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긴급히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31)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나아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그 즉시 열병이 떠났습니다. 장모는 마치 별 일도 없었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보글보글 끊인 된장찌개와 노릇노릇 구운 생선을 손수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치유 사건에는 놀라운 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너무나 쉽게,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것만으로 고치셨다는 점입니다. 중학생 3학년 딸 아이를 깨우기보다 훨씬 더 쉬워 보입니다. 다음으로 고침 받은 여인이 곧바로 수종을 들었다는 점입니다. 통상 며칠이 걸리는 회복 기간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물론이고 의학이 많이 발달한 지금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소식은 삽시간에 퍼지기 마련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32,33)

해가 저물어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온 동네 사람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부리나케 예수님 앞으로 데려왔습니다. 그야말로 가버나움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말해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아왔던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는 것입니다.

병이 들면 일단 아픕니다. 저는 담낭 결석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통증이 오면 너무 아파 잠을 잘 수 없어 뜬 눈으로 꼬박 밤을 샐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술해서 꺼낸 돌을 항상 제 책상에 두고 보면서 ‘다시 아프지 말자’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또한 병이 오래 가면 일생 생활이 무너집니다. 자꾸만 슬픈 생각이 들고,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몰려 듭니다. 결국에는 자의이든 타의이든 사람들 사이에 고립되고 소외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아픈 사람에게 치유와 회복보다 더 절실한 것이 또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대거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지금은 저녁 때라 쉬어야 하니까 다음에 보자고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34)

예수님은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아마도 시몬의 장로에게 하셨던 것처럼 병든 사람들을 만나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의 손을 잡아 주시며 치유해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전공 분야가 따로 없었습니다.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정형외과, 정신과, 신경과, 피부과 가리지 않고 모든 병자들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종합 병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와 같이 광범위한 치유 사역을 행하셨을까요? 치료비를 받지 않으신 것을 보니 돈을 벌기 위함도 아니었고, 귀신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것을 보니 인기와 주목을 끌고 싶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분의 나라에 마음을 활짝 열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치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움직이고 역사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사람들의 병이 낫고 건강을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의 가장 절박한 필요에 응답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얼마나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신 지를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주만 바라볼찌라’라는 찬양의 후렴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어두운 인생에 빛을 비추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귀 기울이시며 우리의 작고 희미한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 사실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도록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아픈 사람, 해결되지 않는 내면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 인생의 중요한 고비를 힘겹게 통과하고 있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모든 사람은 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그분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날이 바뀌었습니다. 전날 밤 몰려든 수많은 무리들 때문에 예수님은 늦은 시각까지 병자들을 치료하셔야 했습니다. 얼마나 피곤하셨겠습니까? 다음날 예수님은 늦잠을 푹 주시고 브런치를 드시지 않았을까요?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35)

예상과는 정반대로 예수님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거기서 기도하셨습니다. 왜 기도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를 통해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더 많은 사람이 병 고침을 받으러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계속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이 하나님이 지금 저에게 가장 원하시는 일인가요?”

예수님께서 기도 끝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을 무렵,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얼굴 표정이 무척이나 상기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다음과 같이 소리쳤습니다. “아이참! 예수님! 아침부터 혼자 뭐하시는 겁니까? 지금 이러고 있으실 때가 아닙니다. 이 이른 시간에 사람들이 벌떼 같이 몰려와 있습니다. 다들 예수님을 찾고 난리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을까요? “아이고! 미안하다. 그런 줄 몰랐네. 어서 가자!”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38,39)

예수님은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의 열망을 뿌리치고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이 말씀이 치유하시고 회복시키는 사역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후에도 예수님은 계속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수단일 뿐이다. 전도가 목적이다. 말씀을 영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므로 자기 문제 해결에만 급급한 사람들의 요구에 끌려 다닐 수는 없다.”

우리들도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고 집중해야 하는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사를 보면 이것을 놓치고 본말이 전도되어 버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사례들을 종종 봅니다. 19세기 말부터 선교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학생자원운동(SVM)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려 2만 명이 넘는 선교사를 전 세계에 파송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왜 이 운동이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지나치게 사회 정의 실현이나 봉사 활동에 집착하다가 ‘우리 시대에 세계 복음화’라는 비전을 잃어버리고, 말씀과 기도와 전도의 열정이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병을 고치는 치유 사역, 귀신을 내어쫓는 축사 사역에 올인했던 많은 교회들이 결국 번영 복음이나 신비주의 등에 빠져 이상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회 정의이든 봉사이든 교회가 사람들의 필요에 반응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도 이 시대 청년 대학생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야 하고 또 그 문제를 실제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복음 전파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항상 우리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다수가 요구하고 시대의 요청이 있다 하더라도 말씀 외에 다른 것을 더 우위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요구에 끌려들어간 반면 예수님은 말씀 전파로 방향 전환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으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작은 신음 소리에도 귀 기울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에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향 설정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혹시 주위 사람들의 열망과 기대, 그들의 요구에 따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러다가 중심을 잃어버리고 이리저리 갈 짓자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않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의 요구만 따르는 사람을 가리켜 인본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인본주의자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응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설령 그 뜻이 사람의 기대와 반하여 실망을 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뜻을 최우선적으로 받드는 신본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많다 하더라도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나아가 그분의 뜻을 묻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자신 안에서 샘솟는 긍휼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40)

한 나병환자가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나병이란 진물이 계속 나고 딱지가 앉을 정도로 심한 피부병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이런 피부병에 걸리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는 너무 가려워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또한 기괴하게 보이는 겉모습 때문에 그의 자존감은 늘 바닥이었습니다. 게다가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나병환자는 마을 밖에 격리된 상태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사람과 접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에게 외로움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겠습니까? 그만큼 고통이 크다 보니 당시 사람들은 나병을 하늘이 내린 저주 받은 형벌로 간주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이 혹독한 운명의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끓어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이것은 자칫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목숨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나병환자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라면 나의 이 지독한 병을 고쳐 주시고 운명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 믿음으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간구합니다. 여기서 ‘원하시면’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병자들은 아무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나병환자가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 너무 송구하고 죄송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나병의 문제를 안고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께 엄청난 부담을 지우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수많은 거절과 외면을 받아온 그이기에 예수님이 원치 않는다 해도 괜찮다는 뜻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치셨을까요?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41,42)

먼저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꼭 이렇게 하셔야만 나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사건을 보면 예수님은 아무런 접촉 없이 오직 말씀만으로 얼마든지 나병환자를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굳이 그에게 손을 대셨을까요? 나병환자의 육체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치유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손길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손이 닿자 그 동안 겹겹이 쌓인 수많은 상처들로 인해 딱딱하게 변했던 그의 마음이 봄눈 녹듯이 녹아 내렸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라는 말은 우리식으로 말하면 “물론”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당연히!” 영어로는 “absolutely”, “surely”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이 병에서 놓여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못박으셨습니다. “네가 깨끗하게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 지 잘 안다. 그리고 너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에 이 사람의 나병이 즉시 치유되었습니다. 흉측했던 피부가 아기 피부처럼 보송보송해졌습니다. 마음에 모든 응어리졌던 것들도 다 풀렸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제사장으로부터 병이 다 나았다는 인증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더 이상 그는 저주 받은 인생이 아닙니다. 이제 당당히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병환자를 고쳐 주셨기 때문에 두 가지 위험을 떠 안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셨다는 사실! 그래서 율법에서 명백히 금지하고 있는 것을 깨뜨렸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는 점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사역에 방해를 받게 된다는 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을 기적에서 말씀으로 돌리려고 무진 애를 쓰고 계십니다. 그런데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나면 이 모든 노력이 다 소용없게 될 지도 모릅니다. 또 실제로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고침 받은 나병환자에게 이 사실에 대해 함구할 것을 엄히 명령하셨지만 다 부질없었습니다. 예수님도 결국 이렇게 될 줄 다 아셨을 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위험에도 불구하고 왜 나병환자를 고쳐 주셨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을 이렇게 하지 않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을까요? 마가복음은 그 이유를 짤막하게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속에 있던 긍휼의 심지에 불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대뜸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셨던 것입니다. 비난을 받든 방해를 받든 개의치 않고 그를 고쳐주지 않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 안에 솟구쳐 오르는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삽니다. 더 큰 성공, 더 큰 인기, 더 큰 소유를 향해 가라는 내면의 목소리에 응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런 목소리에는 꿈쩍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딱 한 가지! 긍휼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십니다. 긍휼이 이끄는 길로 가는 것에 주저함이 없으십니다. 어떤 위험과 손해가 예상된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 가셨겠습니까? 왜 그 험한 길을 십자가의 길을 가셨겠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샘솟는 긍휼의 마음이 그 길로 예수님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사랑의 외치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거기에 목숨을 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의 긍휼 덕분에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치유함을 받고 회복 중에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웃의 절실한 필요에, 하나님의 뜻에, 긍휼의 마음에 응답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죄로 병든 인생들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예수! 그분의 이름은 능력의 이름, 구원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에 합당한 반응은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을 믿고 그 이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 예수의 이름 앞에 나오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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