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제2강 / 이창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말씀/ 마가복음 1:14-28
요절/ 마가복음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못 들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하나님 나라의 개념만큼 신자들 가운데 오해를 받고 있는 것도 드문 것 같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하면 죽으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냥 죽어서는 안 되고 죽기 전에 믿음이 있어야 하고, 선행을 많이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세상 나라 속에서 살아야 하고 하나님 나라는 현재 나의 삶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저 죽은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소원할 뿐입니다.
과연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얼마든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엄격하는 분리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깨뜨린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 일을 이루셨는지 세계 제2차 대전을 예시로 들어보겠습니다. 1944년 6월 6일(D-day) 전쟁이 한창일 때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이 작전의 성공을 기점으로 독일군은 점점 더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945년 5월 7일(V-day)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하고 전 유럽은 히틀러의 손아귀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상륙 작전이 성공해 이 세상 나라 속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침투해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을 계승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구석구석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죄와 죽음의 지배가 끝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사탄은 완전히 세력을 잃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사이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 삶에서 의와 생명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가 이곳에 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세 가지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내 안에 현재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의 은혜의 다스림을 경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누군가 한 나라의 통치자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합니까? 현재 우리 나라는 먼저 정당으로부터 공천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유권자의 다수표를 획득해야 합니다. 그후에 정권을 위임 받고 나라를 통치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시작하셨을까요?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14)
예수님은 투표나 선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동의나 협조가 필요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선포된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영접한 사람에게 임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징기스칸이 이끄는 기마부대가 몽골의 대제국을 만들었습니다. 달러의 힘이 미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을 천조국이라고 부릅니다. 일년의 국방비만 천조 원이 넘는다고 해서 이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군대의 힘으로, 돈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로지 복음의 말씀으로 만들어지는 나라입니다. 세상에 이런 나라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전파하신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15)
예수님은 짧은 한 문장 안에 복음을 세 가지로 함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는 때가 찼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 목자님이 “때가 찼으니 목욕탕에 갑시다.”라고 농담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 말이 단지 농담만이 아니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목욕탕에 아무 때나 가지 않습니다. 기다렸다가 때가 차야 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어떤 때입니까? 사람들의 죄 문제가 곪을 대로 곪아 터진 것이 드러났을 때입니다. 사람이 더 이상 손쓸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완전히 힘이 빠졌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때를 기다리신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천 년의 방황과 타락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을 그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두번째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은 후에나 아니면 아주 먼 미래에나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먼저 우리 곁을 찾아왔습니다.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바로 곁에서 대기 중이라니! 우리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입니까?
세번째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저절로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반응을 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합당한 반응이 바로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는 지금까지 가던 길이 잘못된 길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즉시 유턴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왜 잘못된 길이었냐 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던 내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과 습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떠나 하나님께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복음의 말씀을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앞에서 하나님 나라는 복음으로 만들어지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영접하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만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찬송가 438장 1절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복음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이 가사가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공통적으로 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합니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곳인 줄 몰랐어요. 모든 만물이 다 노래하고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 노래의 가사에 심한 과장이 섞여 있는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슬픔 많은 이 세상이 천국으로 변할 수 있어? 그 어디나 하늘 나라라고! 에이, 말도 안 돼.” 이런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보세요. 그러면 지금 당신이 서있는 그 자리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어요.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삼의 그룹이 있습니다. 이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과거에 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하나님 나라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나도 한 때 구원의 감격이 넘치던 때가 있었지. 그때는 여기가 바로 천국인 것 같았지. 그런데 지금은 힘들어! 괴로운 일이 너무 많아!” 저자 마가는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던 그 시점으로 데려가 다음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합니다. “때가 찼습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당신 곁에 와 있습니다. 왜 그 나라를 맛보고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는 당신 자신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처음 그때처럼 다시 회개하고 복음을 새롭게 믿으십시오!”
꽁꽁 얼었던 추운 겨울이 거의 다 지나갔습니다. 지난 주 꽃샘 추위가 몰아쳐서 꽤 추웠지만 결국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겨울처럼 차가워도 봄과 같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 봄 마가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우리의 교회와 가정에, 우리가 서있는 모든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처음처럼 다시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을 통해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신 후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16,17)
예수님은 첫 번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방식이 상당히 특이합니다. 보통은 제자가 먼저 스승을 찾아가 이렇게 청원을 올립니다. “사부님!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스승이 면접을 본 후 오케이 사인이 나면 그때부터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자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먼저 그들을 찾아오셔서 “너! 너! 너! 이제부터 나를 따라오너라” 이렇게 명령하시는 바람에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와 비슷한 장면을 한 영화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였습니다. 주인공 톰 행크스가 장군으로부터 라이언 일병을 구하라는 미션을 부여 받은 뒤 자기 중대로 돌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레이번! 잭슨! 카파조! 자, 나를 따라와.”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무릎을 탁 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예수님은 학생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싸울 군사를 소집하신 것이구나! 죄의 세력 한 가운데 갇혀 있던 우리 인생들을 구하기 위해 특공대원을 모집하신 것이야!”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주신 약속의 말씀이 저의 이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자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물고기 낚는 어부는 물 속에 있던 물고기를 물 밖으로 끄집어 내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죄의 바다, 죽음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끄집어 내어 의의 나라,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로 옮겨 놓는 사람입니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적진 한 가운데 뛰어 들었던 특공대원들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소집 명령이 떨어졌을 때 시몬과 안드레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이걸요? 제가요? 왜요?”라고 반응하지 않았을까요?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18)
놀랍게도 그들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바로 뒤에 부르심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 사람들은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여러 가지 가설을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몬 베드로가 자기 직업에 대해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하자는 예수님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고기 잡던 베드로가 인생의 허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인 것 같아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다.’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이전부터 예수님과 처음 제자들이 자주 만나 서로를 잘 아는 사이였고 그래서 부르심에 응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 사실이고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 마가는 이런 내용을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가는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형편이나 심리 상태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을 주목해 보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는가?”가 아니라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이기에 제자들이 그분을 따를 수밖에 없었는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총사령관이십니다. 죄와 죽음의 세력과의 전쟁, 사탄과의 전쟁을 수행 중이십니다. 우리 나라에서 만약 전쟁이 나면 국가가 개인의 SUV 차량을 언제든지 징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법률에 명확하게 못을 박아 놓고 있습니다. ‘이거 내가 써야 하는데요.’라고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소집 명령이 내려졌는데 그 누가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의 시작부터 바로 이와 같은 군인 정신(soldier spirit)이 함께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주님의 소집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로, 인도네시아로, 독일로, 미국으로, 중남미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곳에 있는 수많은 라이언 일병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모님은 복음 역사를 풀타임으로 섬기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사직하셨었습니다. 이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온갖 험한 소리를 다 들으셨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버티셨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진을 위한 전투는 계속 진행 중이고, 하나님 나라의 총사령관이신 예수님께서 여기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우리의 삶을 드릴 때 세상은 우리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길 주님의 군사가 되고 이 세상을 섬길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세워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의 능력으로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립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과 함께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21,22)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회당에 들어가셔서 예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왜 놀랐습니까? 평소 회당 설교를 도맡아 하던 서기관들과 달리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알 수 없는 권위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차렸 자세로 경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서기관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없었고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을까요? 서기관들은 자기 말을 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말은 귀로 전달되고 나면 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거기에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이 귀로만 들리지 않고 가슴을 파고 들고 영혼을 움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 선포되던 그 자리에 더러운 귀신 들린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회당 예배에 처음 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매주 왔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이 사람 속의 귀신은 서기관이 전하는 말씀을 들으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네” 하면서 조롱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날은 전혀 달랐습니다. 귀신은 거룩하신 예수님의 영적 파워에 견디지 못하고 ‘커밍아웃’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면서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습니다. 이 모습은 귀신이 어떻게 하든 안 나가려고 끝까지 발악을 해보았지만 어쩔 수 없이 쫓겨나게 된 상황을 암시해 줍니다. 서기관들의 말에는 꿈쩍 안 하던 귀신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질질 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27)
이미 놀란 가슴이 한 번 더 놀랐습니다. 이로써 그냥 말로 끝나지 않고 말씀이 사건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가 드러났습니다. 알다시피 귀신은 마귀의 부하입니다. 귀신이 쫓겨나갔다는 것은 사탄의 세력이 무너지고 있다는 가시적인 증거입니다. 사탄의 세력은 강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성령의 능력이 임할 때 마귀는 그 앞에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님이 쓴 ‘존 스토트의 설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나는 설교를 믿습니다”입니다.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는 오늘날 설교를 믿지 않는 성도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목회자들마저도 설교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스토트는 예배 중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의 능력과 역할을 확신했습니다. 물론 사람이 다른 것으로 감동 받고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거듭남과 회심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면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게 됩니다. 저도 설교를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군사로 소집된 우리 손에 들려 있는 무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의 능력을 믿읍시다. 어둠의 세력이 훼방하고 저항하고 발악할 것이지만 우리가 말씀을 붙드는 이상 결국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맡기신 이 복음의 말씀으로 영혼들을 살리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먼저 임하고 또한 우리를 통하여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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