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창무 2019. 6. 29.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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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학생 캠프 주제강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 / 마가복음 5:21-43
요절 / 마가복음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임재범이 부른 ‘비상’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순간이 있지 / 그렇지만 나는 제자리로 오지 못했어. 되돌아 나오는 길을 모르니 /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걱정에 온통 내 자신을 가둬두었지. / 이젠 이런 내 모습 나조차 불안해보여. 어디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줘야 해. /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 날고 싶어” 이 노래는 직장인들이 노래방에 가서 지겹도록 부르는 애창곡으로 유명합니다. 비록 현실은 자기 세계 속에 움츠려 있더라도 세상을 향해 당당히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고 싶은 꿈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자기만의 세계에서 되돌아 나올 수 있는 길을 알려줍니다. 어떻게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를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 수 있을지 알려줍니다. 그 길은 바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 속에 있습니다.

I. 그의 옷에 손을 대니(21-29)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거라사 지역을 떠나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이미 선착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내릴 때 가장 먼저 앞으로 나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였습니다(22). 회당장은 회당을 관리하고 예배를 주관하는 지도자로서 지역 사회에서 존경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회당의 분위기는 예수님께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지위로 보나 회당의 분위기를 보나 회당장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올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야이로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절히 구했습니다(22).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23)” 야이로에겐 열두 살 된 외동딸이 있었습니다(42, 눅8:42). 이 딸은 지난 12년 동안 아빠에게 큰 위로와 많은 기쁨을 주었습니다. 야이로가 회당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아빠’하고 달려 나가 그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런데 삶의 의미요 희망이었던 야이로의 어린 딸이 중병에 걸렸습니다. 열이 펄펄 끓고 자리에 쓰려져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식은땀을 흘리고 헛소리를 했습니다. 용하다는 의사들도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이대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이때 야이로는 예수님께 나가고자 결심했습니다. 잠시 스치듯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동료들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러면 내 체면은 어떻게 되는 건가?’ 등등의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 따위 체면이나 평판 따위는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딸에게 손을 얹어 주시기만 하면 죽어가는 딸이 구원을 받아 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야이로의 이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절한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와 함께 딸을 도우려 가셨습니다. 이때 큰 무리가 따라가며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고 만지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에 방탄소년단 같은 스타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몰래 나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않아온 여자였습니다(25). 혈루증은 부정기적으로 피를 흘리는 부인과 질환입니다. 26절에 보면 이 여인은 지금까지 많은 의사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진 재산도 모두 다 탕진했습니다. 하지만 병이 낫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피를 많이 흘려서 만성 빈혈에 시달렸습니다. 요즘 같이 좋은 빈혈약이나 철분제가 있었겠습니까? 이 여인의 건강 상태는 처참했습니다. 몸에서는 늘 비릿한 피 냄새가 났습니다. 이런 상태로 12년을 보냈으니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고통은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 여인의 병은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라 하더라도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안아줄 수도 없었습니다. 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나는 더러운 여자야.’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며 철저히 고독한 삶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이 여인은 얼마든지 절망 속에서 자포자기하여 집에 누워 죽음만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중풍병자가 일어났다는 소식,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 대시자 깨끗하게 되었다는 소문, 한 손 마른 사람의 손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소문만 듣고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이불을 박차고 밖으로 나와 예수님이 계신 곳을 향해 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녀 앞에서는 큰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부정한 여인이라 야이로처럼 공개적으로 예수님 앞에서 나가 간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야이로의 경우는 그의 높은 사회적 지위가 걸림돌이 되었다면 이 여인의 경우는 그의 낮은 사회적 지위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 믿음은 결국 장애물을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여인은 앞으로 갈 수 없으니 대신 뒤로 갔습니다. 손을 만지면 들킬 테니 느끼지 못하게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구원 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28).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믿어도 되는 것인가요? 이게 무슨 아무 믿음 대잔치입니까? 그런데 이 믿음이 역사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 몸에 깨달으니라” Just one touch! 단 한 번의 접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12년 동안 흐르던 혈루 근원이 곧 말랐습니다. 서서히 말라 죽어가던 여인의 온 몸에 생명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게 했던 그 지긋지긋한 병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한 번 대었을 뿐인데 완전히 다 나았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두 여자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된 딸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않던 여인입니다. 공교롭게도 둘 다 12라는 숫자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12년 동안 건강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무서운 병에 걸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혈루증 않던 여인은 12년 동안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서서히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잊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둘의 모습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들의 양상을 보여줍니다. 어떤 문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야이로의 딸처럼 갑자기 중한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질병이 아니라도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나기도 하고 운동을 하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갑작스러운 사업 실패나 실직 등으로 경제적인 곤궁에 빠지기도 합니다. 반면 어떤 문제는 혈루증처럼 서서히 사람을 말라 죽어가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이 대학원에서 아주 괴팍한 지도 교수를 만나 심신이 점점 피폐해져 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극적인 성격 문제나 내면적인 문제로 오래 동안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몸이 허약하고 저질체력이라 조금만 무리해도 한참을 누워있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 앞에서 나름 해결해 보려고 이리 저리 애를 써봅니다. 이 사람을 찾아가고 저 사람도 찾아가 봅니다. 그러나 별 소용이 없습니다. 영영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감이 찾아옵니다. 차라리 다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지기까지 합니다. 

우리 중에는 지금 이런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별 문제가 없습니까? 그러나 앞으로 얼마든지 이런 문제 상황과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이 각자 다 다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생의 위기를 만났던 두 사람을 보십시오. 인생의 문제가 도리어 예수님을 믿음으로 붙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상황이 힘들고 절박할수록 예수님을 더 꼭 붙들게 합니다. 믿음은 어떤 걸림돌도 뛰어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게 만듭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 건져주세요. 주님! 저 좀 살려주세요.” 그렇게 기도할 때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나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말도 안 되는 기적이 내 삶에 일어나는 생생한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능력, 주님의 자비가 그냥 이론이 아니라 실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꼭 거대한 문제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팀플을 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시험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알바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친구를 위해 중보기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음이 없어도 기도하지 않아도 이런 것들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고 기도했을 때와 그 결과가 결코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전에 비해 요즘 불면증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믿고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잠이 잘 옵니다. 하늘에서 오는 평안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믿고 기도해 보십시오. 쓸데없는 염려로 시간을 허비하던 사람이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나도 모를 용기와 도전 정신이 생기게 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 스토리가 하나씩 하나씩 쌓이게 됩니다. 이 스토리들이 평생토록 잃어버릴 수 없는 자산이 될 것입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진짜 더 심각한 인생의 문제들과 부딪치게 될 때 학창시절 배웠던 믿음과 기도가 나를 지탱해 줄 내적인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를 만났을 때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능력, 기도의 비밀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30-34)

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여인은 아무도 모르게 왔으니 누구도 모르게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사람이 몰래 빼 갈 수 있는 은행 계좌 같은 것일까요? 본문의 표현은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여자의 믿음을 감지하시고 그 믿음에 응답하여 능력을 행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당연히 여자가 누구인지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옷에 손 댄 사람을 찾으실까요? 이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에게 주시려는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면서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면 어떻게 합니까(31)?” 제자들은 많은 사람이 밀고 당기는데 예수님이 왜 손 댄 사람을 찾으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나를 제대로 에스코트 안 해주냐고 제자들을 꾸짖는 줄로 착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손 댄 많은 사람을 찾고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손 댄 한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기대할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찾아보시겠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셨습니다(32). 예수님의 눈과 여자의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여자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말했습니다(33). 부정한 병자가 몰래 들어와 허락도 없이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비난과 정죄를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여자로부터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은 여자를 향해 ‘딸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여자를 이렇게 부르셨을까요? 여자는 조금 전에 야이로가 예수님께 어린 딸을 구원해 달라 간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여자는 이렇게 속으로 말했습니다. “나에게도 저런 아빠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인은 야이로 같은 아빠가 없어서 너무 슬펐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향해 예수님의 입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 나왔습니다. “딸아” 여자가 12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듣게 된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다시는 병들었다고 해서 사이가 멀어지지 않을 아버지, 자비하시고 영원하신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여자의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예수님이 여인을 가게 두지 않으시고 불러내신 것은 창피를 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여인이 그냥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은총을 도둑질했다는 죄의식과 두려움이 남았을 것입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졌을지라도 마음 한 구석에 평생 어두움이 남았을 것입니다. 병이 나은 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여전히 따돌림을 당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 영혼의 어둠까지 다 치유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여자는 오랫동안 병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프고 슬프고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왔을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건강한 새 삶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를 부르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일 시켜 부려 먹으려고 부르실까요? 소감에 자기 이야기를 다 털어놓도록 압박하려고 부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를 온전한 사람, 건강한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전인격적인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영원하신 아버지로 만나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를 문제 해결을 위한 도움을 구하는 것으로만 한정 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 이상입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만남이고 교제입니다. 우리를 아들과 딸로 영접해 주시는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우리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누구나 마음 한 쪽 구석에 어두움이 있습니다. 병든 부분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감추어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기도하러 나가면 있는 모습 다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영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고쳐주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상황을 바꾸기에 앞서 기도하는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5분 이상 기도하기 힘들어합니다. 기도제목만 쭉 나열하면 사실 5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혈루증 않던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사실을 여쭙기 원하십니다. 그렇게 내 속에 모든 것을 꺼내놓는다면 보면 5분이 아니라 1시간이 부족할 때도 생깁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두렵고 불안했는데 이런 기도를 한 후에는 마음에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이런 기도를 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직 경험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이번 캠프가 그런 기도의 세계에 한 발을 들여놓는 캠프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권대장 목자님의 본명은 권OO입니다. 왜 대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대장을 General 또는 Captain이라는 뜻인줄 압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권대장 목자님이 학생회 회장이었을 때였습니다. 양마가 선교사님이 모임 중에 권대장 목자님에게 기도 제목을 물어보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권대장 목자님이 버벅거리며 제대로 대답을 못하셨다고 합니다. 양마가 선교사님은 평소에 기도를 안 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라 하시며 학생회장이 이 정도면 다른 사람은 오죽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에서 대제사장을 줄인 대장이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후로 권대장 목자님은 기도를 배우고자 방향을 잡고 날마다 기도하셨습니다. 그러자 가장 먼저 성적표가 변했습니다. F학점이 즐비하던 성적이 4.4로 바뀌어 전액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졸업 이후 권대장 목자님에게 여러 인생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마음을 들여 준비했던 시험에 낙방했습니다. 자기를 어릴 적부터 키워주셨던 할머니께서 심근경색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져서 이직을 했는데 옮긴 곳도 어려워졌습니다. 일 년도 안 되어 또 이직을 해야 했습니다. 넷째 아이 권영하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상태가 좋지 않다는 진단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만날 때마다 권대장 목자님은 기도하는 대제사장이란 이름에 걸맞게 먼저 무릎 끊고 기도했습니다.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기 너무 벅차서 예수님 한 분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할머니를 포함해서 믿지 않던 가족들이 복음을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회사를 가든 고객들로부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권영하 어린이도 건강한 몸으로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은혜와 자비를 풍성하게 경험한 권대장 목자님은 예수님 이야기만 하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분이 되었습니다. 어디 권대장 목자님만이 그런 체험이 있겠습니까? 믿음과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를 헤쳐나간 목자님들의 사례를 들자면 캠프를 4박 5일 정도 해도 부족합니다. 이제 우리들의 믿음, 우리들의 기도로 이어져 그 다음 스토리를 채워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5-43)

예수님과 여인과 대화가 길어질수록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딸의 생명이 꺼져가는 심지처럼 위태한 순간에 나타난 이 여인이 얄미웠습니다. 그런 여인을 굳이 불러 세우신 예수님도 야속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닥치고 말았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아직 여자와 말씀하실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청청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딸이 살아 있으면 예수님을 빨리 모시고 가사 나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버렸으니 모든 것이 다 끝장입니다. 그들은 야이로에게 예수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말고 보내드리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나를 걱정해 주어서 고맙다고 하셨습니까? 3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님은 소식을 가져온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무시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야이로도 그들의 말을 무시해야 합니다. 대신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야이로는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사랑하는 딸이 죽었습니다. 죽음은 이 땅에서 영원한 이별입니다. 야이로는 딸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 두려웠습니다. 처음에 야이로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딸의 병을 고쳐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딸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는데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믿은 것이 다 헛수고가 된 것 같았습니다. 믿음이 실패로 끝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이 야이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믿다가 상황이 악화된다고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 예수님을 계속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하심으로 휘청거리며 흔들리는 그의 믿음을 붙잡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딸이 죽은 야이로에게 계속 믿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죽음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이시기 때문입니다(요11:25,26). 야이로는 내 현재 믿음보다 더 크신 주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야이로의 집에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떠들고 울며 심히 통곡했습니다(38). 예수님이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말씀하시자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39). 예수님은 불신의 사람들을 다 내보내신 후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셨습니다(40). 차갑게 굳은 아이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습니다(41). “달리다굼.” ‘아이야, 일어나라.’ 아침에 잠자는 아이를 깨우는 말입니다. 소녀가 곧 일어나 걸었습니다. 겨우 호흡이 미세하게 돌아온 정도가 아닙니다. 곧바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살아났습니다(42).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죽은 소녀도 살리실까?”

믿고 기도하면 항상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상 유지도 아닌 상황 악화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 시점이 믿음의 시험, 기도의 위기를 만나는 때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괜히 믿었나 보다 하면서 기도를 접어 버립니다. 믿음을 잃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모든 일에 냉소적인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괜히 옆 사람에게 믿어도 소용없으니 믿지 말라고 하고 기도 못하게 말리는 몹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믿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겪게 될 위기입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의 이 한 마디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이 치열한 경쟁 세상 속에서 낙오될까 두려워합니까? 소중한 인간관계에서 파탄이 일어날까 두렵습니까? 너무 무리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할까 두렵습니까? 믿음이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실패와 상실을 과연 극복할 수 있을지 몰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은 나를 마비시켜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두려워했더니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믿음은 우리를 다시 전진하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 새로운 희망을 낳습니다. 모든 승리 중에 가장 짜릿한 승리인 역전승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학생은 학생만의 특권이 있습니다. 학생은 아직 배우는 사람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다고 사람이 생각해 줍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은 그 자체가 스토리가 됩니다. 발전과 성장이 있는 스토리라고 해서 더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도 이대로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믿음의 대상이 있습니다. 죽음보다 더 크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움 때문에 자꾸 자기 세계 속으로 움츠려 들지 맙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향해 당당히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이후로 우리들 등위에 기도의 날개가 한 쌍씩 펼쳐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현재 나를 힘겹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습니까? 말씀은 나에게 어떤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2. 나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내가 드린 기도에 응답을 받은 체험이 있습니까? 기도를 통해 주님과 교제를 누리고 있습니까?
3. 믿고 기도했는데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이때 주님은 내가 어떻게 반응하길 원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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