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광야에서 시작된 복음

이창무 2024. 3. 5.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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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강 / 이창무

광야에서 시작된 복음

말씀/ 마가복음 1:1-13
요절/ 마가복음 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

1절은 오늘부터 시작하는 마가복음의 표제어입니다. 짧은 한 구절이지만 이 구절 속에 마가복음 전체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저자 마가는 복음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복음이라는 단어를 주로 교회 안에서만 사용합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로마 제국이 이 단어를 종종 사용했습니다. 그때가 언제일까요? 바로 중요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입니다. 한국 축구 대표팀이 승리했다는 소식에 온 국민이 기뻐하듯이 로마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로마 시민들이 기뻐했습니다. 이처럼 마가복음은 우리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승리, 최고의 승리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 누구에 대한 승리일까요? 바로 우리의 원수인 죄와 죽음의 세력, 사탄 마귀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소식입니다.

죄와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주역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인류에게 약속하셨던 바로 그 메시아 구원자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인지 처음부터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앞으로 여러가지 사건들을 통해 또한 다양한 사람들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의 이 두 가지 정체성을 우리에게 드려내고자 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먼저 우리를 복음이 시작된 시점으로 이끌어 갑니다. 왜 저자 마가는 시작 시점에 주목하는 것일까요? 현재 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바로 시작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이 쓰여질 당시 초대교회는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었습니다.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믿음에서 떠나버리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마가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복음이 시작되었던 그 시점에 이미 제시되어 있음을 보여주려 합니다.

현재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 생각에 초대 교회 당시에는 불 같은 박해가 있었다면 현재는 얼음 같이 차가운 냉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수많은 원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최근의 원인을 꼽자면 역시 2020년부터 시작되었던 코로나 사태가 있습니다. 초반에 교회가 마치 집단 감염의 근원지인 양 공격과 질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달라요”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내부적으로 무너진 곳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모이지 못하는 동안 전도, 양육, 예배, 기도 등등이 전반적으로 많이 약해졌습니다. 코로나가 끝난 이후에도 그 여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차가움 뿐만 아니라 이제 내부의 차가움까지 더 해져서 교회는 길고 긴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혹시 이러다 앞으로 더 혹독한 겨울이 우리를 덮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었던 그 지점에서 희망과 해답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복음의 시작에 앞서 어떤 준비가 있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축구 경기를 시작하기 앞서 감독이 작전을 짜고 선수들이 몸을 푸는 준비 과정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 역사 역시 제대로 시작하려면 준비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시작하기 앞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마가복음은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소개할 인물인 세례 요한부터 소개합니다. 이를 위해 구약의 한 예언을 제시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2,3)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예언의 내용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선포된 지 무려 700여년이 지난 후 세례 요한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 요한은 무엇을 했으며,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첫째, 사람들에게 죄 사함의 필요성을 일깨웠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4)

세례 요한이 곧 오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택한 수단은 바로 세례였습니다. 요한은 왜 하필 세례를 선택했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 사함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일깨우기 위해서 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런 현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깨끗한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세례는 저 더러운 이방인들이 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세례를 통해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너희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오십 보 백 보의 차이일 뿐 다 똑같이 죄인이다. 너희도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이 메시지에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헛소리 집어치워라! 우리는 이미 충분히 깨끗하다!” 하면서 반발하지 않았을까요?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5)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게도 매우 뜨거웠습니다.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나와서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이토록 강력하게 역사할 수 있었을까요? 

둘째,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6)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메시지를 뒷받침하는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오늘날이라면 고가의 천연 소재로 만든 빈티지 룩이라고 불렸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거칠고 투박한 옷일 뿐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이 역시 오늘날에는 무공해 고단백의 웰빙 푸드라고 할 만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가공이 전혀 안 된 거친 음식의 대명사였습니다.

이런 세례 요한의 삶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의 삶과 대비가 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실크로 만든 부드러운 옷을 입고 양고기 스테이크와 숙성된 포도주를 즐겼습니다. 이런 삶을 사는 종교 지도자들이 전하는 메시지에는 아무런 반향이 없었습니다. 죄에 대한 책망도 없고 회개에 대한 간절한 촉구도 없었습니다. 맨날 똑 같은 하나마나 한 이야기 뿐이었습니다.

반면 세례 요한은 삶도 거칠고 메시지도 거칠었습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돌 직구를 날렸습니다. 너무 투박해서 듣고 소화하기가 거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날 것의 메시지에는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영혼에 부딪쳐 오는 울림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뜨겁게 반응했던 것입니다.

셋째,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도왔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뜨거운 반응이 있을 때 세례 요한에게 새로운 유혹이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겉으로 표현은 안 하지만 속으로 “역시 나라는 남자는 어쩔 수 없어! 너무 훌륭하잖아!”라고 하면서 사람의 주목을 은근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7)

세례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다고 말합니다. 당시 신발끈을 푸는 것은 노예가 하던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예수님 앞에서는 그분의 노예가 될 자격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비하하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만큼 위대하신 분임을 힘주어 말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비교해서 어떤 점에서 위대하십니까?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8)

요한의 세례는 물 세례입니다. 물 세례는 죄 사함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세례입니다. 그러나 죄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 세례는 죄 사함을 주는 세례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불로 우리의 죄를 태워 없애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자신보다 능력 많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힘주어 선포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주어졌던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사명과 우리에게 주어진 목자의 사명이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요한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켰듯이 목자 역시 양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친히 복음 역사를 시작하실 수 있도록 앞서 환경을 만드는 역할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의 분명하고도 단호한 메시지, 검소하고 소박한 삶, 그의 겸손함과 자기 부인 등을 본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세례 요한에게서 거칠고 투박하지만 진정성이 있는 그의 야성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안암UBF의 시작에는 야성이 살아있었습니다. 당시 환경은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천막을 치고 여름수양회를 하고 형제들은 다 강당에서 널브러져 잤습니다. 그래도 힘든 줄 모르고 맨땅에 헤딩하고 우직하게 캠퍼스 복음 전파의 길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그때에 지금 우리는 많이 세련되게 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업그레이드가 되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야성도 서서히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점점 더 눈만 높아지고 진정성은 희석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다시 믿음의 야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캠퍼스와 이 땅 가운데 꽃들이 피고 영광의 주가 오실 그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목자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시작하기 앞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제 드디어 세례 요한이 증거했던 예수님께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실 차례입니다. 그런데 그 첫 모습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대체 어떤 모습일까요?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9)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베푸셔야 하는데, 서열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 사람으로서 참 받아들이기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왜 받으셨는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첫째, 세례 요한의 사역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세례 요한에 대한 리스펙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으로 대표되는 구약의 역사를 계승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둘째, 처음부터 십자가를 내다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세례 받을 때 죄 없는 분이 죄인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 죄인의 자리에 못박히셔서 온갖 저주와 심판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십자가의 예고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알고 보니 이렇게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받으신 예수님께 놀라운 일 두 가지가 일어났습니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10,11)

하나는 하늘이 갈라지고 그 틈 사이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성자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돕도록 파송하신 사건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는 음성을 들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향한 공개적인 사랑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이런 고백을 아버지로부터 들어 본 적이 있나요? 저는 없습니다. 만약 들었다면 너무 감격이 되어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이와 같은 음성을 들려주셨을까요? 그것은 앞으로 복음 역사를 시작하려는 예수님께 꼭 필요한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께 필요한 것은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능력이 필요하고 치밀한 전략과 계획도 필요하고 사람도 필요하고 물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예수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많은 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확고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음성 덕분에 이후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은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역시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펙을 쌓고 시험에 합격하고 능력을 업그레이드하는 것, 물론 다 필요한 준비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실패와 좌절 앞에서 자존감이 바닥나고 멘탈이 무너진다면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앞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부터 들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너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노라! 너는 내가 기뻐하고 천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나의 자녀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 음성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필요하지만 저는 특히 20대 우리 러너스 세대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20대는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준비는 다 잘하고 있으면서 정작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나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 이대로 시작한다면, 앞으로 험난한 인생길 가운데 그들의 멘탈이 나가지 않을까 너무 걱정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20대 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알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의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 러너스가 나에게 들려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음성을 힘입어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시작하기 앞서 광야를 통과해야 합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의 마지막 코스 하나만 남았습니다. 어떤 코스일까요?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12,13)

마지막 코스는 광야에서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장 40일 동안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광야에서 홀로 사탄에게 시달리고 들짐승에게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이 코스로 몰아넣으셨다는 것이 충격입니다. 아니, 무슨 억하심정이 있길래 성령님은 예수님을 이런 험지로 몰아넣으셨을까요?

이는 예수님께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광야의 시험이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공생애 기간 동안 사탄이 예수님의 사역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들짐승 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공격이 계속될 것입니다. 광야의 혹독한 시험을 통과해야만 예수님은 이 모든 일들을 넉넉히 이길 준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넣으신 것은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인생길에서도 광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 번 광야를 통과해 본 사람은 어떤 힘든 일을 만나도 크게 당황하지 않습니다. 더 어려운 일도 겪어 봤는데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광야에서 인내를 배웠기 때문에 열매가 맺힐 때까지 참고 견딜 줄 압니다. 광야에서 만난 나의 하나님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의지할 수 없었던 그곳에서 만난 그분을 신뢰하며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기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모세도 다윗도 예수님도 광야를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광야로 가지 않으려 합니다. 다들 처음부터 광야 대신 꽃길만 가려고 합니다. 카카오톡에도 “꽃길만 가세요”라는 이모티콘은 있어도 “광야를 통과하세요”라는 이모티콘은 없습니다. 성령께서 광야로 몰아가시면 멀리 도망쳐 버립니다. 너무 안타까운 현상입니다.

다시 한번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 러너스에게 호소하고 싶습니다. 시작부터 꽃길만 걷는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시작은 광야에서부터’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국룰입니다. 혹시 현재 광야를 지나고 계신 분이 있다면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나고 보니 제 인생에서 무언가를 깨닫고 배웠던 기억은 전부 다 광야에서 있었던 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려고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고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이 광야입니다. 복음은 광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인생도 광야에서 탄생할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를 지나며 나를 내려 놓고 주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으로 빚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길 없는 광야에서 길 되시는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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