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제15강 / 이창무
이 말을 하였으니
말씀/ 마가복음 7:24-37
요절/ 마가복음 7: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미국 미네소타에 본사가 있는 3M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의 연구원 스펜서 실버는 강력한 접착제를 개발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여 약한 접착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접착제가 쓸모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연구원 아트 프라이가 이 접착제를 활용해 메모지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메모지가 바로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포스트 잇’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찾는 믿음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이방인의 땅에서 이런 뜻밖의 믿음의 형성 사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어디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믿음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표현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첫째로,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막 7:24).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게네사렛을 떠나 북쪽의 이방인 지역인 두로로 향하셨습니다. 왜 두로에 가셨을까요?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시간을 보내며 잠시 쉼을 얻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정결 문제로 크게 충돌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방 땅에서 잠시 숨어 계시며 열기를 식히려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명성은 이미 두로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든, 사람들은 그분을 찾아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최근 해외에서 ‘불닭볶음면’이 마트마다 진열하자마자 품절이 되고 난리라고 합니다. 덕분에 삼양식품의 주가가 농심을 앞질렀습니다. 입소문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예수님도 확실히 불닭볶음면처럼 매운 맛이 있긴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막 7:25-26).
이 여인은 '헬라인'이자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유대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유대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찐 이방인”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적 고정관념에 따르면 유대인 남자와 이방인 여자 사이에는 진지한 교류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사회적 관습의 굴레를 벗어나 과감하게 장벽을 넘어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간절히 간청했습니다.
무엇이 이 여인을 이토록 대담하고 간절하고 겸손하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그녀의 어린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인은 딸의 고통을 지켜보며 어머니로서 큰 절망과 자책에 빠졌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치유를 위해 자존심과 체면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딸의 치유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왔습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예수님께로 이끈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여인의 ‘들음’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믿음으로 나온 사람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그랬고, 회당장 야이로도 그랬습니다. 이 여인도 예수님에 대해 듣고 그분의 능력을 믿고 나아온 것입니다. 로마서10:17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이 구절은 믿음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잘 듣는 것이 믿음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잘 듣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귀가 있다고 다 잘 듣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경우도 예수님께 대한 긍정적인 소문만 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소문, 미친 사람이라는 소문,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한다는 소문, 포도주를 즐기고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소문 등등 온갖 부정적인 소문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인이 만약 이런 소문에만 귀를 기울였다면 예수님을 불신하고 경계했을 것입니다. 결국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이 고침 받는 역사도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께 대한 거짓 뉴스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잘 들은 덕분에 팩트에 기초해 예수님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믿음으로, 용기와 겸손함으로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구전이 소문의 전달되는 통로였다면 오늘날에는 유튜브가 대세인 것 같습니다. 2023년 기준 한국인의 한 달 평균 유튜브 시청 시간은 약 50시간으로 전 세계의 평균의 약 두 배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유튜브 시청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수많은 신앙 교육 자료, 설교, 간증 등을 언제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극복하고 신앙 생활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또한 유튜브를 전도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튜브 시청의 부정적인 영향도 있습니다. 유튜브에는 검증되지 않은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을 전하는 채널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잘못된 신앙을 형성할 위험이 있습니다. 유튜브의 방대한 콘텐츠는 정보의 과부하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짧은 영상에 익숙해진 성도들은 깊이 있는 신앙 학습에 필요한 집중력과 인내심을 잃을 수 있습니다. 온라인 영상 시청이 오프라인 교회 생활을 대체할 경우 공동체 생활의 중요성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믿음은 공동체 안에서 교제와 섬김을 통해 성장하기 때문에 단순히 영상을 시청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튜브 시청을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고 오프라인 교회 생활을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고, 성경 공부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유튜브를 잘 활용하되 신중함과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애매하다 싶을 때는 조언을 구하고 상담과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온라인을 신앙 성장의 기회로 잘 활용하되, 전통적인 교회 생활과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바울의 말씀을 우리가 잘 간직하고 다른 무엇보다 말씀을 귀 기울여 잘 듣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믿음은 말함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들음을 통해 믿음이 시작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음으로, 믿음은 무엇을 통해 드러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여인의 요청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7-28).
예수님의 대답은 비유적이었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자녀’로, 여인을 ‘개’로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던 단어였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별 수 없는 유대 민족주의자였던 것일까요? 숨어 있으려 했는데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서 짜증이 나신 것일까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런 거친 표현을 쓰셨는가 잘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평소 예수님 답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말씀이 여인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우선 순위에 있음을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공부를 안 한 사람에게는 시험이 죽을 맛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많이 사람에게 시험은 자신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자신의 믿음과 겸손 드러낼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에 여인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오래전 한 여름수양회 메시지에 따르면 여인이 ‘어디 개 맛 한번 보실래요?’하면서 예수님께 달려 들어서 ‘앙’하고 물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유튜브에 ‘내가 경험한 예수의 실체”라는 제목으로 고발 영상을 올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겸손하게 반응했습니다. “주여 옳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개로 인정했습니다. 단, 자녀들과 한 집에 사는 개로 여겼습니다. 요즘 보면 한 집에 사는 개가 자녀들보다 더 호강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때가 되면 먹여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산책도 시켜줍니다. 여인은 개는 개이지만 집안의 개이기 때문에 상 아래에서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이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은혜를 구하는 겸손한 마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말하기에 앞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입니다. 잘 들었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표현에 집착하기 보다 그 속에 담긴 의도와 마음을 읽었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여인은 “예수님이 나를 거절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지 여부를 테스트하시려는 것이구나. 예수님의 진짜 의도는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도와 주시려는 것이 틀림 없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말씀을 그 속에 담긴 의도와 마음까지 정확하게 캐치해 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 여인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가 없어야 합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의 특징이 잘 못 듣는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오해하고 쉽게 분노하거나 반발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허구한 날 ‘어찌하여’를 남발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그들의 오만과 편견 때문에 예수님께 믿음의 말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반면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 들린 딸 문제로 자기가 다 깨어져서 마음이 많이 겸손해 진 것 같습니다. 여인의 겸손한 태도가 예수님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 수 있게 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긴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던 덕분에 예수님께 지혜로운 말, 믿음의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 7:29-30).
여인의 지혜로운 대답에 예수님은 기뻐하시며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의 믿음의 말에 크게 감동하시고 그 믿음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장차 수많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하고 있나요? 예수님이 ‘좋아요’를 누를 수밖에 없는 믿음의 말, 겸손의 말을 하고 있나요? 아니면 ‘차단’ 버튼을 누르고 싶게 만드는 불신의 말, 분노의 말을 하고 있나요? 우리가 말을 잘 하려면 말재주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잘 들어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표현에 현혹되지 말고 속마음까지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잘 듣기 위해서는 자기가 없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예전에 제가 대기업 채용 담당자로 일할 때 임원 면접을 참관하면서 속으로 웃은 적이 참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임원이 질문을 했는데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엉뚱한 답변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미리 준비해 온 답변이 있어서 무어라도 비슷한 부분이 있으면 무조건 그 답변을 말하려는 듯 보였습니다. 결국 이렇게 엉뚱한 대답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다 떨어졌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자기가 강합니다.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상처받고 쉽게 분노합니다. 이 때문에 학교 선생님이 너무 힘들어 하고 계십니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고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상처받을까 봐 테스트를 해 볼 수도 없고 훈련을 할 수도 없게 됩니다. 자아가 지나치게 비대해진 사람은 믿음의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믿음의 말을 할 수 없기에 예수님의 권능과 은혜를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살펴보니, 우리의 자아가 때로는 지나치게 강해져 주님과 이웃에게 믿음의 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만과 자기 중심적인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과 타인의 말을 경청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입술을 다스려 주셔서 믿음의 말, 겸손의 말, 지혜의 말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로,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공동체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막 7:31-32).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그리고 데가볼리 지방을 거쳐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을 때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병자는 듣지 못하고 말도 더듬는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 병자를 공동체가 함께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그 지역 사람들이 한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해 한 마음으로 나선 것을 보여줍니다. 어디서 이런 믿음이 생겼을까요? 분명히 전에 군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이 지역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널리 알린 결과일 것입니다. 공동체 전체의 믿음 덕분에 나오게 된 이 사람을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막 7:33-34).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그의 귀를 만지시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상당히 비위생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가 전혀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시각과 촉각을 통해 소통하신 것입니다.
곧이어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왜 탄식하셨을까요? 일차적으로 그 병자의 안타까운 상황 때문에 탄식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떠올리시며 탄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영적으로 귀가 막히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에바다" 곧 "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막 7:35-37).
그러자 병자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분명하게 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해 침묵할 것을 명령하셨으나 사람들은 더욱 널리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심히 놀라며 "그가 모든 것을 잘 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하다'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헬라어 원어로 '하다'는 창조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남자를 재창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보시기에 심히 좋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 사람의 귀와 혀가 열렸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치유를 넘어서 영적 치유를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귀가 막히고 혀가 묶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귀먹음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귀가 막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그 결과로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믿음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말더듬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고, 신앙을 고백하거나 증거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믿음이 성장할 수 없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본인은 들리지 않으니 믿음이 안 생기고, 믿음이 안 생기니 믿음의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동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공동체가 서로를 도울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공동체는 정기적인 예배, 성경 공부 모임 등을 통해 한 사람이 믿음의 기초를 쌓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공동체는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고,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공동체 내의 성숙한 신앙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그들의 신앙 생활과 삶의 모습을 통해 배우고 따라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신앙적 성숙을 이룰 수 있습니다. 마치 헬스장에서 트레이너가 ‘한 번 더!’ 외치며 운동을 도와주듯, 우리도 서로의 믿음을 ‘펌핑’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믿음을 북돋을 수 있는 기회가 가까이 왔습니다. 이번 여름수양회의 전체 주제는 ‘우리가 대답해야 할 예수님의 다섯 가지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해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말, 사랑을 고백하는 말, 감사를 고백하는 말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잘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 영적으로 꽉 막혀 듣지 못하고, 고백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번 수양회를 통해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친히 열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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