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이창무 2024. 9. 22. 15:48
반응형

2024년 마가복음 19강 / 이창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말씀/ 마가복음 9:14-29

요절/ 마가복음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수많은 경험들은 때론 소중한 가르침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경험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지혜를 얻고, 자신감을 키우며, 성취의 달콤한 기쁨을 맛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 경험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의 보석이 되어 우리의 가슴 속에 소중한 이야기로 남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의 해답이 될 수 있을까요? 미국의 극작가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경험 속에서 우리는 지혜를 얻고 그곳에서 멈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뜨거운 난로 뚜껑 위에 앉았던 고양이처럼 되어버린다. 이 고양이는 다시는 그 뜨거운 뚜껑 위에 앉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그 고양이는 차갑게 식은 난로 뚜껑 위에도 다시는 앉지 않으려 할 것이다."

경험은 분명히 귀한 자산이지만, 혹시 우리가 그 경험의 틀 안에 갇혀,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경험은 때로는 우리 안에 후유증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경험의 굴레를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 길은 다름 아닌 믿음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 믿음을 배우고,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영광을 체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첫째로, 믿음의 부재는 무능과 논쟁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 은혜로운 시간을 보내고 계실 때, 나머지 아홉 제자들은 산 아래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14)

제자들은 서기관들과의 논쟁 속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만 데리고 떠나셨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서운함과 시기심이 가득 차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때,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한 사람이 그들에게 찾아와 고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전도여행에서 귀신을 내쫓은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도 능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자신감에 차 소리쳤습니다. “귀신아, 나가라!”

그러나 귀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제자들은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그러나 귀신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간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귀신아, 제발 좀 나가주라!” 그러나 이마저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때 서기관들이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큰 소리만 뻥뻥 치더니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구나!” 제자들은 무리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그 실패를 인정할 수 없어서 서기관들과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과 무엇을 놓고 변론하고 있는지 물으셨고, 무리 중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7,18)

이 아버지는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아뢰며 동시에 제자들의 무능함을 지적했습니다. 왜 제자들이 실패했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경험에 기대어, 기도와 믿음 대신 자만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다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참담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19)

예수님께서는 왜 “믿음이 없는 제자들이여”라고 하지 않으시고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예수님이 단순히 제자들만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를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불신이 그 시대를 잠식하고, 악의 세력이 활개 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진 세대의 타격은 누구에게 가장 먼저 미칠까요?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규범이 무너질 때, 가장 먼저 정신적, 정서적 피해를 입는 것은 바로 아이들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불신이 팽배한 시대는 아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거품을 물고 이를 갈며 점점 파리해져 가는 아이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청소년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극심한 경쟁과 공부의 압박 속에서, 아이들은 쉬지 못한 채 학교와 학원 사이를 오가며 힘겨운 일상을 살아갑니다. 디지털 기기와 소셜 미디어에 중독되어 현실의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비교와 사이버 괴롭힘, 외모 지상주의에 시달려 자존감은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 결과, 한국 청소년들 사이에서 우울증과 불안감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폭주하는 아이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논쟁만 벌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아이들을 살려내지 못한 채 ‘이게 다 당신 탓이요’ 하며 서로를 탓하는 데만 급급하지는 않은가요? 교회라도 이러한 아이들에게 숨 쉴 공간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과연 우리는 그런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합니다. 우리 역시 믿음 없는 세대의 일원이 되어, 무능하게 주저앉아 있다면, 주님께서는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고 탄식하시겠습니까?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둘째로, 믿음의 성장을 주님이 도우십니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20)

아버지가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오자, 귀신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아이를 더욱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아이는 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귀신은 그나마 남아있던 믿음의 조각마저 산산이 부수고, 더 깊은 절망 속으로 아버지를 밀어 넣으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21,22a)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아들이 귀신에 시달리며 불 속과 물 속을 헤매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을지, 예수님은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언제 아이가 또다시 무슨 위험에 처할지 몰라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절망과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요? 아버지는 마침내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2b)

아버지는 절망의 끝에서 작은 희망을 붙들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습니다. 과거의 수많은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아버지의 믿음을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아버지에게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그저 동정의 말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힘들었겠구나”라고만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한 책망 이상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불신과 절망을 이해하셨지만, 그 상태로 머물게 하시려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동정만으로는 믿음이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불신을 깨뜨리고, 그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100% 믿음으로 채우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책망이면서 동시에 도전이며 격려이기도 했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에서 샘을 터뜨리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믿을 때,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삶 속에서 실제로 역사하십니다. 불신의 벽이 그 능력을 가로막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황이나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불신 때문입니다. 그 불신의 벽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책망하시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으로 우리는 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믿음의 통로를 세워야 합니다. 그 통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연결될 수 있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의 책망과 격려를 듣고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4)

이제 아버지는 더 이상 불신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믿나이다”라는 강력한 고백을 통해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믿음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도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이 겸손한 고백이야말로 믿음의 성장이 시작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우리도 아이의 아버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양이든, 자녀이든, 배우자이든, 혹은 다른 문제든 간에, 우리는 처음에는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도할수록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실패가 반복되면, 점차 믿음이 약해지고 상처만 남게 됩니다. 도전할 의욕조차 상실해 버리는 순간도 찾아옵니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절박하게 외쳤던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께 우리의 연약함을 솔직히 고백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기에, 우리가 온전히 믿지 못할 때에도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믿음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 성장을 위해 도움을 구할 때, 주님은 기꺼이 응답하시며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을 큰 믿음으로 자라나게 하실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의심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심과 맞서 싸우며,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붙들고 신뢰하는 과정에서 믿음은 깊어지고 단단해집니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의심이 우리 마음에 스며들 때조차,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 그분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한 걸음 더 성숙해집니다. 우리가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예수님의 이 놀라운 약속을 붙들고, 그분의 신실한 도우심을 의지하며, 우리의 믿음이 날마다 자라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로, 믿음의 표현은 기도입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5)

예수님은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즉시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귀신아, 내가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귀신은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마지막으로 괴롭히고 떠났습니다. 아이는 잠시 죽은 것처럼 보였으나, 예수님께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다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어둠과 사탄의 모든 권세 위에 군림하시는 분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이 귀신의 속박에서 풀려난 것을 보며, 하늘을 향해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오늘도 여전히 역사하고 있음을 그는 깊이 체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며, 믿는 자에게 불가능이 없음을 보여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문제를 마주할 때,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불신마저도 솔직히 고백하며 도우심을 구할 때, 주님은 결코 우리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8)

이 사건 이후, 제자들은 조심스럽게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왜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냉정하게 “나니까 가능한 거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 (29)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하지만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의 영적 권세를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으며,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깊은 교훈을 전해주십니다.

기도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심화하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믿음은 기도를 통해서야 비로소 살아 움직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강함에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는 그들이 과거의 경험에 의지한 나머지, 하나님과의 연결을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현재적인 믿음의 표현인데,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 결과로 무기력해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을까요? 왜 영혼들을 어둠의 세력에서 구원해 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머물러 있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과거의 경험에만 의지해, 오늘날의 문제들을 과소평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니면 과거의 실패에 사로잡혀 그저 손을 놓고 방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은 더 악해지고, 어둠의 권세는 더 강력해져만 가고 있습니다. 물질 만능주의와 도덕적 타락이 심화되고, 우리의 다음 세대는 점점 더 연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는 더욱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는 더욱 간절히, 더 깊이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 때입니다. 과거의 경험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새로운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싸움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제가 중한 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분을 심방간 적이 있었습니다.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라도 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러자 이 환자분이 전혀 환자 같지 않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라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기도에 제가 살고 죽는 것이 달려 있는데 ‘기도라도’라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제게 가장 필요하고 큰 선물인 기도를 해 주러 오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너무 부끄러워서 정말 쥐 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제가 기도를 너무 가볍게 여겼던 것을 회개합니다. 제가 살고 죽는 것이 기도에 달려 있다는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기도에 승부를 거는 목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무기력해지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할 때, 그분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나아가, “주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반응형

'설교 >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의 말을 들으라  (2) 2024.09.15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1) 2024.09.01
이 말을 하였으니  (1) 2024.07.01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0) 2024.06.16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1) 2024.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