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뭇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

이창무 2024. 10. 2.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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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20강 / 이창무

뭇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

말씀/ 마가복음 9:30-50

요절/ 마가복음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개그 콘서트의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이라는 코너에서 유행어가 하나 탄생했었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참 씁쓸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말입니다. 올림픽 순위를 봐도 은메달을 열 개 따 봐야 금메달 하나에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니까요. 세상이야 원래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는 어떠했을까요?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30)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를 지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도 전에 없이 엄숙한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무슨 이유였을까요?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31)

예수님에게는 제자들에게 꼭 들려주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던 메시아는 승리와 영광을 가져오는 분이셨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길은 고난과 죽음뿐이었습니다. 반복해서 같은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 제자들은 더 물어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마음 한 켠에 막연한 두려움을 품은 채,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향했습니다. 그 길 위에서, 그들은 속닥이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클까?”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서열 정리를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어?” “지금이 우리 흑수저들이 판을 뒤엎을 마지막 기회야.”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들은 여전히 영광과 높임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33)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은 집 안에서 제자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순간, 제자들은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좋아하지 않을 주제라는 것을 제자들이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제자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사람 모인 곳에서는 어디서나 누가 크냐 하는 권력 다툼이 벌어집니다. 제가 한 때 사진 동호회에서 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냥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취미를 공유하자는 순수한 모임이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캐논 파와 니콘 파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출사 행사며, 회장 선출이며 모든 문제에서 사사건건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소수파인 올림푸스 파여서 끼일 자리조차 없었고, 결국 동호회는 ‘어떤 카메라를 쓰는 사람이 큰 자냐’는 다툼으로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그 작은 동호회에서조차, 사람들은 왜 그렇게 큰 자가 되려고 애를 썼을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 중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더 높아지고, 다스리는 위치에 올라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열망’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열망이 우리의 자기 중심적인 타락한 본성과 결합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세 가지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로, 뭇 사람의 끝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35)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정한 위대함은 모든 사람의 끝으로 가서 그들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사람을 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첫째의 모습입니다. 그 끝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고, 주목받지 못하며, 세상 기준으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입니다. 영향력도 없고,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끝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라. 그들을 너의 앞에 세우라.”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으로 권력의 첫째가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큰 도전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이들과 가까워지고, 그들을 동아줄로 잡아서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발버둥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영광을 좇지 말고, 끝에 있는 사람들, 아무 영향력도 없는 이들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존재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미약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들을 섬기는 것이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6, 37)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어린아이 하나를 그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당시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아무런 지위도, 권리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섬기신 사람들이 이런 ‘어린 아이’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병 환자, 중풍병자, 세리, 한 손 마른 사람, 혈루증 앓는 여자, 이방인 여자처럼 그 사회에서 존재감 없거나 무시 받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사람들과 가까이하시며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딸'이라 부르시며 가장 소중한 가족으로 받아주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고 버림 받는 존재, 곧 어린 아이와 같이 힘 없는 자가 되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그들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들의 위치도 함께 높아지기를 바라는 기대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길은 그런 영광이 아닌, 섬김과 희생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의 끝에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사람을 섬기셨습니다.

우리도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습니까? 우리의 관심과 논쟁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길은 경쟁과 비교의 길입니다. 누가 더 크고, 누가 더 성공적이며,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는지가 목표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 길은 섬김과 희생의 길이며, 끝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첫째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 길을 선택하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저는 제 동기인 뉴욕의 배 웨슬리 선교사님을 존경합니다. 그분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를 품고 섬기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주셨습니다. 작년 북미 수양회에 참석한 안암1부 저니 팀을 위해 휴가를 내고 기꺼이 운전을 도맡아 섬겨 주셨습니다. 특히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번에 결혼한 안 소망 목자님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주기 때문에, 만나면 늘 기분이 좋아지는 친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뭇 사람의 끝에 서서, 그들을 섬기는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을 영접하라고 가르치셨지만, 요한은 곧 자신이 영접하지 않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38)

여기서 요한이 말한 '따르다'는 표현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만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금지했다고 말합니다. 이 순간,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우리”로 바뀐 것입니다. 요한과 제자들은 자신들을 모든 일의 표준으로 삼고,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배타적인 엘리트 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기준과 전통을 권력으로 삼아 예수님을 배척했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39-41)

이때 예수님은 그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하십니다. 첫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사람은 그 즉시 예수님을 비방할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고 나서 자기 부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위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서로 협력하고 연합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물 한 잔은 최소한의 호의일 수 있지만, 예수님은 이 작은 행동조차 매우 귀하게 여기십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이 작은 호의를 소중히 여기고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포용의 레벨을 점점 높이십니다. ‘능력 행하는 사람’에서 시작해, ‘우리 편은 아니지만 반대하지도 않는 사람,’ 그리고 심지어 ‘물 한 그릇만 내밀어주는 사람’까지 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섬기는 방식이 다양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 모든 행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저한 예수님 중심의 신앙입니다. 세상에서는 쉽게 ‘우리’라는 기준으로 경계선을 긋고,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며 배타적으로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중심이 되면 모든 경계는 사라집니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섬김이 존중받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모든 사람과 공동체가 귀하게 여겨집니다. 우리의 사역 방식과 전통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공동체를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역하는 이들을 인정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나 홀로 잘하는 이가 아닙니다. 너와 내가 함께 어울려 모두가 잘되게 하는 사람, 바로 그런 이가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솔직히, 우리도 예전에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변하고 있습니다. 올해 안암UBF는 고기연(고려대 기독인 연합회)과 함께 여러 가지 활동을 펼쳤습니다. 3월에는 이공계 캠퍼스에서 열린 동아리 박람회에서, 우리 모임만 홍보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연 자체와 그 안에 속한 여러 단체들을 함께 알렸습니다. 봄 학기 채플에서 제가 설교를 하고, 이후에는 고대 기독교수회의 교수님들과 교제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고기모(고려대를 위해 기도하는 학부모 모임)에서도 초대를 받아 설교를 했습니다. 함께 기도하며 고려대 복음화를 위해 마음을 모았을 때, 저는 그 안에 계신 여러 사람들이 우리와 사역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지만, 묘하게 통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방금 만난 사이인데도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친근함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들 안에도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 안에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더욱 좁은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과 같은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위대하고 탁월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42)

앞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작은 섬김이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반대로,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천국과 지옥을 가를 만큼 중요한 문제임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작은 자"는 아직 믿음이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 혹은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무시 받을 수 있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공동체가 커지고 영향력이 커질수록, 이러한 작은 자들은 쉽게 간과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말과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이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작은 자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실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작은 자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결정할 만큼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지켜야 할 본질은 바로 이 작은 자를 소중히 섬기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은 자를 실족시키지 않으려면 손, 발, 눈을 찍어버릴 각오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은 우리의 행동을, 발은 우리의 선택을, 눈은 우리의 의도를 상징합니다. 이 모든 것이 누군가를 섬기기보다는 자신이 첫째가 되기 위해 쓰인다면, 그 결과로 작은 자들이 상처받게 됩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그 손과 발과 눈을 잘라버리는 편이 낫다는 섬뜩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작은 자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을 얼마나 큰 죄로 여기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지난 2021년 CGNTV에서 방영된 “안녕히 계세요 하나님”이라는 특집 다큐멘터리에는 교회를 떠난 청년들의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교회 생활이 즐거웠고, 아름다운 추억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를 떠난 데는 주로 세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교회 내의 위선과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타인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둘째, 교회에서 여러 역할을 맡아 헌신했지만 정작 영적인 돌봄은 받지 못해 결국 번아웃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셋째, 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배제와 소외를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싶었지만, 교회의 위선과 판단, 그리고 배제의 문화 속에서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고 토로합니다. 이들이 언젠가 다시 돌아와 “안녕하세요 하나님”을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품어줄 수 있는 공동체로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 안암 1부가 바로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49, 50)

49절과 50절 모두 소금을 언급하지만 그 이미지는 서로 정반대입니다. 소금이 불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소금이 머금고 있던 습기가 순식간에 증발하면서 튀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스파크가 일어납니다. 이는 마치 분열과 다툼이 일어난 공동체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고 앞자리에 앉으려 하는 공동체에서는 만날 때마다 스파크가 일어납니다. 이러다 보면, 심지어 “여기가 불지옥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금을 음식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소금이 음식의 맛을 제대로 살려줍니다. 아무리 미슐랭 3스타 쉐프가 만드는 고급 요리라 해도 간이 맞지 않으면 ‘이게 무슨 맛이야?’라고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런 소금, 즉 제자도를 넣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섬기면서 서로에게 녹아들면 우리 공동체가 은혜의 '맛집', 사랑의 ‘맛집’이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제자들 안에 소금 같은 제자도가 살아 있을 때, 그 공동체의 분위기는 자연스레 화기애애해집니다. 서로 끝이 되려고 하고, 서로 섬기려고 할 때 진정한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공동체 안에 있으면, 마치 천국에 와 있는 듯한 평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섬김과 겸손의 길은 진정한 위대함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의 성공과 높은 자리에 매달리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뭇 사람의 끝에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섬겨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갈 때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 섬김과 포용의 마음으로 서로를 세워야 합니다. 그럴 때 이곳은 화목이 가득한 천국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세상의 길을 내려놓고 어린아이와 같은 자를 품으며, 작은 자를 실족시키지 않겠다는 결단으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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