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디모데전서 제5강 / 이창무
존경하라
말씀 / 디모데전서 5:3-6:2
요절 / 디모데전서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혹시 ESG 경영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각각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라는 단어에서 따온 말입니다. 2020년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기업이 환경과 사회와 지배구조, 이 세 가지 책임을 잘 감당해야 지속가능한 기업이 될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세 가지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책임을 잘 감당해야 지속가능한 교회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교회의 사회적 책임 세 가지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성도를 도울 때는 형편을 살피고 사역에 동참할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5:3)
당시 사회는 전쟁도 많고 의료 수준도 열악하다 보니 과부가 많았습니다. 현재는 과부라도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도 있고 복지 서비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살 길이 참 막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과부가 당연히 교회 안에도 적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존대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존대하라는 말은 그들이 존엄성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라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생활비를 지원하라는 말입니다. 이같이 과부로 대표할 수 있는 어려운 성도를 교회가 돌보고 도와주는 일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돕는다고 해서 무작정 아무 생각 없이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정말 유익이 되도록 돕는 일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의로 도와주었는데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과부가 아니라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누가 참 과부일까요?
먼저 참 과부는 돌볼 가족이 없는 과부입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4)
만약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가 있는 경우에는 교회가 아니라 가족이 과부를 책임지고 돌봐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녀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효를 행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시간이 흘러 부모가 나이 들게 되면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만약 친족이 과부를 돌보지 않는다면 이것은 교회에 지나친 부담을 지우는 것이 되고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기회를 빼앗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물며 믿는 사람으로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음으로 참 과부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5,6)
참 과부는 홀로 있어서 의지할 데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소망을 그분께 두어 밤낮으로 간구와 기도에 힘씁니다. 성전에서 오랜 세월 동안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기다가 마침내 때가 되어 아기 예수님을 만났던 여선지자 안나와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땅에 소망을 둔 과부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대신 향락을 추구하며 노는 일에만 진심입니다. 이런 사람은 참 과부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정리하자면 과부가 되는 것만으로 무조건 교회의 도움을 받는 것도 아니었고 모든 과부가 다 똑 같은 도움을 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도와야 할 참 과부는 돌봐 줄 가족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를 돕는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려면 먼저 도움이 필요한 성도의 형편을 잘 살펴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은혜를 베푸시지는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합당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교회도 그러해야 합니다. 교회가 모든 사람을 다 도울 수는 없기 때문에 형편에 따라 선택적인 지원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결코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지만 선별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교회가 성도를 돕고자 할 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 한 가지를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9,10a)
여기서 명부에 올린다는 것은 참 과부 중에서 교회의 여성 사역자로 임명하여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어떤 과부가 명부에 올라 가려면 세 가지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나이가 육십이 넘어야 합니다. 이는 더 이상 재혼을 생각하지 않을 나이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한 남편의 아내였던 사람으로서 결혼 생활에 신실했던 사람이어야 합니다.
셋째,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자녀 양육, 나그네 대접, 섬김, 구제 등을 언급합니다.
반면에 명부에 올리지 말아야 할 사람도 있었습니다.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11,12)
당시에 과부로서 명부에 올리는 일은 남은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주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서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젊은 과부가 재혼하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도리어 새로 출발하여 아이를 낳고 가정을 잘 돌보는 일은 적극적으로 권장할 일입니다. 하지만 명부에 올린 후 재혼을 하는 경우 자신의 처음 믿음과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처음부터 명부에 올리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젊은 과부를 명부에 올리지 않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그것은 맡겨진 사역은 열심히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대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말로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쓸데없는 말일까요? 주로 다른 성도들에 대한 험담이나 온갖 부풀려진 불평과 불만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이 사역자가 되면 막상 복음 역사는 뒷전이 되고 모여서 수다만 떨다가 교회 안에 불화를 일으키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과거에 겸손하게 성도를 섬겼던 열매가 있고 신앙적으로도 성숙한 나이든 과부에게 교회의 사역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교회가 성도를 돕는 일은 재정적인 지원을 통해서 그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도록 섬김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젊은 시절에는 가정을 돌보느라고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자유를 교회를 섬기는 일에 마음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얻은 지혜와 통찰력이 있습니다. 이를 잘 활용해서 남은 인생을 주님을 위해 온전히 수고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움에 처한 성도를 물질로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를 섬길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너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온 교회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의 나이가 점점 더 들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십 년 안에 평생 다니던 직장에서 은퇴하시는 분들이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캠퍼스 학생들과 나이차는 점점 벌어져서 자식뻘에서 손자뻘로 더 멀어져갈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사역에서도 은퇴해야 할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은퇴 후에는 시간도 많고 자식도 다 컸습니다. 그 덕분에 자유롭게 주님을 위해 헌신할 기회가 생기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오히려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분들만 할 수 있는 영역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해외에 방문하신 선교사님들을 영접하고 교제하는 일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선교사님들을 잘 몰라 서로 뻘쭘합니다. 시니어 목자님들이 아니면 누가 이분들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부부 관계, 자녀 양육 문제로 고민이 많은 젊은 목자 가정을 도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한 번 다 겪어봤기 때문입니다. 성공 사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패 사례를 통해서도 더욱 섬세하게 도울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목자님들은 수십 년 동안 쌓은 엄청난 성경 실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말씀이 필요한 후배들, 청년들, 다음 세대들에게 제발 그 실력을 발휘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올해로 만 104세가 된 김형석 교수는 백세 인생을 체험해 보니 본인 인생의 황금기는 60세부터 75세였다고 강조했습니다. 혹시 60이 넘은 목자님이 계시다면 이제부터 전성기가 시작되신 것입니다. 시니어 목자님, 사모님들의 성숙한 동역과 헌신으로 인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교회가 이분들을 통해 빈 곳이 없이 모든 것이 다 풍성하게 채워지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교회의 리더를 대함에 있어 존경과 원칙과 신중함이 있어야 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17)
여기서 장로는 전에 나왔던 감독과 동의어로서 교회의 리더들을 가리킵니다. 리더가 든든히 서려면 인도하는 자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인도를 받는 자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바울은 인도를 받는 자들을 향해 가장 먼저 교회의 리더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명령합니다. 수치적으로 정확히 두 배를 따지기보다는 특별히 더 그 가치를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특히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들의 수고를 깊이 인정하고 존경을 표시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존경할 자로 알라는 명령은 3절에서 과부를 존대하라는 명령이 그러했던 것처럼, 단순히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재정적 지원을 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두 개의 말씀을 가져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18)
하나는 소가 일하는 동안 어느 정도 곡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라는 신명기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수고한 짐승이 먹는 일에 대해 관심을 두시고 명령까지 하셨다면, 교회 일꾼들의 필요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역시 우리가 순종해야 할 주님의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맡은 교회의 리더가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 받고 존중 받지 못하면 힘이 쫙 빠지고 더 이상 의욕이 나질 않습니다. 그도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말씀의 종이 말씀에 전념할 수가 없게 됩니다. 가족을 부양할 길을 찾아 고민하고 이러 저리 뛰어다니느라 사역의 질이 저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교회 전체에게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말씀 사역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는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릅니다. 그야말로 소처럼 일하고 농부처럼 수고해야 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나면 온 몸에서 진액이 다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말씀 사역자가 교회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존중이 있어야 교회가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교회의 리더가 고발을 당했을 때 원칙을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 어떤 원칙들일까요?
첫째, 두세 증인이 없으면 고발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리더는 원래 미움과 모함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괜한 앙심을 품고 모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섣불리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둘째, 객관적으로 범죄한 사실이 드러나면 단호하게 징계해야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런 일이 있을 때 ‘덮어 버리자. 그냥 묻고 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을 도리어 문제를 더 키울 뿐입니다. 덮어지지도 않고 조금 있다가 더 큰 사건이 생깁니다. 징계를 하고 분명히 회개를 하도록 해야 교회의 거룩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셋째, 편견을 가지고 불공평하게 다루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모든 사람은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무조건 편들어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편견이 있으면 사실 관계마저 왜곡시키고 공정함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교회는 친분에 따라 다르게 대하지 말고 모든 사건을 원칙대로 처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교회의 리더를 신중하게 세우라고 권면합니다. 디모데에게 아무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교회에서 공적으로 죄 문제를 다루는 일들이 아예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입니다. 죄 문제는 아무리 원칙대로 처리한다 해도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아픔을 겪지 않으려면 리더를 세울 때 최대한 신중하게 세워야 합니다. 빨리 결정하지 말고 충분한 시간을 두고 검증을 거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교회의 문제들을 보면 문제의 원인이 리더인 경우가 많습니다. 리더가 잘못된 길로 교회를 이끌어 가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함부로 사용하여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곤 합니다. 바울의 권면대로 신중하게 리더를 세우지 않은 결과 홍역을 치르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보면 리더의 문제 뿐만 아니라 회중 전체의 문제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인들이 리더를 전혀 존중하지 않고 자기들 뜻대로 조종하려고 하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헌금을 제대로 안 해서 목회자가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사역을 포기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억울하게 고발을 당해 온갖 불명예를 떠안고 도망치듯 떠나는 리더들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고 나서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사역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 일꾼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다면 앞으로 누가 의욕을 내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려 하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리더와 사역자들을 존중할 줄 아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밖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교회 안에서 만큼은 말씀의 종의 가치를 인정하고 알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 역사에 온전히 자신을 헌신하고자 하는 목자들을 끊임없이 배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청년 세대, 다음 세대 가운데서 말씀을 섬기는 이 영광스러운 직분을 계승할 사역자들이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로, 사회 생활할 때 윗사람을 공경하고 잘 섬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과부와 장로에 이어 마지막으로 종에 대해 말씀합니다. 오늘날에는 종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로마 제국 전체 인구의 삼분의 일이 종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에베소 교회 안에도 종들이 꽤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와서 신세계를 경험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자유인이나 종이나 모두 다 평등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종의 멍에를 벗고 서로를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교회 밖에서는 여전히 엄격한 신분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서는 그리스도인인 종은 어떻게 생활해야 할까요?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 각각 상전이 불신자인 경우와 신자인 경우로 나누어 답을 줍니다.
첫째, 상전이 불신자인 경우입니다.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1)
바울은 상전이 믿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그에게 존경심을 보이고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상전에 대해 전혀 존경심이 안 생기는데 공경하라고 하니 미칠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공경해야 합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종이 상전에 대한 공경함이 없이 함부로 행동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게 되고 그분의 말씀이 비방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종이 상전을 범사에 공경함으로 바르게 산다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둘째, 상전이 신자인 경우입니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2)
바울은 믿는 상전인 경우는 상전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당시에 어떤 종들은 믿는 상전을 만만하게 여겨 일도 대충 하고 기어오르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는 상전을 둔 종들은 상전 섬기는 일을 소홀하지 말고 더 잘 섬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섬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그 형제가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는 종이 아니고 상전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 생활을 하면서 늘 나보다 높은 사람들을 대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신자인 경우도 있고 불신자인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신자라면 내가 그에게 유익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만약 불신자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를 공경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구성원이 있습니다. 세대도 다르고 역할도 다르고 처한 상황도 다 다릅니다. 그 모든 사람을 대하는 기본 원리가 무엇일까요? 바로 ‘존경하라’ 입니다. 참 과부들을 존대해야 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종은 상전을 공경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을 존중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존경이란 단순히 마음의 자세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보약이자 영양제입니다. 우리 교회가 다양성 속에서도 존경이라는 끈으로 하나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일꾼들에게 합당한 존경을 표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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