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디모데전서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이창무 2024. 1. 1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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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디모데전서 제1강 / 이창무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말씀 / 디모데전서 1:1-20
요절 / 디모데전서 1: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오늘부터 우리는 디모데전서를 시작합니다.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책임 목자였던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쓴 목적은 바울이 선배 목자로서 후배 목자인 디모데에게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조언해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디모데전서를 통해서 교회다운 교회, 건강한 교회는 어떤 모습인지 그림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현재 우리 교회가 어떤 점에서 부족하고 개선되어야 하는지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암 1부가 디모데전서 말씀을 통해 좀 더 건강한 교회로 새롭게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건강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무엇일까요? 교회 건물이 멋져야 하나요? 편의 시설을 잘 갖추어야 할까요? 물론 이런 것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가 복음 진리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암 1부 기도 제목표에 올라가 있는 우리 교회를 위한 첫번째 기도 제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각 사람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도록, 다음 세대가 복음을 위하여 세워질 수 있도록, 캠퍼스 복음 전파의 길을 개척할 수 있도록” 입니다. 세 가지 기도 제목 전부에 공통적으로 “복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갑니다. 모든 분들이 기도하실 때마다 항상 우리 교회가 복음 위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교회에 있어서 복음이 왜 이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심지어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을 위해서는 싸움을 마다하지 말라는 엄중한 명령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복음은 사랑을 낳기 때문입니다.

전에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에베소에 왔는데, 마게도냐를 떠날 때 디모데는 에베소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다른 교훈을 가르치기 거짓 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의 임무는 그들의 입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복음의 싹이 피어나 한창 자라나야 할 그 시기에 한 켠에서는 이런 저런 그릇된 교리들이 잡초처럼 자라났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잡초가 무엇이었을까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4)

거짓 교사들은 허무맹랑한 신화와 끝없이 이어지는 족보에 대하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시리즈를 만들어 가르쳤습니다. 도대체 이 신화와 족보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스라엘 판 “국뽕” 콘텐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황당한 “국뽕” 콘텐츠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 신라 백제가 중국 대륙을 지배했고, 한자도 한민족이 발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고대 한민족의 지파 가운데 하나가 수메르 문명을 만들었고, 아브라함은 수메르 출신이니 기독교의 기원은 한민족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당시 에베소 교회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구약의 역사에 신화적인 요소를 덧붙인 이야기들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것이 사람들에게 먹혔을까요? 일단 ‘너무 재미가 있어서’ 입니다. 또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지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재미를 더하기 위해 가면 갈수록 내용이 점점 더 자극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입니까?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있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도리어 변론만 만듭니다. 여기에 빠진 사람들은 믿음의 열매는 전혀 맺지 못하고, 입만 살아서 화려한 말쟁이들이 되었습니다. 서로 내 말이 맞는다며 자기들끼리 싸웠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설치는 교회는 점점 골병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가르쳐야 할 바른 교훈이 무엇일까요?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5)


이 교훈이란 예수님이 직접 임명하신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복음을 가리킵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바른 교훈에서 바른 삶이 나옵니다. 거짓 교훈은 쓸데없는 변론을 만들어내지만, 바른 교훈은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고, 동역자들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변론과 사랑이 교회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이 각각 어떨까요? 변론은 다툼을 낳고, 다툼은 분열을 일으킵니다. 결국 교회를 서서히 죽어가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 됨을 낳습니다. 사랑은 교회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언덕 위의 등불로 우뚝 서게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36년 동안 우리 UBF 안암 교회의 일원으로 지내면서 두 가지 모습을 다 보았습니다. 하나는 목자의 양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 믿음 안에서 한 길 가는 동역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모습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는 모습, 다투고 분열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럴 때는 ‘목자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이렇게 서로 상반된 결과를 낳게 만드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복음이 우리 안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습니다. 복음이 살아있을 때는 한 사람이 변화하여 품격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고, 건강한 가정과 교회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약해지고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그릇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 파고들었을 때, 사랑은 차갑게 식고 변론만 일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른 곳으로 눈 돌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복음 안에 해답이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더욱 더 복음 중심이 되어서 함께 진리 위에 선 교회, 사랑이 풍성한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복음은 율법을 제 자리로 돌려놓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에베소 교회에는 바른 교훈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또 다른 문제가 무엇입니까?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7)

그들은 율법 선생을 자처했습니다. 성도들에게 율법을 제대로 가르쳐 줄 테니 나에게 오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가 가르치려는 내용조차 이해 못한 엉터리 선생들이었습니다.

율법을 가르친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도리어 율법을 반드시 가르쳐야만 합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용된다면 율법은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제정하신 목적을 몰랐다는 점에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받는 줄로 아는데 그건 착각이야.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율법을 잘 지켜 행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거야. 알겠니?” 하지만 착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자격 미달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자기 의를 부수는 강력한 망치와 같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의 죄를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율법을 통해 사람이 자기 죄를 깨닫게 되면, 낮아지고 두려움에 지친 나머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분의 복된 아들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죄인을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율법에 대해 설명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11)


율법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복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의를 부수라고 주신 율법을 가지고 자기 의를 쌓는 수단으로 삼다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똑 같은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율법을 배워서 다른 사람을 향한 비난과 정죄의 도구로 쓰는 것, 율법을 아예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것, 율법만 생각하면서 구원을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 이 모두 다 율법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율법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까? 복음을 제대로 알면 됩니다. 복음을 알아도 대충 피상적으로 알면, 그릇된 가르침에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율법주의와 율법을 송두리째 폐기처분하자는 무(無)율법주의, 이 두 양극단이 계속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러너스 팀 중에 ‘보금복음’ 팀이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복음을 알고 누리고자 하는 소원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지은 것 아니겠습니까? 또 ‘글로리’ 팀도 있습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지은 것 같습니다. 보금복음 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복음으로 시작했으니 복음으로 끝내고자 하는 소원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 곧 the glory of God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복음은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언급했던 바울이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에 대해 말하고 나니 그 복음이 나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생각나고 감격이 밀려와 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과거에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13)

사도행전 8장에서 보듯이 바울은 과거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하고 모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이 땅에서 아예 박멸하는 것을 인생 목적으로 삼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자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짓을 하고도 자기는 의롭고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바울은 계속 이렇게 살다가 주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께서 이런 바울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긍휼을 입은 바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4)

주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게 바울에게 임했습니다. 여기서 넘친다는 표현은 홍수를 연상하게 합니다. 홍수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요즘에는 치수 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어서 좀처럼 홍수가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릴 때는 홍수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한번은 제가 살던 구로동에 큰 비가 내리고 근처 도림천이 범람한 적이 있습니다. 곧 넘친 물이 저지대에 있던 집들을 덮쳤습니다. 저는 자동차가 뒤집힌 채로 물 위에 둥둥 떠내려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넘쳐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를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홍수는 모든 것을 싹 쓸어버렸습니다.

이처럼 넘쳐 흐르는 주님의 은혜가 바울에게 임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은혜의 홍수 앞에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은혜가 바울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그의 과거도 함께 가지고 갔습니다. 이제 바울은 더 이상 비방자도, 박해자도, 폭행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바울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만 해도 차고 넘치는 은혜인데 주님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영광스러운 직분까지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셨습니다.

바울의 삶을 이토록 180도 변화시킨 능력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바로 복음에서 나왔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변화시킨 복음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세상에 이 말보다 더 놀라운 말, 더 아름다운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말만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믿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말입니다.

복음은 바울의 과거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현재도 날마다 순간순간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여전히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괴수라고 하니까 영화에 나오는 괴물이나 거대한 짐승을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서 괴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죄인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입니다. 과거에만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이 가장 큰 죄인이고 가장 악한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이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십니까? 만약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전적으로 이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죄를 깨닫고 그 죄의 심각성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죄를 깨닫게 되었을 때 자연스러운 반응은 다른 사람의 죄와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나의 죄가 너무나 크고 무겁기 때문에 그 어떤 죄인보다 내가 더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할 때 이 고백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 고백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러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6)

죄인 중에 내가 괴수지만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었습니다. 주님께서 왜 죄인의 우두머리에게 긍휼을 베푸십니까? 주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 주님이 얼마나 자비하신지, 주님이 얼마나 긍휼이 많으신지,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아무리 죄가 큰 사람이라도 바울에게 긍휼을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보면 어떨까요? 자기 죄 때문에 주님 앞에 설 자신이 없는 사람이 바울의 삶을 보면 어떨까요? 나도 구원 받을 수 있고, 나도 변화될 수 있다는 소망이 생기고 힘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이런 메시지를 주고자 바울을 구원하시고 사도로 부르신 것입니다.

저 역시 주님의 긍휼을 입은 자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지만 나는 그 무를 창조했다. 그래서 내 이름이 창무다.” 하면서 신성모독을 서슴지 않던 자였습니다. 목자님과 일대일 성경 공부를 시작한 목적이 목자님을 설득해 무신론자로 만드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를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저를 오래 참아 주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목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고등학교 때 저를 전도하려 했던 친구가 이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된 자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너와 나 사이에 벌어진 일이구나” 이런 큰 은혜를 입은 저 역시 바울처럼 다음과 같이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오직 복음만이 사랑을 낳고 율법을 제 자리로 돌려 놓을 수 있으며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할 능력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거짓 가르침이 참된 복음을 위협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지금 자칫하면 다른 교훈이 우리 교회 안에 침투해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18)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했듯이 우리 역시 복음을 지키기 위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일까요? 이단적인 단체 앞에 가서 피켓 시위라도 해야 할까요? 이것은 선한 싸움이 아니라 그냥 싸우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은 참된 복음을 선포하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를 말씀으로 세워주고 악한 영이 우리 교회를 틈타지 못하도록 중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한 우리 교회는 건강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복음을 지키기 위해 선한 싸움을 하는 교회, 복음이 살아있는 건강한 교회, 복음이 낳은 사랑이 샘솟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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