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디모데전서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

이창무 2024. 1. 2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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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디모데전서 제2강 / 이창무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

말씀 / 디모데전서 2:1-15
요절 / 디모데전서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모임’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모임은 단독으로 쓰기보다는 주로 다른 명사와 붙여서 사용합니다. 예를 들자면 ‘기도 모임’, ‘양식 모임’, ‘전도 모임’, ‘팀 모임’ 등등입니다. 그런데 이 ‘모임’이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입니다. 이 말이 바로 신약 성경에서 교회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된 말입니다. 결국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무엇을 해야 할까요? 특히 지금처럼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일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 해답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에서 모일 때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모일 때 해야 할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1)

교회가 함께 모여서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은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입니다. 간구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도고는 남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는 내가 하지만 응답은 다른 사람이 받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감사는 기도의 응답을 받고 나서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단어가 기도입니다.

당시 디모데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기도의 중요성을 잘 몰라서 바울이 이렇게 권면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곳이라는 정도의 개념은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누구를 위하여 어디까지 기도하느냐’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가서 보니 에베소 교회는 예배 드릴 때 자기 교회 중심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 제목표에는 전부 다 에베소 교회 사람들 이야기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만 하지 말고 이제부터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기도 제목만으로도 충분한데, 모든 사람이라니!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는 권면이 아닐까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은 모든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빠트리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도 이렇게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기도가 모든 사람을 향하여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 짬뽕, 볶음밥, 울면, 기스면 등 정말 많은 음식들이 있습니다. 이 중에 이것만 주문해야 한다는 제한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음식을 다 주문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불러 더 이상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에 대상의 제한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가진 한계 때문에 선택과 집중을 할 뿐입니다.

현재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당시 에베소 교회처럼 자기를 중심에 두고 자기를 위해서만 기도하기 쉽습니다. 나의 삶, 나의 일, 나의 책임에 대해서는 기도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팀 식구들, 특별히 내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칠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 기도를 할 때 ‘이 사람은 난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인데 왜 꼭 기도를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우리를 본다면 기도의 폭이 좁아도 너무 좁다고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너희가 드리는 기도의 범위를 훨씬 더 넓혀서 기도하라. 좁아 터진 너희 마음을 찢어 잘 모르는 사람,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품에 품고 기도하라’고 충고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전 세계에는 기후 위기, 빈부 격차, 국가 간 분쟁 등등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 긴급한 현안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에 평화를 위해 꾸준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이 시대에도 미전도종족이 아직 남아 있고,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선교가 금지된 지역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회교권이나 북한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파송한 선교사님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더 나아가 이 지역에도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릴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UBF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를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무너지는데, 우리만 잘 될 수는 없습니다. 이미 한 배를 타고 있는 운명 공동체라는 점을 인식하고 한국 교회가 복음 진리 위에 우뚝 서고 이 땅 가운데 그리스도의 계절이 다시 오도록 기도합시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기도해야 할 모든 사람 중에 한 부류의 사람을 특별히 콕 집어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2a)

바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바울의 명령을 들었을 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가 누구입니까?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네로 황제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로마의 대화재를 그리스도인들이 한 일로 뒤집어 씌우고 엄청난 박해와 폭정을 일삼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라고 하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기도해야 합니까?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2b)

우리가 위에 있는 권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목적은 결코 특정 정당이나 정치 지도자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입니다.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있어야 우리가 내면의 경건함과 외면의 단정한 생활이라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제기역에서 전경에게 붙잡혀 결국 예배를 드리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일 고대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반정부 시위 때문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그런 행사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저는 아버지 양복을 빌려 입고 007 가방을 들고 예배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경찰도 저를 잡지 않았습니다. 목자님들은 ‘웬일로 양복을 입고 왔냐?’며 이 형제에게 드디어 주님을 향한 경외심이 생겼다며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이처럼 정치가 불안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우면 예배와 같은 기본적인 것조차 유지하기 힘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정자들이 정치를 잘 해서 우리를 전쟁이나 경제 위기로부터 보호하고 평화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또다른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3,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 중심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을 위하여 드리는 중보 기도를 선하게 여기시고 기뻐 받으십니다. 왜 주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아 영생 얻기를 바라시는 그 마음, 그 열정!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하는 중보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영혼 구원을 위해 꾸준히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와 아예 하나님이 없다 하는 무신론자입니다. 또 다른 부류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는 유대교나 이슬람교 신자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진리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5,6)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계시다는 진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시며,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라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들에게 이 진리를 전파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이 일을 수행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7)

가장 먼저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가 받았던 사명은 오늘날 바로 우리 교회까지 계승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도 바울처럼 선교사가 되어 이방인의 스승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또 현재 우리들은 비록 직접 나가서 전하지 못해도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하는 역할로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선교지를 지원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로 지원하는 것입니다. 많은 선교사님들이 안암1부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힘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느끼시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도와 세계 선교를 위한 우리의 기도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그날까지 우리가 이 기도를 쉬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교회에서 모일 때 남자들은 싸우지 말고 기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8)

남자들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분노와 다툼이 많다는 것입니다. 제 남고 시절을 회상해 보아도 반에서 단 하루도 싸움이 벌어지지 않은 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남자들은 걸핏하면 소리를 지르고 멱살을 잡기 일쑤입니다. 대개 남자들이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본능과 승부욕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교회에 와서도 이런 식으로 싸움을 벌이려는 남자들이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혈기를 부리는 것을 남자다운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교회에서 모일 때 분노하는 모습이나 다투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대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남자들이 손을 들면 무섭습니다. 또 누군가를 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겁이 덜컥 납니다. 그러나 진짜 남자는 손을 들어 다른 사람을 때리지 않습니다. 손을 들어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남자가 남자다운 남자, 멋진 남자, 상 남자입니다. 사소한 일로 자꾸 다투고 싸우는 남자는 자신의 미성숙함을 드러내는 찌질한 남자일 뿐입니다.

셋째로, 교회에서 모일 때 여자들은 외모보다 선행으로 자신을 단장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9,10)

남자들이 힘을 추구한다면, 대개 여자들은 미모를 추구합니다.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여자가 자신을 단장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긍정합니다. 문제는 ‘무엇으로 단장하려고 하는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싸지 않아도 깔끔한 옷, 과하지 않고 은은한 화장과 단정한 헤어 스타일로 자신을 단장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는 단장하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아무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은 땋은 머리가 왜 문제가 될까요? 그 이유는 땋은 머리가 당시 에베소에서 주로 매춘부들이 하는 헤어스타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여자가 땋은 머리를 한 채 에베소 교회의 예배에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요? 남자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그 여자를 쳐다보느라 예배에 집중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땋은 머리로 단장하지 말라는 말은 오늘날로 치면 야한 옷을 입고 모임에 오지 말라는 뜻 정도가 될 것입니다. 금과 진주와 값진 옷은 왜 문제가 될까요? 내 돈 주고 내가 산 옷과 장신구로 치장을 하겠다는데 왜 안 된다는 것일까요? 이것은 성도들 사이에 계층 간 위화감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가난한 성도들이 위축이 되고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여자를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외모나 걸치고 있는 옷이나 장신구가 아닙니다. 바울은 오직 선행으로 자신을 단장하라고 말합니다. 여자의 아름다움을 결정짓는 것은 외모보다 그녀의 행동입니다. 아무리 예쁘고 멋인 옷을 입고 자신을 아름답게 꾸몄다 하더라도 그 입에서 더러운 욕이 줄줄 나온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누가 이 여자를 향해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칭송해 주겠습니까? 아무리 화려한 외모를 자랑한다 하더라도 행실이 영 네 가지가 없다면 자신을 단장하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육체적인 아름다움보다 내면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 여자를 가장 아름답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을 통해 교회에 모일 때 남자와 여자가 각각 무엇을 주의하고 무엇에 힘써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남자는 분노와 다툼을 주의하고 손을 들어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여자는 화려한 외모를 꾸미려는 것을 지양하고 선행으로 자신을 단장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에게 하는 말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힘과 아름다움이 아니라 속에서 만들어진 힘과 아름다움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이런 내면의 힘과 아름다움은 마치 장인이 만든 도자기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으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에서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매력을 발산하게 됩니다. 꽃미남이 아니어도 값비싼 명품을 들지 않아도 ‘이 사람 참 멋진 사람이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사실상 사도 바울은 꼭 해야 할 말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가 처해있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여자에 대해서 추가로 몇 가지 말을 덧붙입니다. 에베소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고 그곳에는 수천명의 여사제들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여인들에게 여신 숭배를 통해 스며든 이방신의 헛된 교리와 음란한 문화가 몸에 배여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예수님의 참된 복음을 배우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교적인 가르침과 문화가 아직 복음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 여자들을 통해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달리 남녀를 차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여자들은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교회를 자신들의 뜻대로 좌지우지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11,12)

바울이 여기서 조용히 하도록 훈계하는 여자들은 아직 복음을 잘 모르고 아직도 에베소의 우상숭배 문화의 때를 다 벗지 못한 여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여자들에게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역할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바울은 창세기 2장과 3장이 떠올라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13,14)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으나 아담이 혼자 있음에 하나님께서 여자를 돕는 베필로 지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의 장점을 존중하고 세워주며 또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주는 관계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거짓말에 하와가 속았고 하와를 통해 아담이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이 꼭 당시의 에베소 교회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 결과 남자와 여자 사이에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의 관계가 무너지고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는 다툼과 관계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으로 끝장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15)

‘그러나’가 있습니다. 여자들이 정숙하고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회복하면 반전이 일어납니다.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고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결국 남자는 다 여자 하기 나름이구나 하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겉으로는 남자가 앞장서서 주도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를 죄에 빠지게 할 수도, 구원을 얻게 할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여자입니다. 여자가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남자에 대해서는 딱 한 절만 쓰고 여자에 대해서는 일곱 절이나 쓴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인 이유가 남자와 여자가 편을 갈라 서로 싸우기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각자 자기의 힘과 미모를 과시하기 위해서 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동역하며 섬기는 가운데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기 위해 모입니다.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합심하여 기도하기 위해 모입니다. 우리 교회가 손을 들어 기도하는 멋진 남자들과 선행으로 자신을 단장하는 아름다운 여자들이 모여 아름다운 동역을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성서한국, 세계선교를 위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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