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도서

하나님을 경외하라

이창무 2024. 1. 2.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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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도서 제15강 / 이창무

하나님을 경외하라

말씀 / 전도서 12:9-14
요절 / 전도서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사람들은 흔히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또는 ‘백문이 불여일견’ 즉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격언들이 전하고자 하는 취지에 공감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염려가 생깁니다. “이러다가 자칫 말의 가치를 지나치게 폄하해 버리는 것은 않을까?” 어떤 행동이나 모습이 있더라도 이것이 말로 해석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전달해 줄 수 없습니다. 만약 말의 경이로운 힘이 없다면 우리 삶은 공허해지고 우리들의 관계는 황폐해질 것입니다.

말은 많은 일을 합니다. 말은 사람을 울게 만들 수도 있고, 웃게 만들 수도 있고, 당황하게 만들 수도 있고, 화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말은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치유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말은 무기이면서 동시에 포도주입니다. 결혼식에는 주례사, 피로연, 폐백 등 많은 순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이라이트를 꼽자면 바로 신랑신부의 서약입니다. “서약합니다”라는 말 한 마디로 신랑신부 두 사람의 삶을 영원히 변화시킵니다. 두 사람이 말로 한 약속은 결혼을 묘사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결혼 자체를 창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말씀을 통해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탄생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라는 저명한 신학자는 ‘말씀은 곧 사건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공허한 울림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사건을 일으킵니다.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삶에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전도서는 그동안 우리에게 수많은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오늘 전도서는 새로운 말씀을 주려 하기보다는 마지막으로 말씀 그 자체를 탐구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오늘 전도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말씀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말씀으로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입니다.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9a)

전도자는 어떤 사람인가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그는 지혜자였습니다.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전도자 만한 인생에 대한 통찰력과 지혜를 보여준 사람이 드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세상과 격리된 채 책 속에 파묻힌 사람, 상아탑의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지혜를 활용하여 다른 사람을 지혜롭게 하고자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말씀을 부지런히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성경 선생이었습니다. 이런 전도자가 말씀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전도자는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며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습니다.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9b)

이 구절은 표준 새번역이 더 적절한 번역인 것 같습니다. “그는 많은 잠언을 찾아내서 연구하고 정리하였다”

전도자는 자신 안에 지혜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해 주신 지혜의 말씀들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했습니다. 각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앞뒤 맥락 속에서 한 문장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세심하게 살폈습니다. 또한 성경이 쓰여진 시대 배경을 알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고, 수요 특강에 나와서 ‘신구약 중간사’를 듣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이렇게 수집한 것들을 적절히 배치하고 순서를 매기고 목차를 만들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두었습니다. 어느새 전도자의 노트북 하드 드라이브 안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폴더별로 말씀 공부 노트와 소감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습니다. 전도자는 이것을 가리며 ‘나의 보물 창고’라고 불렀습니다.

둘째로, 전도자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말을 찾으려고 힘썼습니다.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10a)

우리나라 속담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보물을 다른 사람에게 잘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그 보물을 엮어 줄 수단이 필요합니다. 전도자에게는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름다운 말이란 듣는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말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들을 때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말에 조리가 있고 재치가 있고 그 표현이 아름다울 때입니다. 이런 말은 듣는 사람을 그 말 속으로 빨아들이는 힘이 있습니다.

전도자가 왜 힘써 이런 아름다운 말들을 구했을까요? 그것은 백성들에게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무리 좋은 콘텐츠가 담겨져 있다 하더라도 말씀이 무미건조하고 중구난방이면 어떻겠습니까? 듣는 사람이 다 졸거나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때로는 기가 막힌 비유로, 때로는 예화로, 때로는 짧은 경구로, 때로는 자신의 체험담으로 다채롭게 지혜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셋째로, 전도자는 진리의 말씀을 정직하게 기록했습니다.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10b)

아무리 말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 말 속에 진리가 담겨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들을 때는 재미 있게 잘 듣고 나서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회사 생활할 때 회식 자리에서 서너 시간을 낄낄거리며 대화를 했는데 다음날 하나도 생각나는 것이 없을 때 이런 일들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말을 아름답게 할 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묵직한 주제를 담아서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듣고 나면 마치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고 배부른 것처럼 영혼에 만족이 있었습니다. 또한 전도자는 정직하게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이 듣기에 부담스러운 말씀이라고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말씀을 왜곡하거나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늘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우리 UBF 교회가 다른 교회와 차별화되는 점이 무엇일까요? 많은 것이 있겠지만, 두드러지는 것이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너무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기지만, 일반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목회자만의 고유 권한으로 여겨집니다. 모든 사람이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강단에서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보면 우리에게만 주어진 이례적인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특권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함께 따라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일까요? 오늘 전도서가 우리에게 잘 알려 준 대로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 듣는 사람을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말을 찾는 것, 진리의 말씀을 정직하게 들려주는 것, 이 세 가지입니다. 아직은 여러 면에서 다 부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잘 배우면 누구나 최고의 성경 선생, 21세기의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가진 성경 선생으로서 역량을 좀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말씀을 세상에 나누어 주는 복의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말씀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입니다.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11)

앞에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말씀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 서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선생이 가르쳐 준 말씀을 귀 기울여 잘 듣는다면 이것이 듣는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전도서는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될 때 두 가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말씀은 찌르는 채찍과 같이 우리를 인도합니다.

여기서 채찍은 목자가 가축을 인도할 때 쓰는 끝이 뾰족한 채찍을 가리킵니다. 왜 목자가 이런 채찍을 들고 있을까요? 가축을 괴롭히고 못살게 하기 위해서 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찌르는 채찍은 잘못된 길로 가는 가축을 옳은 길로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 필요합니다. 만약 가축이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데 낭떠러지가 있는 왼쪽으로 가려 한다면 목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채찍을 휘둘러 왼쪽을 아프게 합니다. 그러면 가축은 ‘아이쿠!’ 하면서 오른쪽으로 몸의 방향을 틀 것입니다. 가축이 아픔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목자가 원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때로는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우리가 착각과 환상에 빠져 있을 때 말씀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진실을 보게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너무 괴롭습니다. 불순종의 길, 죄의 길에 빠져 있을 때 말씀은 죽었던 우리 양심을 되살려 놓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너무 아픕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날카로워서 마치 우리의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처럼 다가옵니다(히4:12).

‘말씀이 은혜와 감동이 되어야지 왜 꼭 나를 아프게 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아픔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평생을 동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아픔입니다. 우리는 양 같아서 제 갈 길을 알지 못합니다. 때로는 엉뚱한 길에서 헤매거나, 때로는 멸망의 길을 향해 제 발로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자의 날카로운 채찍이 필요합니다. 우리 영혼을 콕콕 찔러 아프게 하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말씀은 잘 박힌 못과 같이 우리를 붙들어 줍니다.

여기서 못은 천막을 고정시키는 말뚝을 가리킵니다. 천막을 쳐 보셨습니까? 실제로 해 보면 생각보다 말뚝을 박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박을 적절한 위치를 찾는 것도 어렵고 망치질도 어렵습니다. 잘못 박으면 한 순간에 천막이 우르르 무너지는 불상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실제로 제가 군대에서 비바람이 치던 날 밤에 그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할 수 없이 분대원 모두가 트럭 위에 올라가 판초 우의를 뒤집어쓰고 하루 밤을 꼬박 샌 적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비바람이 몰아칠 때가 있습니다. 실패 때문에 찾아오는 절망의 비바람, 관계성의 파괴에서 불어오는 독한 바람, 의심의 광풍이 거세게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인생의 비바람을 맞설 힘이 없습니다. 여차하는 순간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날아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은 잘 박힌 못과 같이 우리를 붙들어 줍니다. 비록 밖에는 거센 비바람이 몰아친다 해도 말씀이 박힌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말씀이 우리에게 버틸 힘을 제공합니다. 그 결과 말씀은 예수님의 약속대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그러면 찌르는 채찍 같이 우리를 인도하고 잘 박힌 못처럼 우리를 붙들어 주는 말씀은 누구에게서 온 것입니까? 전도서는 이 말씀이 가르친 사람은 여러 명이라도 모두 다 한 목자에게서 왔다고 말합니다. 한 목자가 누구일까요? 다 짐작하시는 대로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목자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온 말씀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네비게이션이고 안전벨트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는 신년 말씀을 시작으로 많은 말씀을 배웠습니다. 누가복음, 사사기, 룻기, 전도서 말씀을 집밥처럼 꾸준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특식 같은 특강 말씀과 수양회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 중에 어떤 말씀은 찌르는 채찍처럼 다가왔습니다. 나의 죄악을 발견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말씀은 잘 박힌 못처럼 다가왔습니다. 흔들리던 내 마음을 붙들어 주고 나의 심령에 새로운 믿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오늘 예배 후 팀 모임을 할 때 올 한 해 동안 들은 말씀 중에 나를 아프게 했던 말씀 한 가지, 나를 붙들어 주었던 말씀 한 가지 이렇게 서로 나누어 보면 어떨까요? 이렇게 나누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말씀을 통해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알게 되지 않을까요? 지난 한 해 다양한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붙들어 주신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셋째로, ‘말씀으로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입니다.

앞에서 말씀이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보았습니다. 이런 변화의 끝자락에 맺혀야 할 열매가 무엇일까요? 전도서는 그 열매를 말하기에 앞서 열매 맺기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12)

전도서는 많은 책들을 짓고 많이 공부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조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책을 쓰고 공부하는 것은 좋은 일 아닙니까? 왜 이것을 조심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물론 책을 쓰고 공부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앞에 ‘많은’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다는 것은 적정선을 넘어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최대 서점인 교보문고의 베스트 셀러가 무엇일까요? 1위는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이고 3위에도 쇼펜하우어의 책이 올라와 있습니다. 왜 뜬금없이 쇼펜하우어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쇼펜하우어는 힌두교와 불교에 심취한 무신론자였고, 후대의 니체에게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입니다. 이외에도 심리학, 미래학, 처세술 책이 베스트 셀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이들 안에 하나님이 없고 말씀도 없다는 점입니다. 이런 책들을 너무 많이 읽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요? 도움이 되기는 커녕 나도 모르게 점점 더 하나님 없는 세계관, 인생관에 물들어 가지는 않을까요? 이런 말, 저런 말에 휘둘리며 오락가락 갈팡질팡하는 인생을 살게 될 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이면 인생에 잔가지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기 쉽습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우리에게 지나치게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조심하도록 조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포도나무 가지에 비유하시며 ‘너희가 극상품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나의 말에 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최고의 열매가 무엇일까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13-14)

최고의 열매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전도서를 비롯해서 모든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해 줍니다. 우리가 참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거기에 경외감을 느끼듯이 압도적으로 위대하신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경외심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분의 명령에 불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우리가 맺게 될 가장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전도서는 이것을 모든 사람의 본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순종의 열매 맺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판단하시는 기준이 됩니다. 겉으로만 순종하는 척하며 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켰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그날이 속속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날에 대답한 말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전도서는 해 아래 망가진 세상 속에서 인생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깨닫으라고 했습니다. 또 다가올 노년과 죽음을 대비하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마지막 구절을 통해서 전도서는 우리에게 참된 지혜, 지혜 중의 최고의 지혜가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 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 뵈었을 때 대답할 말을 준비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날에 다른 모든 것은 다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 삶만이 남을 것입니다.

오늘은 2023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지난 한 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남겼나요? 나름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여전히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새해가 시작됩니다. 새해에는 많이 남는 흑자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열매를 맺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에 두려워 떨며 그 말씀에 운명을 거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새해 말씀이 곧 사건이 되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일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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