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도서

즐겁게 살아가기

이창무 2023. 11. 26.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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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도서 제11강 / 이창무

즐겁게 살아가기

말씀 / 전도서 9:1-12 
요절 / 전도서 9: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독일의 전통과자 중에 ‘슈니발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0여년 전 한때 우리나라에서 나름 고급 디저트로 큰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과자의 특징은 겉에 단단한 껍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망치로 깨부순 후에 안에 있는 달콤한 내용물을 즐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과자의 별명이 ‘망치로 깨 먹는 과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삶을 통제할 수 있고 내가 내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이런 생각이 단단한 껍질처럼 그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오늘 전도자는 두 번의 망치를 듭니다. 한 번은 인생에서 불확실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보여주고, 다른 한 번은 인생에서 확실한 것 한 가지를 보여줍니다. 이 망치에 얻어맞으면 좀 아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깨어진 곳에서 달콤한 지혜가 흘러나오는 것을 또한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망치로 깨 먹는 과자인 슈니발렌 같은 전도서의 지혜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인생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고 불확실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1)

전도자는 먼저 내가 나의 삶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망치로 사정없이 깨부숩니다. 내가 앞으로 인생에서 사랑을 받게 될 지 미움을 받게 될 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어떻게 하든 통제해 보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은 손가락 빠져나가는 모래 알갱이들처럼 아무런 소용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내 인생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낱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 인생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11)

전도자는 우리 인생이 얼마나 불확실성이 높은 지 몇 가지 사례를 듭니다. 달리기 경주는 십중팔구 빠른 사람에게 유리하고, 싸움은 강자에게 유리합니다. 총명한 사람이 보통 높은 연봉을 받은 좋은 일자리를 얻고, 학력이 높은 사람이 대개 기회를 얻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1등을 달리던 경주자가 골인점을 앞두고 넘어지기도 하고, 군사 대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게 쩔쩔매기도 합니다. 제 고등학교 동문들을 보면 의외로 공부 잘 하던 친구들이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왜 이럴까요? 전도자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기와 기회는 예상치 못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한가롭게 헤엄치던 물고기에 난데없이 어부의 그물이 덮치듯이 언제 어디서 사고가 일어날 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에게나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재난이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찾아와 삶이 뒤집히기 일쑤입니다. “한 방에 훅 간다”는 말처럼 정말 해 아래에서 한 사건이 내가 세워놓은 모든 계획을 전부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신약에서 야고보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둘째로,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모두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3)

앞에서 우리 인생에는 불확실한 것들이 너무 많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 가운데 확실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어제보다 오늘 죽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멋진 사람이든 끔찍한 사람이든,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모두 다 마지막에 땅 속으로 들어갑니다.

전도자는 이것이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죽음 그 자체가 악하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죽음이 작동하는 방식 역시 악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죽음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다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나이는 저와 같지만 생일이 저보다 빨라서 제가 늘 누나라고 부르던 사촌 ‘미애’ 누나가 있었습니다. 이 누나는 지금까지 제가 만나 본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를 너무 잘 챙겨줘서 제가 자연스럽게 누나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때 백혈병에 걸려서 중학생이 되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린 저는 도무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한 동안 이것은 너무 부당하다는 느낌과 함께 “왜 미애 누나가?”라는 질문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자기 마음대로 아무나 데려가는 거친 폭군이고 ‘공정함 따위는 개나 주라’는 식으로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과연 죽음이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부당하고 악한 것이 맞을까요? 도대체 의인과 악인을 가르는 기준선을 어디에 놓아야 공정할까요? 사실 우리가 의인이다 악인이다 말하는 것은 전부 다 상대적인 비교입니다. 저 사람보다는 이 사람이 더 착하고 의롭다는 것일 뿐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판단합니다. 그 사람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상대 평가를 하지 말고 절대 평가를 할 때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전도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라” 사람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합니다. 사람은 미친 마음 곧 비정상적이고 병든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첫 사람 아담부터 자신의 창조주 하나님께 반역하려는 악한 마음이 가득했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려 했습니다. 이것이 미친 마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 결과는 하나님이 경고하셨던 대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어다” 하는 사망 선고였습니다. 결국 죽음이 모든 인생을 지배하게 된 이유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이 세상이 타락한 세상이요 망가진 곳이고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그 중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바뀌게 됩니다. 그 질문은 바로 ‘왜 하나님이 이토록 죄 많은 세상을 당장에 멸망시키지 않으시는가?’ 입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왜 당장에 죽이지 않으셨나요? 왜 한참을 더 살게 하셨나요? 이것은 부당한 것 아닌가요? 굳이 그 이유를 찾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놀랄 일이 있다면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4)

전도자는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은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기회를 우리 손에 쥐고 있다는 말입니다. 죽으면 사랑과 미움과 질투와 같은 강렬한 모든 감정이 죄다 차갑게 식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곧 찾아오고 누구도 우리를 찾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사랑도 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성공을 해서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고, 실패를 통해서 배우고 성장하기도 합니다. 매일 지지고 볶고 문제가 끊일 날이 없지만 이리저리 꿈틀거리며 사는 것 자체가 죽은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입니다. 그래서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루 또 하루 이어지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삶이란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 덕분입니다. 우리는 이것 하나만으로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차고도 넘칩니다.

우리에게 확실한 미래인 죽음을 잘 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정 사진을 미리 찍어 놓고 상복도 맞추고 생명 보험에 가입해 놓는 것일까요? 이런 준비도 필요할 수 있지만 훨씬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삶의 소중함을 알고 매일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우리 인생에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그 기회를 그냥 헛되이 흘려 보내지 않고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인생에서 지혜의 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즐기는 것입니다.

한편에서 볼 때 나의 죽음은 확실합니다. 다른 한편, 내 죽음의 시점은 불확실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의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어떤 삶을 살아야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최대한 선용할 수 있을까요? 전도자는 이에 대한 대답을 네 가지로 들려줍니다.

첫째, 기쁨으로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마시라고 합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7)

전도자는 먼저 가라고 합니다. ‘귀차니즘에 빠져서 가만히 앉아 있지만 말라. 할 수 있는 한 기회를 만들라.’는 뜻입니다. 어떤 기회입니까? 기쁨으로 음식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실 기회입니다. 이 말은 얼핏 보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검투사들의 표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와 닮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근거가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쁘게 먹고 즐겁게 마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종종 집에서 요리를 합니다. 딸들의 일치된 평가가 ‘엄마보다 아빠가 더 요리를 잘 한다’ 입니다. 제가 요리를 하는 이유는 제가 만든 음식을 가족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즐겁게 먹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음식과 음료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우리가 그분이 주신 선물을 받아 누리고 즐거워할 때 그분께서 크게 기뻐하십니다.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신실하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고 다양한 음식으로 즐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둘째,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고 합니다.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8)

이스라엘 사람들은 슬플 때는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썼습니다.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모습입니다. 반면 기쁠 때는 흰 옷을 입고 머리에 향기 나는 기름을 발랐습니다. 생기가 넘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세상에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까요? 우울하고 축 처진 모습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자기 관리도 필요합니다. 외모 관리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자기 관리는 표정 관리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고 감사해면 표정 관리는 저절로 됩니다. 우리 모두 밝은 표정, 유쾌한 얼굴로 주의를 밝게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배우자와 즐겁게 살라고 합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9)

가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 어떤 선물보다도 귀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합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기도 하고 육아와 가사에 힘을 쓰기도 합니다. 이것도 중요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배우자와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배우자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부인을 해서라도 자기 부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너무 바빠서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없다면 바빠도 너무 지나치게 바쁜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나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나아가 서로에게 한 해 동안 고마웠다고 감사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넷째, 힘을 다하여 일을 하라고 합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10)

전도자의 마지막 조언은 기회가 닿는 대로 힘을 다해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죽으면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기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하라고 하면 힘든 것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일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이며 특권입니다. 우리는 일을 통해서 보람을 얻고 성장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기회를 얻습니다.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직업을 통해서 세상을 섬길 기회를 주시고 또한 사명을 통해서 교회를 섬길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전도자의 조언 가운데 거창하고 특별한 일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같이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잘 누리라는 조언입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역대급으로 획기적인 일만이 감사 제목은 아닙니다. 당연한 줄 알았으나 사실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감사절의 진정한 의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세대 통합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JBF와 러너스와 학사회 대표분들에게 각각 2023년 감사 제목을 말씀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어떤 감사 제목이 있을까요?

먼저 JBF의 감사 제목부터 보겠습니다. JBF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한 해 동안 JBF의 키와 지혜가 쑥쑥 자라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중1 여섯 명이 새 식구가 되어 감사합니다. 둘째로 JBF가 주인이 되어 예배를 섬긴 것에 감사합니다. 찬양단, 반주자, 온라인 방송, 사회, 대표기도까지 JBF가 충성스럽게 섬긴 덕분에 예배가 이루어졌습니다. 셋째로 공부에 스트레스 받고 피곤한 고등학생들이 예배에 참여한 것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심지어 먼 곳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와서 예배를 드린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넷째로, 깨알 같은 글씨로 감사제목과 기도제목을 적어내는 예배자들로 인해 감사합니다. 다섯째로, JBF가 말씀을 들으며 영적 가치관이 생기고 믿음이 자라고 있음을 인해 감사합니다. JBF가 붙여 놓은 포스트잇 중에 “말씀의 맛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감사 제목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섯째로, 한 해 동안 김모세, 이예찬, 류하나, 이혜원 선생님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일곱째로 일박 이일로 JBF 여름 수양회를 가게 되어 감사합니다. 아무 사고 없이 풍성한 말씀과 교제가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다음 러너스의 감사 제목입니다. 첫째로 2월에 9명의 러너스 형제 자매들을 새로운 목자로 세워 주심에 감사합니다. 둘째로, 노이삭, 이화목, 양세한 형제님들이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러너스 품으로 건강하게 돌아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셋째로, 여름수양회에 다섯 명의 러너스 목자님들을 메신저로 세워주시고 은혜 주심에 감사합니다. 넷째로, 여름에 해외에서 많은 선교사 2세들이 찾아와 러너스와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다섯째로, 김하영 목자님이 안아브라함 선교사님과 결혼하고 선교사로 나가게 되어 감사합니다. 여섯째로 러너스가 자체적으로 가을 수양회를 잘 다녀오고 무엇보다 말씀 안에서 깊은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갖게 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로 러너스 역사를 성실하게 섬겨주시는 목자님들, 회장단, 리더들을 세워 주심에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학사회의 감사 제목입니다. 첫째로 누가복음, 사사기, 룻기, 전도서 말씀과 여러 특강 말씀을 통해서 단비와 같은 말씀의 은혜로 심령을 소생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째로, 수요 예배를 통해 구약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하시고 수요 특강을 통해 알찬 배움의 시간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셋째로, 여름 수양회를 통해 죄를 이기는 복음의 능력을 알게 하시고 죄와 싸워 승리하는 신앙 생활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심에 감사합니다. 넷째로 봄 수양회를 통해 체육 대회도 하고 레크레이션도 하면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다섯째로, 학사들을 위한 ‘내 영혼의 힐링 콘서트’를 통해 고향에 온 듯한 푸근함과 행복감을 누리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여섯째로 팀별 가을 수양회를 통해 전도서 말씀처럼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가운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곱째로 하나님께서 학사 목자님들과 그 가정 가운데 목자가 되어 인도해 주시고 많은 사건들 가운데 보호해 주시고 날마다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한 해 동안 감사할 일이 너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 덕분에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헤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비록 죽음의 운명이 점점 더 다가온다 할지라도 충분히 즐거워할 이유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음 이후 영생을 누리게 될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선물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의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 즐거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베푸신 주님의 선물에 깊이 감사하며 또 내년 추수감사절이 오기까지 기쁨과 즐거움으로 한 해를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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