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도서

지혜롭게 살아가기

이창무 2023. 11. 1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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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도서 제10강 / 이창무

지혜롭게 살아가기

말씀 / 전도서 8:1-15
요절 / 전도서 8:1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흔히들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친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이야기할 때 피해야 할 주제가 두 개가 있다. 바로 정치와 종교 이야기이다.” 왜 그렇겠습니까? 워낙 민감하기도 하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격해지면 자칫 싸움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무작정 외면만 할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정치와 종교는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정치라는 영역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대처해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정부와 위정자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단순한 대답을 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실 상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소말리아 같은 나라와 비교해 본다면 우리 나라 정부의 수준은 아주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권력이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서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전세계 가운데 코로나 팬데믹을 가장 모범적으로 방어한 국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가까이 있는 북한처럼 독재자가 장기집권을 하는 국가도 아닙니다. 한 사람을 향해 ‘총통 각하’나 ‘수령님’으로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평화로운 정권 교체가 안착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정당이 집권을 하든 흠결이 있는 집권자와 잘못된 제도로 인한 괴로움을 겪고 있기도 합니다. 어떤 지도자는 성경적인 가치관에 역행하는 정책을 시행하려고 하고, 어떤 지도자는 무능하거나 지나치게 권위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가 쌓이고 더 나아가 정치 자체에 대한 혐오감이 생기곤 합니다. 2020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중에 75%가 정치에 불만족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정치라는 단어만 들어도 얼굴이 어두워지고 사나운 얼굴로 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1)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혜는 어두웠던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지혜는 얼굴의 사나운 것을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으로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있다면 이 불의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큰 해를 입지 않고 평안하게 살아갈 가능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해서 인생의 미로를 헤맬 때가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전도자는 지혜의 빛 아래서 다음과 세 가지 조언을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합니다.

첫째로, ‘권위에 복종하라’ 입니다.

오늘 전도자가 다루고 있는 위정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다 행합니다(3). 아무도 왕이 하는 일에 대해서 토를 달 수 없습니다(4). 이 왕은 강력한 힘과 권위를 가진 전제 군주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반면에 오늘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들은 삼권 분립을 통해서 위정자의 권력을 견제할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이상일 뿐 현실에서는 다르게 동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 우리 나라만 해도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합니다. 대통령이 하고자 하면 막기 어렵고 그에게 조언이나 바른 말 하는 것이 별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꼭 대통령이 아니라 해도 우리는 살면서 곳곳에서 소통령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회사의 사장님이 있습니다. 사장님이 하려는 것을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사장의 말은 회사 안에서는 곧 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대학원에 가면 ‘교수님’이라는 왕이 계십니다. 교수님에게 찍히면 학위는 물 건너 갈 수 있기 때문에 대학원생들은 그분 앞에서 다들 전전긍긍해 합니다. 축구 경기만 해도 심판이 왕입니다. 심판이 ‘오프사이드’라고 하면 ‘오프사이드’인 것이고 ‘페널티 킥’이라면 ‘페널티 킥’입니다. 그래서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나도 생각이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좌절감과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 결과 모든 걸 확 뒤집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혁명이나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최선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우리에게 전도자는 다음과 같이 조언합니다.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2-3a)

전도자는 먼저 왕의 명령을 지키라고 조언합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왕이 명령한 것은 따르고 순종하는 태도를 갖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왕 앞에서 기본적인 예의와 신중함을 갖추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왕에 대한 반역을 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위에 있는 권위에 이렇게 복종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수시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억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께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겠다고 맹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 자신의 대리인으로 위정자를 세워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여러 가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통해서 질서가 유지되게 하시고 자신의 섭리를 이 땅 가운데 펼쳐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신과 감사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고 말씀하심으로 정부를 존중하는 것과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함께 간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불행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5a)

축구 선수가 심판 면전에서 소리 지르며 항의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사자는 퇴장을 당하고 그 팀은 패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항에서 세관원에게 핏대를 세우며 따지면 어떻게 될까요? 몇 시간 동안 잡혀서 모든 짐을 샅샅이 수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직원이 냉정을 잃고 사장에게 욕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장 해고를 당하기 쉬울 것입니다. 모두 다 자기 자신을 쓸 데 없이 불행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나 전도자의 조언과 충고대로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하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 일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이유는 모든 통치자 위에서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7)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사람 중에는 위정자들과 통치자들도 당연히 포함이 됩니다. 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왕이라 할지라도 자기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당장 오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다가 내일 죽을 지 모릅니다. 그러면 누가 장래 일을 알고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왕들 위에 진짜 왕이신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권력자들이 잘못하고 있다면 그에게 권세를 위임하신 하나님께서 마냥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실 것입니다. 사울 왕도 아합 왕도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권력자들에 대한 심판을 그들보다 더 위에 계신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궁극적인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실 터이니 우리는 우리의 의무와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는 때로 윗사람 때문에 답답하고 화가 나고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설령 그렇다가 할지라도 내 감정만 앞세우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전도자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위에 있는 권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임을 인정하고 그 권위에 존중하고 따르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라’ 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위에 있는 권세는 이 땅의 질서 유지와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을 보았습니다. 권세자가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한 그의 권력은 정당성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당한 권위는 존중을 받고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권력자가 한 번 권력을 쥐게 되면 그 힘으로 선한 일을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악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악한 일입니까?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9)

바로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일입니다. 앞의 사람은 권력자를 뜻하고 뒤의 사람은 힘 없는 시민들을 가리킵니다. 권력자가 힘 없는 시민들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거나 심지어는 잔혹한 학살극을 벌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우리 나라 근현대사에도 이런 비극적인 사건들이 적지 않게 벌어졌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지구촌 어디선가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게 됩니까?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11)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권력자들이 처음에는 조심을 합니다. 그러다가 한 번 선을 넘는 행동을 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 다음부터는 담대함이 생겨서 함부로 마구 선을 넘게 됩니다. 악을 행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어지게 됩니다. 폭정을 휘두르다가 결국 국민의 삶을 불행으로 몰아넣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우리는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실까?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 이런 회의와 불신이 들어오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현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시고 저 하늘 위에서 뒷짐만 짓고 계신 것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도 그냥 세상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고 처세술이나 익혀서 내 유익이나 챙겨야겠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정반대의 조언을 합니다.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12b-13)

전도자는 아무리 현실이 우리를 흔들어도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라는 약속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인은 결국 잘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를 줍니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잘 되고 악인이 망하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경험은 때로는 우리에게 정반대의 현실을 목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전도자의 조언은 경험적 관찰만으로 증명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 되고 악인이 망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믿음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만약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면 전도자의 믿음은 억지 주장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빛 아래서 이 말씀은 새로운 조명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종류의 부활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을 행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장차 이와 같은 두 종류의 부활이 있을 것임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도 삶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 복종하되 혹시 그들이 악을 저지르게 된다면 절대로 그 악에 동참해서는 안 됩니다. 권력자들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를 끼치는 일을 하려 든다면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책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정당한 범위를 넘어서 우리의 신앙마저 간섭하고 방해하려고 든다면 분연히 저항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산 좋은 예가 바로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여러 왕조를 거치며 총리로서 제국의 왕들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부인하도록 요구 받을 때는 목숨을 내걸고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왕의 요구가 선을 넘음으로 그 정당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는 잠시 동안 잘 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망할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은 잠시 고난을 겪지만 결국에는 잘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꿋꿋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즐거워하라’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궁극적으로 악에 승리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지금 당장 100% 실현될 일은 아닙니다. 완전한 승리는 먼 미래의 일입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어떤 현실을 목도할 수밖에 없습니까?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14)

우리는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과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입니까?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세상에서 종종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한 시인을 무척 좋아했었습니다. 그분의 시가 각종 문학상을 휩쓸고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저는 이분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자원하라는 내용의 시를 쓰고 연설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이 다같이 짜고 나를 속인 것 같아서 너무 분했습니다. 한동안 밥맛도 잃고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일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전도자는 다음과 같이 특별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15)

전도자는 희락을 노래합니다. 그는 ‘권세 있는 왕들과 악인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즐겁게 지낼 준비를 합시다’라고 대답합니다. 어찌 보면 마치 동문서답을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물론 희락이 삶의 모든 질문에 대한 완벽한 해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치와 권력 관계를 중심으로 한 복잡다단한 현실을 다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꼭 완벽한 해답을 얻어야만 할까요? 그래야만 즐겁게 살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수능을 망쳤더라도 수능 날 근사한 저녁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직장 상사에게 시달렸더라도 주일 예배 때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힘차게 찬양하고 팀원들과 함께 유쾌하게 팀 모임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희락을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해 아래에서 땀 흘려 수고하는 일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와중에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 우울해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수많은 고민들로 인해 지나치게 심각해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특히 정치적인 이슈에 목숨 걸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후보가 당선되지 않았다고 해서 세상이 당장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싫어하는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해서 그 사람까지 덩달아 미워하는 것은 정말 오버입니다. 정치에 너무 무관심한 것도 문제이지만 정치에 너무 매이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정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내 주위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모여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즐겁고 맛있게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불의하고 어리석고 곳곳에 악이 만연해 있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선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하나님이 비뚤어진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고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지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은혜롭고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때마다 우리에게 선물을 내려 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권세에 복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즐거움을 누림으로 불의하고 위험한 세상을 지혜롭게 헤쳐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한 힘을 힘입어 힘차고 유쾌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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