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도서

고난을 이기며 살아가기

이창무 2023. 10. 2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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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도서 제8강 / 이창무

고난을 이기며 살아가기

말씀 / 전도서 6:10-7:14 
요절 / 전도서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구약 성경에서 ‘고난’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입니까? 여러 사람이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하루 아침에 재산과 자녀를 다 잃었습니다. 몸에 극심한 피부병이 발병하여 종일 기와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득득 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목숨 하나뿐이었습니다.

욥처럼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잃지는 않더라도 우리 삶에도 크고 작은 고난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녀 문제로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런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고난은 항상 나쁜 것, 괴롭고 슬프고 우울한 것일 뿐일까요? 혹시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전도자는 오늘 말씀을 통해 고난을 이기며 살아가기 위한 세 가지 조언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정하신 일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보통 사람이 마음의 평정을 깨트리는 큰 사건을 만나게 될 때 보이는 1단계 반응이 ‘부정’이라고 합니다. 부정이란 사건 자체를 아예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까스로 인정했다고 해서 끝은 아닙니다. 2단계로 ‘투사’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흔합니다. ‘투사’란 이 일을 일어나게 된 원인을 누군가에게서 찾고 그에게 분노를 표시하고 공격하는 반응입니다. 부정과 투사 모두 미성숙함에서 나오는 것으로 문제 해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우리가 고난을 만나게 될 때 보일 수 있는 미성숙한 반응이 무엇이며 그것이 아무 유익이 없음을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6:10-11)

하나님과 다툰다는 것은 고난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 이런 식으로 따지는 것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셨나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하나님! 나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그러나 전도자는 하나님과 다투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나보다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그분이 지으신 피조물일 뿐입니다.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과 다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아무리 수많은 논쟁을 벌이고 말씨름을 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됩니다. 피조물은 자신의 창조자와 다투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던 욥 역시 마지막에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해야 했습니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12)

우리 삶은 그림자처럼 순식간에 빠르게 지나갑니다. 전도자는 이런 인생 가운데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는 사람이 있겠냐고 질문합니다. 답변은 당연히 ‘아무도 모른다’ 입니다. 우리 앞에 형통이 있을지 곤고가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는 모릅니다. 미래는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정말 선한 일인지 잘 모릅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순종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다툼을 그쳐야 합니다. 그 대신 이렇게 욥처럼 고백할 뿐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우리가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과 다투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고난으로부터 도피하지 말고 대신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삶의 고난에 대해 사람은 부정과 투사라는 미성숙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앞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바로 ‘도피’가 있습니다. 현실에서 달아나 고통을 무마하려고 애쓰면서 문제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한 한껏 파티를 열고, 가능한 한 크게 자주 웃고, 필름이 끊길 만큼 술을 마시고, 컴퓨터 게임과 같은 비현실의 세계나 환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없어서 거기로부터 도망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전도자는 고난으로부터 도피하는 대신 오히려 고난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7:2,4)

잔칫집에는 즐거움과 흥겨운 노래 소리가 넘치는 반면 초상집에는 슬픔과 울음 소리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초상집에 가는 것보다 잔칫집에 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우리가 가진 상식에 반하는 말을 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났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잔칫집에서 배우는 것보다 초상집에서 배우는 것이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초상집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전도자는 모든 사람의 삶이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말하면 초상집이 이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계속 상기시켜 주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꺼려하고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증거를 들어 보겠습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지은 ‘노틀담의 꼽추”라는 장편 소설이 있습니다. 원작에서는 프롤로 부주교,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 꼽추 콰지모도 세 명의 주인공이 모두 다 죽는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저는 디즈니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노틀담의 꼽추’를 보고 입어 벌어졌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 흘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에스메랄다도 콰지모도도 죽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군중들이 콰지모도를 향해 만세 삼창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내 ‘노틀담의 꼽추’는 이렇지 않아!” 하면서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 문화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기를 거부합니다. 가급적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피하려고 합니다. 그 대신 잔칫집이나 혼인집에 어울릴 만한 흥겨운 노래를 부르자고 합니다. 강한 비트에 전자음이 난무하는 댄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인생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현실을 잊자고 말합니다. 고민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주말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한 주 간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자고 제안합니다. 죽음의 현실, 고난이라는 삶의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합니다.

이 길을 추구하는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깊이가 없는 삶, 피상적인 삶입니다. 많이 웃기는 했지만 그후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 같고 공허감이 밀려옵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느껴지는 삶입니다. 마치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면서 ‘탁탁 타다닥’ 하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 같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팍’ 꺼져 버리고 마는 인생입니다.

이처럼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말합니다. 장례식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장례식은 오늘 하루가 내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날인가를 알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에는 끝이 있고 점점 내가 그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고 알차게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 다짐하게 됩니다.

둘째로, 장례식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내려 놓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재물도 권력도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눈 앞에서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빈 손으로 떠나야 하는데 욕심 내고 쌓으려 하는 모든 수고가 다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가진 소유보다는 ‘내가 한평생 어떤 삶을 살았는가’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떠난 후 남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죽음 이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떤 사람으로 설 것인가?’ 이것이 내 삶에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셋째로, 장례식은 우리가 좀 더 관용적인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가 틀어지고 서로 원수처럼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화해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언젠가는 할 거야!’ 하면서 화해를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장례식에 가서 우리는 더 이상 화해를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왜냐하면 계속 미루다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죽게 되면 두고 두고 후회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자존심이 좀 상하더라도 차라리 져주고 양보하며 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죽음은 삶의 끝이지만 그 끝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는 전도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 깨달은 것만으로 지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혜자도 얼마든지 우매자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 시작해서 지혜로 끝맺음까지 해야만 정말 지혜자라 불릴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끝까지 지혜의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 네 가지를 다음과 같이 일러줍니다.

첫째로, 재물에 대한 탐욕을 조심해야 합니다.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7)

학창 시절 그분이 가진 사상과 철학 때문에 제가 존경했던 한 분을 십년 후에 만났는데 너무 달라진 모습에 크게 실망한 적이 있습니다. 한때 참 지혜로웠던 사람인데 어느 날 보니 지혜를 다 잃어버리고 흔한 속물로 변해버린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돈에 대한 욕심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지혜자의 길을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물질에 대한 탐욕을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인내하지 못하고 도중에 포기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8)

우리 주위에는 이런 친구가 한 명쯤 있습니다. 바로 머리는 너무 좋은데 끈기가 없는 친구입니다. 자기 머리만 믿고 맨날 벼락치기만 하고 한탕을 노리는 친구입니다. 이것은 결코 지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끈기 있는 사람입니다.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분노를 조심해야 합니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9)

지혜 있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자기와 달리 지혜가 없는 사람, 우매한 사람을 보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이 쉬운 것도 모르느냐?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느냐?’ 하면서 다그치기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버럭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좌절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우매자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넷째로 향수병을 조심해야 합니다.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10)

흘러간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왕년에 내가 말이지” 그리고 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는 이선희가 부른 ‘아! 옛날이여’입니다. “아! 옛날이여! 지난 시절 다시 올 수 없나? 그날~” 이런 사람은 과거에 얽매여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결국 일을 끝마치지 못합니다. 전도자는 과거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지금까지 살펴본 지혜자의 길을 끝까지 가기 위해 조심해야 할 것 네 가지, 즉 탐욕, 포기, 분노, 향수의 저변에 흐르는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조급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을 빨리 이루려 하다 보니 물질을 의지하게 되고,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포기하거나 분노하거나 향수에 젖게 됩니다. 장례식에서 배운 소중한 삶의 지혜를 조급함 때문에 잃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전도자는 우리에게 삶에 대해 너무 조급하거나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음에 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해 줍니다.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11-12)

전도자는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지혜의 그늘 아래 있는 것과 돈의 그늘 아래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유산이란 부모에게 물려 받은 땅을 의미합니다. 돈의 그늘이란 외부의 어려움을 막아줄 수 있을 수 정도로 충분히 저축해 둔 돈을 가리킵니다. 만약 우리에게 물려 받은 땅이 있고 충분한 예금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웬만한 고난이 찾아와도 조금은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유산보다 돈의 그늘 아래 있는 것보다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혜는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유산과 돈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우리에게 깊고 거친 바다 같은 인생을 항해하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피상적인 삶을 살지 않고 깊이 있는 삶을 살도록 안내해 줍니다. 이런 지혜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마음이 든든할 것이고, 조급하지 않고 좀 더 여유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지혜를 어디에서 배울 수 있습니까? 일이 술술 잘 풀리고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때입니까? 아닙니다. 편하게 살 때 편해서 좋기는 하지만 사실 배울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 언제입니까? 바로 우리 인생의 고난의 시기입니다. 힘들고 괴로운 나날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 고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난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인생 학교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학교에서 우리는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 얻은 지혜는 우리 평생의 든든한 자산이 됩니다. 우리가 고난에서 도피하려고 않고 당당히 그 학교에 들어가 돈으로 살 수 없는 인생의 지혜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지혜의 한계를 알고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도서의 매력은 지혜의 가치를 말한 뒤 곧바로 지혜의 한계에 대해서도 말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전도자는 결코 지혜 만능론자는 아닙니다. 이번에는 그는 지혜에 어떤 한계가 있음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3)

전도자는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아무도 곧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아무도’에는 당연히 지혜자도 들어갑니다. 지혜가 우리에게 삶의 고난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난 그 자체를 없애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꾸려 든다면 참으로 오만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지혜의 한계를 모르면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지혜의 한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전도자의 조언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형통한 날을 만나게 될 때 그날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누리며 즐거워하면 됩니다. 그러나 분명 인생에서 형통한 날만 계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곤고한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곧 고난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그 고난을 통해 지혜를 배우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통함과 곤고함 이 두 가지를 늘 병행하게 하십니다. 형통하다가 곤고하기도 하고 곤고하다가 형통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제 형통한 날이 찾아올 지, 언제 곤고한 날이 찾아올 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장래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지 못합니다. 미래는 우리의 통제 범위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8-39)

바울은 우리가 고난에도 불구하고 넉넉히 이기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넉넉히 이긴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고난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그 고난을 통해 우리가 좀 더 성숙해지고 좀 더 지혜로워지고 좀 더 겸손해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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