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도서

함께 살아가기

이창무 2023. 10. 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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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도서 제5강 / 이창무

함께 살아가기

말씀 / 전도서 4:7-16
요절 / 전도서 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겨울철이 다가오면 우리는 여러 마리의 철새들이 V자 형태를 유지하면서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필 V자 모양으로 날아갈까요? 영국 왕립 수의대 박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V자 대형의 선두에서 리더 새가 힘찬 날갯짓을 하면 상승 기류가 만들어져서 뒤따라오는 새들이 상대적으로 편하게 비행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경우 혼자 날 때보다 70퍼센트 이상 더 오래 비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제일 앞에서 날아가던 새가 지치면 제일 뒤로 가고 그 뒤에 있던 새가 앞에서 날면서 무리를 이끕니다. 철새들이 내는 “구우~구우~”하는 소리는 맨 앞에 있는 새를 응원하는 소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철새들은 함께 날면서 협력하기 때문에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평소 우리가 머리가 나쁘다고 무시하는 새들도 이렇게 함께 살아가기의 유익을 이렇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전도자는 우리에게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또 다시 해 아래 세상에서 헛된 모습 한 가지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8)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직업은 한 중견 기업의 창업자이자 최고 경영자(CEO)입니다. 이 회사는 창업 이래 계속 승승장구해왔습니다. 위험한 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위기를 넘긴 후에는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코노미스트 지에 “재계에 떠오르는 샛별”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인터뷰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직 배가 고픕니다. 내 회사는 세계 최고가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는 하루 종일 이어지는 회의에 참석하고, 보고서를 읽고 쏟아지는 메일을 처리합니다. 그는 주로 식사를 사무실에서 배달을 시켜 ‘혼밥’을 합니다. 굳이 다른 사람과 같이 밥을 먹는 것보다 모니터에서 실적 수치를 확인하면서 밥을 먹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아내도 없고 아이도 없고 가족도 없습니다. 그 동안 그는 그 이유가 가정을 꾸릴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내가 가려는 길에 가족은 방해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추석 연휴 기간 중에도 출근했던 그는 밤 늦게 퇴근한 후 불 꺼진 큰 집에 덩그러니 혼자 있습니다. 그는 혼잣말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일까? 다 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해왔는데. 나의 부와 성공을 위해 결혼도 아이도 친구 관계도 다 포기했는데. 그런데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은 걸까? 남들은 다 나를 부러워하지만, 왜 나는 늘 이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는 걸까?”

이 사람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즘 시대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의 삶을 롤모델로 삼을 지도 모릅니다. “가족은 내 인생의 짐이 될 뿐이다. 혼자 사는 편이 더 좋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TV 프로그램도 ‘나 혼자 산다’ 라든지 ‘나는 자연인이다’ 같이 홀로 사는 사람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인기입니다. 여성들 중에서도 가정보다도 ‘커리어 우먼’으로서 자기 꿈을 쫓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들 결혼을 잘 안 하려고 합니다. 하더라도 아이를 안 낳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지난 2분기 합계 출산율이 0.7까지 떨어졌습니다. 2.1이 기본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딱 1/3인 셈입니다. 캘리포니아 법대 조앤 윌리엄스 교수가 이 사실을 알고 ‘대한민국은 망했네요.’라고 인터뷰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반면 우리 교회에는 자녀가 세 명, 네 명인 가정이 많습니다. 정부는 출산율 하락 저지의 최후 보루인 우리 교회에 표창장을 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꼭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고 배우자도 없는 홀로 된 사람의 이야기만으로 한정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부모가 있고 형제자매가 있고 처자식이 있어도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자기 혼자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즐거움을 알지 못합니다. 외롭고 쓸쓸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를 키워서 고독을 달랠 수는 있겠지만 한계는 분명합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나눌 사람이 없으면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라고 마무리 짓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도 이 사람과 비슷한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을 만납니다. 한 사람은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한 부자 청년입니다. 그는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 합류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끝내 거부합니다. 근심하며 혼자 사는 삶으로 되돌아 가고 맙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입니다. 그는 사회적 고립을 감수하며 돈 버는 일에만 집착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루 밤 함께 하고 난 뒤 완전히 달라집니다.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홀로 있는 삶을 고집했던 부자 청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고, 고집을 버리고 함께 하는 삶을 선택했던 삭개오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둘째, 함께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9)

여기 늘 혼자 일하고 그 열매를 독차지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고 그 열매를 나누는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얻는 열매의 크기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클까요? 당연히 뒤의 것이 더 큽니다.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담 스미스는 그의 저서인 ‘국부론’에서 분업은 최소한 240배의 생산성을 증대시킨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둘 이상이 분업을 해서 얻는 효과이고, 우리 식으로 바꾸면 동역의 가치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전도자는 두 사람이 파트너로서 서로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화 셋을 듭니다. 이 예화는 전부 전도자가 살았던 시대의 장거리 여행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시기의 여행은 오늘날 여행과 달리 숱한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보다 둘이 함께 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 유익할까요?

첫번째로 길을 가다가 넘어지거나 구덩이에 빠질 위험에서 구원해 줄 수 있습니다. 당시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밤길을 걷다 보면 넘어지거나 구덩이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생겼습니다. 이때 혼자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처가 덧나거나 빠져나오지 못해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이 있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여행길 이 훨씬 더 안전하게 됩니다. 파트너가 일으켜 줄 수도 있고 구덩이에서 건져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추운 밤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중동 지역은 낮에는 덥고 밤에는 매우 춥습니다. 당시 여행자에게는 침낭도 담요도 없고, 덮을 것이라고는 자신의 겉옷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동행하는 여행자가 있으면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데워줄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추위를 이기고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강도의 위협에 맞설 수 있습니다. 지난 주 브라질 한 디모데 선교사님의 둘째 아들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당했다고 합니다. 감사하게도 범인을 잡고 물건도 되찾았다고 합니다. 하물에 당시에는 여행객을 노리는 강도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때 혼자라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둘이라면 한 번 맞설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다음과 같은 잠언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요약합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12b)

세 겹 줄이란 세 가닥의 실을 꼬아서 만든 밧줄입니다. 한 겹 줄은 끊어지지 쉽고 두 겹 줄만 해도 웬만해서는 끊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세 겹 줄은 얼마나 튼튼하겠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한 사람은 약하지만 두 사람만 함께 해도 큰 힘이 됩니다. 하물며 세 사람이 함께 하면 얼마나 큰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일곱 사람, 열 두 사람이 함께 하면 훨씬 더 좋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는 지혜를 따라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여행을 보내실 때 둘씩 둘씩 짝을 지어서 파송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교회는 그분의 몸입니다. 우리 각자는 그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지체로서 우리는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 마땅히 협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해서 서로를 보완하고 함께 일할 때 교회는 큰 유익을 얻습니다. 둘이 함께 하면 슬픔은 절반이 되고 기쁨은 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서만 살지 않고 때로는 한 팀으로, 때로는 전체로 어우러져 한 공동체를 이룰 때 불의와 학대와 시기가 가득한 세상도 살아갈만한 곳이 됩니다. 성도의 교제 가운데 어느새 눈물이 마르고 웃음꽃이 피어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 비결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로 어우러져 살아가기 위해 나보다 남을 여기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울러 자기 삶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게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서로를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심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실천함으로 우리가 세 겹 줄보다 더 튼튼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습니다.

전도자는 오늘의 주제를 뒷받침해 줄 세번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줍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13)”

여기에는 두 종류의 인물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젊은이이고 다른 한 사람은 모든 권력을 가졌지만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늙은 왕입니다. 이 젊은이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끊임없이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반면 늙은 왕은 아무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나은 사람일까요? 얼핏 보면 젊은이는 가난하고 왕은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보다 왕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반대로 늙은 왕보다 젊은이가 더 낫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14)

전도자는 그 이유를 이 두 사람의 이후 삶이 엇갈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젊은이는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흡수하면서 정치인으로 계속 성장해 나갔습니다. 자신이 가난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아픔에 충분히 공감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국민들의 여론을 존중하고 항상 대화와 토론을 통해 베스트의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왕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늙은 왕의 주변에는 아무도 함께 있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대화와 소통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들 저 고집불통과는 다시는 말을 섞지 않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어쩌다 한 번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왕은 그를 즉시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다가 민심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왕은 젊은이에게 왕좌를 넘겨주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외딴 곳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이 두 사람의 대조적인 삶을 통해 우리는 지혜가 무엇인가 배울 수 있습니다. 지혜란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는 것입니다. 조언을 전혀 듣지 않고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이 꼭 다른 사람의 말에 동의하거나 그 말에 따라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듣고 생각해 보고 나서 본래 자기의 생각대로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말이 더 낫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자신의 생각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이 왜 지혜로운 일입니까?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사람을 얻기 때문입니다.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표현입니다. 존중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존중해 주는 사람을 존중해 주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하든 그를 도와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사람은 사람을 잃습니다. 결국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직장 생활에서, 가정 생활에서, 교회 생활에서 모든 면에서 두루두루 다른 사람의 조언을 열린 마음으로 들으려는 태도를 갖는다면, 분명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덕분에 인정받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지렛대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까지만 말한다면 어쩌면 전도서는 서점에 꽂혀 있는 흔한 처세술 관련 서적과 별반 다르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전도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지혜의 한계를 논합니다.

“내가 본즉 해 아래에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다음 자리에 있다가 왕을 대신하여 일어난 젊은이와 함께 있고 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15,16)

지혜로운 젊은이는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이후에도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왕의 팬 클럽도 생겼고, 왕이 어디든 나타나기만 하면 사람들의 환호 소리,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여론 조사에서 지지도 70 퍼센트 이하로는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명성과 인기가 영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왕이 집권하자 그의 인기는 서서히 식어갔습니다. 동시에 그의 집권 동안 이런 저런 문제가 많았다는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이런 논란도 잠시 뿐이고, 그 후에는 존재 자체가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 전도자는 이렇게 마무리를 합니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전도자는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돈보다 또 권력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관계 또한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해 아래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현실이다.”

전도자가 지난 주 말씀에서는 우리에게 소망과 권면을 제시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소망이나 기쁨을 남기지 않습니다. 결론은 ‘사람이 제일 중요하지. 하지만 결국 인생은 너 혼자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씁쓸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또 다른 결말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해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주신 답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3,14)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해답이십니다. 원수 된 것 곧 우리 사이에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고 둘이 하나 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예수님은 저 해 위에서 해 아래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심각한 고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철저히 고립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버림받으시고 열 두 제자에게도 버림받으시고 마침내 아버지께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예수님은 아무도 함께 하지 않는 완전히 혼자가 되셨습니다. 그 고독의 깊이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홀로 되심으로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우리 사이를 가로 막았던 모든 장애물들을 십자가로 모두 해체해 버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함께 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공동체의 영원한 기초를 만드셨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 중심에 이 예수님이 계실 때 우리들에게 세 겹 줄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 시대 우리가 싸워야 할 복음의 적은 지독한 개인주의입니다. 그동안 이런 흐름이 교회 안에, 성도들의 삶 속으로 지속적으로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지난 코로나 기간을 거치며 이런 성향은 더욱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성도의 신앙은 점점 더 약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이 땅에서 출발해서 천성을 향해 가는 이 멀고 먼 순례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장거리 여행을 하는 철새들처럼 우리가 원 팀이 되어 서로 대형을 갖추고 누군가는 앞장 서 수고하고 누군가는 지친 동료의 자리를 대신하며 누구가는 응원가를 불러주며 힘을 모을 때,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모두 다 하나님 나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날까지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따스함으로 서로를 보듬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서로를 통해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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