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도서

악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이창무 2023. 9. 24.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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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도서 제4강 / 이창무

악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말씀 / 전도서 3:16-4:6
요절 / 전도서 4:6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구한말 조선에 왔던 미국인 선교사 조지 길모어는 1886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세계 많은 나라를 다녀봤지만 지구상에서 이처럼 더러운 나라는 처음이다. 한 영국인은 조선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사람이 그가 본 가장 더러운 사람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우리 조상들은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의 눈을 통해서야 자신들이 불결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 우리 나라는 제법 청결한 나라로 소문이 날 정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전도자는 자신이 관찰한 이 세상의 세 가지 모습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불의를 보았습니다.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3:16)

전도자는 해 아래 세상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거기에 악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뒷돈을 받는 공무원이 있고, 보이스 피싱으로 거액을 갈취하는 사기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별로 놀랍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불의가 만연해 있는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악할 일은 재판이 이루어지는 법정에서도 불의가 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 분명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전직 대법관 출신 전관 예우 변호사를 써서 승소를 합니다. 법관이 대통령 친인척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힘 없는 사람에게는 가차없이 중형을 선고합니다. 씁쓸하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정의로워야 할 법정이 악으로 가득하다면 어디에서 정의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 모습에 대해 전도자는 어떻게 말합니까? 이번에도 역시 ‘이 또한 헛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전도자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17)

전도자는 해 아래의 세상의 현실 너머 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불의에 희생된 무죄한 자들을 위해 의로우신 하나님이 반드시 개입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가 의롭고 누가 악한 지 판결하실 것입니다. 악인은 결국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전도자는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행하실 최후의 심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심판은 우리 생애 가운데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쁜 상사가 해고되고 부패한 정치인이 수감되며 독재자가 몰락하는 것을 목도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부당한 로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셨던 예수님 역시 이런 믿음을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모습을 직접 보았던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2,23)

우리는 이 예수님의 뒤를 뒤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이 세상의 불의한 세력에 의해 억울하게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악을 향해 기울어진 이 세상의 저울추를 마침내 공평과 정의로 균형을 맞추실 것을 압니다. 그날에 우리는 해 위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며 이를 본 우리는 손을 들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이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지금은 악인이 계속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볼 뿐입니다. 이때 우리는 ‘왜 하나님이 당장 악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왜 심판은 이토록 늦어지는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전도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18)

만약 사람이 악을 행할 때마다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무서워서 감히 악을 저지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만 내버려두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시험하시려고 당장 벼락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이 시험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짐승의 특징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기 욕망에만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심판이 유보된 기간 동안 보여주는 사람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감시와 처벌이 없다면 인간 세상이 약육강식이 난무하는 정글처럼 변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자기 권력을 위해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나 살인과 강간을 일삼고 있는 중남미의 마약 카르텔들을 보십시오. 차라리 짐승이 사람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전도자가 사람이 짐승과 다름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전도자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결국 같은 운명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인도 아무리 못생긴 하이에나도 다 죽으면 한 곳으로 돌아갑니다. 둘 다 분해되어 똑같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래도 인간의 영혼은 짐승과 달리 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을 경험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을 지닌 채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분명 사람은 짐승보다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은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은 짐승처럼 본성대로 살아가고, 짐승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결과가 짐승과 가까워지는 것이라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의 실재를 깨닫게 된 전도자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 더러운 세상! 콱 다 사라졌으면 좋겠어.”라는 식으로 냉소적으로 반응할 것 같지 않나요? 그러나 의외로 전도자는 다음과 같이 즐거움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22a)

쓰레기 장에도 꽃은 피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꽃이 더 소중해 보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불의하고 헛될 지라도 삶은 소중합니다. 전도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과중한 업무에 지치기도 하고, 직장 내 인간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에는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움도 분명 있습니다. 일을 하는 과정 속에서 나의 재능과 창의성을 발휘하면서 경험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성장하고 업그레이드되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일을 다 끝내고 그 일의 열매를 맛볼 때 느끼는 보람이 있습니다. 제가 프로그래머였을 때 길고 긴 소스 코드를 다 짜고 “컴파일 및 실행” 버튼을 딱 누른 후 에러 없이 화면이 딱 뜨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벅찬 감격이 몰려왔습니다.

전도자는 이런 일의 즐거움을 가리켜 그 사람의 몫이라고 표현합니다. 몫이란 누군가가 나누어 준 것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나누어 주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일을 통한 즐거움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이 불의하고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너무 우울해 하지 말고 유쾌하게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의 시간 중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서의 일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죽어서 천국에 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을 통해 우리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 수도원에서는 노동을 수도사의 5대 의무 중 하나로 여겼고 개혁주의에서는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일과 그 열매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할당해 주신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을 단순히 지겹지만 견뎌야 하는 돈벌이 수단으로만 볼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보람과 기쁨을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학대를 보았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4:1)

전도자는 세상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학대가 일어나고 있음을 목격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남편이 아내를 학대합니다. 독재자가 국민들을, 사장이 직원들을, 교주가 신도들을 학대합니다. 때로는 폭력으로, 때로는 교묘한 심리조작으로 힘 있는 자가 약자들을 이용하고 착취합니다. 이렇게 학대 받는 자들은 매일 밤 울면서 잠듭니다. 더 안타까운 일은 아무도 그들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들 내 일 아니라고 외면하고 네가 스스로 해결하라며 그냥 방치해 둡니다. 단 한 명이라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더 찾아봤지만 역시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2,3)

전도자는 이런 현실이 너무 역겨워서 더 이상 도저히 눈을 뜨고 쳐다볼 수 없습니다. 이미 죽은 자는 최소한 인간 사회에서 자행되는 이런 끔찍한 학대를 더는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아예 한 번도 이런 악행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더 복되다고 합니다.

전도자의 이 말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너무 암담한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렇게 말해도 되나요? 어떤 주석 책에서 전도자의 말이 신학적으로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조목조목 비판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책의 저자가 꼭 욥의 세 친구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생후 16개월된 정인이가 양부모에게 지속적인 학대를 당하다가 결국 사망했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저는 정인이가 이제는 하늘 나라에서 편히 쉬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처럼 전도자는 그저 이곳저곳 학대가 만연한 현실을 보며 탄식하고 울부짖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탄식하셨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귀 먹고 말 못하는 한 남자를 보신 예수님의 첫 번째 반응은 탄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남자의 상처와 고통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향해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고 전도자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유다의 배신을 너무나 마음 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도자와는 달리 탄식만 하고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귀 먹고 말 못하는 남자에게는 ‘에바다 곧 열리라’ 말씀하심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회개할 수 있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하나 뿐인 아들의 상여를 따라가며 슬피 우는 나인성 과부에게 ‘울지 말라’ 하셨고, 집단 따돌림을 당하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함께해 주시고, 온 몸이 문드러진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어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을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5,36)

예수님은 위로자 하나 없는 세상에 위로자가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분의 몸된 교회가 이 세상의 위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번 10월 13일에 하는 ‘영혼의 힐링 콘서트’의 주제는 ‘함께’입니다. 사실 함께 하는 것만큼 큰 위로가 없습니다. 아들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하심이 성령을 통해 이 콘서트 가운데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악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지친 영혼들이 와서 주님의 치유를 경험하는 콘서트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시기와 경쟁을 보았습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4)

그 다음 전도자는 세상에 시기심이 가득하다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런데 이 4절은 암만 봐도 개역개정판 성경이 번역 상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새번역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이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4, 새번역)

전도자는 사람들이 일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경쟁심과 시기심에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은 나의 힘’ 대신에 ‘질투는 나의 힘’을 모토로 살아갑니다. 제가 만든 ‘동기 모임은 승진급 발표 전까지만 가능하다’라는 아포리즘이 있습니다. LG그룹을 다닐 때 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한 달 전에도 너희들 없이는 죽고 못산다 하더니 대리 진급 발표가 나자마자 동기 모임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경쟁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겉으로 표시는 잘 안 하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짓밟고 올라서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시기심과 경쟁심 때문에 얼마나 살벌해지는 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한 시도 긴장의 끈을 풀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 살면서 사람들은 다양한 삶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선택의 길을 손의 모습을 통해서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5,6)

첫째로, 팔짱을 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치열한 생존 경쟁에 살아남을 자신감도 없거나 이런 현실에 진절머리가 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방 안에 틀어박혀서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결국 자기 몸을 먹어야 합니다. 물론 실제로 자기 몸을 먹을 수는 없겠지만 대신 자존감을 갉아먹으며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전도자는 이런 사람을 우매자라고 부릅니다.

둘째로, 두 손에 전부 가득 담으려 욕심을 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무조건 일 등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루에 잠을 두 세 시간 밖에 자지 못하고 계속 달리고 또 달립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언젠가는 번-아웃이 되고 맙니다. 온 몸이 탈진한 나머지 주저앉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사이에 뒤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제치고 앞질러 나갑니다. 결국 남들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 자신을 갈아 넣었던 모든 노력이 다 헛수고로 끝나고 맙니다. 전도자는 이 사람을 바람을 잡으려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셋째로, 한 손에 가득한 것으로 만족하려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현실 도피를 선택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조건 톱이 되어야 한다는 야망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앞만 보고 달려가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대신 한 손에 가득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 정도면 된 거야’ 하면서 무리를 해서까지 더 많이 차지하려고 욕심내지 않습니다. 그러면 비어 있는 나머지 한 손으로는 무엇을 합니까? 그 손으로 위로가 필요한 사람의 등을 토닥거려 줄 수 있습니다. 또는 손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이런 그의 마음에 평온함이 찾아옵니다. 그는 자기 일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이 사람을 가장 나은 선택을 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 가지 선택의 길 중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우리 나라 사회는 유난히 경쟁이 심한 사회입니다. 공부에서, 일에서, 외모에서, 집의 크기에서, 자동차의 배기량에서, 심지어 교회 사역에 있어서도 치열한 경쟁을 합니다. 그 밑바탕에는 나는 적어도 너보다는 뒤쳐질 수 없다는 심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들 바쁘게 살아갑니다. 바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낍니다. 목표 달성을 위해, 그것도 남들보다 더 빨리 이루기 위해 무리수를 남발합니다. 아니면 정반대로 스스로 은둔형 외톨이가 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현실 세계 대신 훨씬 더 안전해 보이는 온라인과 게임의 세계로 도피합니다. 이 양극단의 세계는 시기심이 마음을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병리적인 현상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전도자는 양극단 사이에 중간 길로 가라고 조언합니다. 일과 그 일을 통한 열매를 즐거워하되, 그 일의 성공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소유를 더 늘리는 대신 욕망을 줄이는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 경건은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우리 영혼에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일로 얻은 재물보다 일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기 때문에 행복도가 높아집니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시기심 때문에 속이 뒤집어질 일 없이 마음이 늘 평안합니다. 친구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진짜 친구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이런 평안과 안식은 억만금의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주님 한 분만으로 기뻐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우리가 불의와 학대와 시기가 가득한 사막 같은 세상 속에서 이 선물을 통해 기쁨과 평안의 오아시스를 경험하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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