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도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

이창무 2023. 9. 10.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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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도서 제2강 / 이창무

삶의 의미를 찾아서

말씀 / 전도서 1:12-2:26
요절 / 전도서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벨기에의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쓴 ‘파랑새’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틸틸과 미틸 남매가 크리스마스 전야에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다가 문득 깨어나 자기들이 기르던 새가 바로 그 파랑새였음을 깨닫는다는 내용입니다. 남매의 이름을 치르치르와 미치르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은 예전에 일본어판을 중역해서 낸 바람에 생긴 오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전도자는 마치 파랑새를 찾는 남매처럼 삶의 의미를 찾아 여기 저기를 헤매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나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가까운 곳에서 찾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도 그 전도자의 여정을 함께 차근차근 따라가 보았으면 합니다.

첫 번째로 전도자는 지혜와 지식의 추구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습니다.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1:13)

전도자는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펴보았습니다. 왜 전도자는 이렇게 했을까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지혜와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전도자의 모토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서 남 주나?” “공부만이 살 길이다.”였습니다. 그는 동서고금의 책을 빠짐없이 읽고, 필요하면 자신이 직접 자료를 찾고 실험을 했습니다. 수많은 논문을 썼고 그 논문들은 연이어 유명 해외 저널에 등재되고 늘 조회수 탑을 찍었습니다. 그의 유튜브 채널 ‘전도자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는 수백만의 구독자가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도자는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의 연구실에는 한밤 중에도, 새벽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목은 거북목이 되고 눈은 초고도 근시가 되고 만성 소화불량과 편두통을 않는 등 온 몸이 상했습니다. 이런 고생 끝에 얻은 전도자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4)

바람은 공기나 구름처럼 잡을 수 없습니다. 바람을 잡으려 애쓰는 것은 공허하고 쓸데없는 짓입니다. 전도자는 지혜와 지식의 추구가 이와 같이 무익이고 헛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지혜와 지식이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을 채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15)

여기서 구부러진 것이란 망가지고 비뚤어져 있어 고쳐져야 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또한 모자란 것이란 꼭 필요한 것인데 결핍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을 압축시킨 은유적 표현입니다. 우리는 불의와 범죄가 들끓고 부도덕으로 얼룩진 고통스러운 해 아래의 삶을 날마다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드러난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분노하고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왜곡되고 결핍된 사람을 어떻게 하든 고쳐주고 싶습니다. 그 중에는 물론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와 지식만으로 이런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까? 지식만으로 비뚤어진 사람의 마음을 고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전도자는 경험했고 우리 또한 경험하고 있습니다. 박사들이 즐비한 교수 사회라고 해서 모순과 부조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한 경우도 많습니다. 지식을 활용해서 더 교묘하고 악랄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지혜와 지식은 망가진 현실 앞에서 종종 한없는 무력함을 드러냅니다. 왜 그럴까요? 아담의 후손들을 죄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만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추구가 무익하고 헛된 두 번째 이유는 번뇌와 근심을 더하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18)

우리가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다 보면 선하고 아름다운 것만 접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필연적으로 이 세상의 악에도 눈을 뜨게 됩니다. 사람이 얼마나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으며 상상도 못한 이상한 짓, 미친 짓을 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됩니다. 자연 세계에서 우리는 너무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면도 발견하지만 현편으로는 약육강식의 무자비한 현실도 알게 됩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어미새의 눈 앞에서 뱀이 아기새를 잡아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제 마음도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 현실을 알면 알수록 타락의 가시와 엉겅퀴의 고통을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혜와 지식이 그를 우울하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했던 행복한 어린 시절로 시계를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의 축적이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전제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참된 지혜는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요? 아니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자신들의 지혜를 과신하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미련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십자가를 믿는 우리 역시 바보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십자가만이 세상의 근본 문제인 죄 문제와 죽음의 저주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 그 어떤 지혜로 이루지 못한 일을 성취한 하나님의 온전한 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시고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를 붙드는 자들에게 참 지혜를 주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그 지혜를 우리가 간절히 의지하고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 번째로 전도자는 쾌락의 추구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습니다.

지혜와 지식의 한계 앞에 전도자가 택한 인생의 다음 방향은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2:1)

바로 쾌락 추구였습니다. 그는 너무 고민하지 말고 한바탕 즐기며 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어떤 것에서 쾌락을 찾고자 했습니까?

첫 번째는 웃음이었습니다. 전도자는 요즘 세상에서 제일 웃기고 재미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찾아다녔습니다. 처음에는 무한도전, 일박이일, 런닝맨 등과 같이 연예 오락 프로그램에 푹 빠졌습니다. 그 다음 엑스박스,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 등 온갖 게임기를 다 사서 만렙을 찍을 때까지 열심히 플레이를 했습니다. 최근에는 유튜브에 그 중에서도 아주 짧은 쇼츠(Shorts) 영상에 재미를 들였습니다. 그러나 모두 다 잠깐 즐겁기는 하지만 끝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허탈감이 들어서 다 시들시들해지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는 술이었습니다. 전도자는 인생의 낙이 술에 있다는 주변 사람의 말을 듣고서 나도 한 번 시도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단, 지혜자 답게 그들처럼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지 않고 적당히 마시고 취하려고 했습니다. 술을 마시자 확실히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술에서 깨고 나면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숙취와 술값 영수증 밖에 없었습니다. 전도자는 이 또한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사업이었습니다. 이번에 전도자는 사업을 크게 벌여 돈 버는 재미에 빠져 보고자 했습니다. 그는 건설과 부동산 사업을 벌였고 그 결과는 대박이었습니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스위스에 큰 별장을, 발리에 비치하우스를, 파리에 펜트하우스를 소유했습니다. 또한 애플과 삼성의 대주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마치 돈 버는 기계가 된 것 같았습니다. 이 알 수 없는 우울함을 해소해 줄 다른 무엇이 필요했습니다.

네 번째는 성적인 쾌락이었습니다. 이번에 전도자는 육신의 쾌락이 답이 될까 하여 이 여자 저 여자 닥치는 대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현란한 말솜씨와 재력을 바탕으로 날마다 다른 여인을 침실에 불러들였습니다. 하지만 쾌락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지속적인 관계로부터 나올 수 있는 참된 사랑의 기쁨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전도자는 이렇게 인생에서 추구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즐거움을 탐닉해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눈이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고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불경건함과 부도덕함마저 개의치 않고 갈 때까지 가보았습니다. 전도자만큼 다양한 추구를 해 본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11)

전도자는 쾌락과 소유에 대한 자신의 실험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그가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죄 때문입니다.

첫째는 이기심의 죄 때문입니다. 1절부터 11절 사이에 ‘나’라는 말이 서른 번 이상 등장합니다. “나를 위하여” “나의 사업” “나의 모든 수고” “내 육신” 등등 온통 ‘나’ 뿐입니다. 그의 모든 수고를 다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이웃을 위해 벌인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만을 위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오래가지 못합니다. 참된 기쁨은 관계 속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상숭배의 죄 때문입니다. 전도자의 쾌락 추구는 쾌락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쾌락이 그에게 우상인 된 셈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보다 즐거움과 향락을 누리는 것이 더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면 도리어 쾌락을 얻지 못한다는 역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쾌락의 원천도 무한정으로 쾌락을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쾌락이 바닥난 순간 불쾌한 감정이 말할 수 없이 크게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에서 인생의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에 보면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영생이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참된 행복과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답을 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10:27)

만족과 기쁨 자체를 추구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해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쁨이 찾아오고 즐거움이 샘솟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기쁨이 있는데 우리가 일시적인 즐거움을 주는 술과 방탕함과 야망에 매달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기쁨의 바다가 저 앞에 있는데 바닷가에서 모래성 쌓기만 만들고 있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쾌락의 공허한 집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 번째로 전도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일상의 선물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도자는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지혜의 추구와 쾌락의 추구를 한 번 더 검토해 봅니다. 과연 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이 둘 사이에 우열을 가릴 수는 없을까요?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13)

전도자는 분명 지혜가 우매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합니다. 무분별하게 쾌락 추구에 탐닉하는 삶보다는 확실히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는 편이 훨씬 더 났습니다. 지혜는 마치 캄캄한 밤에 들고 나간 손전등과 같습니다. 적어도 인생길에서 내가 어디 편으로 가야 할 지 알려 주는 역할을 합니다. 지혜가 없으면 어둠 속에서 계속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전도자는 지혜가 결국 헛되고 헛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지혜는 죽음에 맞서 어떤 해법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16)

지혜자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찾아오는 운명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해서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차르트나 시인 이상처럼 우리는 요절한 천재들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은 마치 폭군과 같아서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둘째로 지혜는 자격이 없는 상속자에 맞서 어떤 대책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21)

온갖 지혜와 재능을 동원하고 수고한 끝에 큰 성취를 이루어 놓으면 뭐하겠습니까? 죽고 나면 내가 누리지 못하고 수고하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번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는 법입니다. 최악은 어리석은 사람이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평생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것은 순식간에 다 말아먹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실들을 숙고한 전도자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그는 사는 것이 밉고 내가 한 모든 수고도 밉고 내 인생은 슬픔뿐이며 밤에도 잠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무래도 전도자는 상담을 받거나 우울증 치료제 처방을 받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 이래도 될까요? 네, 됩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신자라고 해서 언제나 입이 귀에 걸린 채 웃으며 살 수는 없습니다. 욥은 재에 앉아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다며 탄식했고, 예레미야는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라면 하고 외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에덴 동산이 아닌 에덴의 동쪽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에덴의 동쪽 땅에서 일생 수고하여야 겨우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어 결국 흙이 되어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때로는 우울해하고 때로는 탄식도 하고 잠을 못 이루는 밤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삶의 현장에는 우울과 탄식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자는 삶의 또 다른 현실에 주목을 합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24)

하나님은 에덴의 동쪽에 사는 인생들에게 매일매일 기쁨의 선물을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대단하거나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먹고 마시고 일하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즐겁게 먹는 기쁨, 밥을 먹고 나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 그리고 건강한 몸으로 하루 일을 마칠 때 느끼는 보람, 이런 것들이 어울러질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낍니다. 일상 생활 속에 주시는 작은 기쁨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것들입니다.

이런 기쁨은 앞에서 전도자가 했던 쾌락 추구와는 결이 사뭇 다릅니다. 하나님과 이웃이 없는 자기 중심적이고 우상 숭배적인 쾌락 추구는 결국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일상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고 이웃과 함께 나눈다면 이보다 더 지속적으로 기쁨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보통 우리는 우리의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먹고 마십니다. 보통 우리가 일하는 목적은 우리가 명성을 얻고 성공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식사와 운동, 노동과 휴식 등 하루하루 일상의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저 우리 자신의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지렛대 정도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전혀 다른 관점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삶을 보게 되면 날마다 우리를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신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고 있는 일은 어떻습니까? 얼마전 김 모세 목자님이 특강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삼중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셈입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우리는 이런 선물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기회를 얻습니다.

신약 성경도 같은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신약은 죽음 너머의 삶을 말하고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 다시 있지 않을 미래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맛보는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표적으로 잔칫집에 참석하셔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죄인들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잡수시기를 즐겨 하셨습니다. 오죽하면 바리새인들로부터 먹기를 탐하는 자라는 별명을 얻으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하신 일은 놀랍게도 한 식탁에 둘러앉아 떡과 포도주로 유월절 만찬을 나누신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무엇을 하든지’에는 당연히 먹고 마시고 일하는 것이 다 포함됩니다. 우리는 놀라운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매일 감사해야 합니다. 그분의 선물을 매일 기뻐하며 누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을 기뻐하지 않으면 그 선물을 주신 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음식과 음료와 일을 기뻐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삶의 의미는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선물을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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