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도서

하나님의 때를 따라

이창무 2023. 9. 17.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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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도서 제3강 / 이창무

하나님의 때를 따라

말씀 / 전도서 3:1-15  
요절 / 전도서 3:14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미국의 작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제목의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노인으로 태어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어려지는 벤자민과 그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점점 늙어가는 데이지라는 여인과의 엇갈린 운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사람은 모두 역방향이든 순방향이든 시간에 매여 있으며 그 운명에 순복할 수밖에 무기력한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탐구해 보았던 전도자가 이번에 다루려고 하는 주제가 바로 ‘시간’ 입니다. 전도자는 ‘시간 안에 우리 삶의 모습은 어떨까?’ ‘시간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1)”

전도자는 시간에 관하여 우리에게 결론부터 제시합니다. 그의 결론은 모든 일이 이루어질 만한 적절한 때 곧 시작하고 끝을 맺을 타이밍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에 대한 감각이 중요한 문학 장르가 있습니다. 바로 산문에는 없는 운율이 존재하는 ‘시’입니다. 그래서인지 전도자는 2절부터 8절까지 일정한 패턴이 반복되면서 리듬감을 느끼게 해 주는 한 편의 시로 시간 안에서 우리의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먼저 사람이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창조주가 보내신 때에 태어나는 것이고 또 부르시면 죽는 때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출생과 죽음을 조절할 수 없습니다. 출생과 죽음 사이에 사람은 많은 일들을 경험합니다. 농사를 짓는다면 작물을 심기에 적합한 봄이 있고 추수하기에 적합한 가을이 있습니다. 가축을 키운다면 키운 가축을 죽여야 할 때가 있고, 병든 것을 치료해 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건물도 헐어야 할 때가 있고 새로 건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장례식처럼 울고 슬퍼해야 할 때가 있고, 결혼식처럼 웃고 춤을 추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적군을 향해 돌을 던져야 할 때가 있고, 전투가 끝난 후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 돌을 모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부부 관계를 해야 할 때가 있고 또 멀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물건을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고, 끝까지 지켜야 할 때가 있고 버리는 편이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살다 보면 극심한 슬픔과 고통으로 인해 옷을 찢어야 할 때가 있고 시간이 흐른 후 찢었던 옷을 다시 꿰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배 때에 ‘아멘’을 해야 할 때가 있고 ‘아멘’을 하면 어색한 때가 있는 것처럼, 말도 해야 할 때가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있습니다. 개인 차원에서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듯이, 국가 차원에서 전쟁을 벌어야 할 때가 있고 평화 협상을 추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전도자가 이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우리 삶이 마냥 긍정적인 것만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며, 낙관적인 것만도 아니면 비관적인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긍정과 부정, 낙관과 비관이 한데 어우러져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잘 나가고 있다고 해서 계속 잘 나가라는 법은 없습니다. 곧이어 꺾이는 때가 오기 마련입니다. 내리막길로 가기 싫어도 갈 수밖에 없는 때가 찾아옵니다. 반대로 지금 인생의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고 있다고 해서 계속 내려가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곧이어 바닥을 찍고 다시 올라가는 때가 오기 마련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딱 삼 년 동안 벤처 회사에서 고생하고 나면 회사가 코스닥에 상장될 것이고 내가 받은 스톡 옵션을 팔아 큰 돈을 벌게 될 것이고, 이어서 미국 IT 회사에 스카우트가 되어서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게 될거야.” 삶이 이렇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삼 년 뒤 이 모든 계획은 다 꿈이었고 다음날 회사에서 월급이 제때에 나올 지 고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지만, 현실에서 인생의 계절이 거의 완전히 우리 손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 전도자가 깨닫게 된 바가 무엇입니까?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9)

전도자는 사람의 수고가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질문합니다. 물론 이익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여기서 수고는 시간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시간을 통제하기 위해 계획표를 세웁니다. 가급적 분 단위까지 쪼개서 꼼꼼하게 작성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것도 모자라 형형색색으로 색칠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 계획표대로 일이 진행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을 합니다. 조금이라도 늦어질 것 같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일정을 맞추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왜 모든 수고가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전도자의 시에서 표현한 대로 우리 인생은 플러스가 있으면 그만큼 마이너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합치면 어떻게 됩니까? 제로입니다. 인생의 흑자를 남기려고 세웠던 야심찬 계획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고생의 기억만 남긴 채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고 맙니다. 내 인생의 시간을 내 뜻대로 통제하려고 했던 수많은 시도들이 마침내 헛수고였음이 드러납니다. 얼마나 우울한 일입니까? 다만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삽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인생에 굴곡이 많아서 지루할 틈이 없다는 사실에 그나마 조금의 위안을 받을 뿐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시간에 관한 진술을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전도자의 멋진 시는 이야기의 반쪽에 불과했습니다. 이어지는 산문을 통해서 전도자는 인생이란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우리에게 두 가지 위로와 한 가지 도전을 던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시간 속에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11b)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점이 바로 인간과 짐승의 중대한 차이점 중 하나입니다. 죽은 뒤 내가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강아지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50년 뒤 지구가 어떻게 될까 연구하는 고양이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직 사람만이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과거의 역사를 알고자 하고, 먼 미래까지 예측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영원과 시간에 대한 개념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미래를 알고 싶지만 아무도 그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미래에 대한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다면 그냥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미래가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지난 주 런치 미팅 때 “당신을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미래’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다가올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낍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갑작스럽게 일어날까 두려워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전도자는 시간의 주인이 누구이며 어떤 분인지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11a)

시간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도자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이 시간의 아름다움을 과연 누가 볼 수 있을까요?

저는 2016년 러시아 수양회를 참석한 후에 모스크바에 있는 트레챠고프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화가 알렉산드르 이바노프가 그린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란 제목이 붙은 세로 5미터, 가로 7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멀리서 보니 매우 웅장하고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전혀 다른 모습이 보였습니다. 울퉁불퉁 거친 붓놀림 자국과 도무지 무엇을 그린 것이 알 수 없는 이상한 형체들과 칙칙한 색깔들이 보였습니다. 한 조각만 떼 놓고 본다면 얼마든지 유치원생의 그림보다도 더 못한 그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조각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었을 때 큰 감동을 주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시간 속에서 우리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합니다. 그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부분적인 것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모습은 몹시 초라해 보입니다. 어떤 것은 너무 부끄러워서 남들 앞에서 감추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차리라 이 시간을 내 인생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마지막을 한 눈에 다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말로 할 수 없는 슬픔과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전부 엮여 어떻게 완벽하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가장 베스트의 타이밍에 이루어지게 하심으로 지금도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빚어 나가고 계십니다. 

그러면 해 아래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인생을 볼 수 있을까요?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심지어 타락한 세상의 추한 것까지도 그분의 주권적인 계획과 조화롭게 만드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우리 삶을 보게 되면 ‘지금 내 삶이 왜 이럴까?’ 하는 물음표에서 ‘앞으로 하나님이 내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어 가실까!’ 하는 느낌표로 바뀌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다음과 같이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미래에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현재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빛 아래에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일을 다 알지 못합니다. 앞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이 중요합니다. 현재에 집중할 때 우리가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12,13)

전도자는 현재의 삶 속에 하나님이 날마다 주시는 선물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선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입니다. 12절에 따르면 이것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행이라고 하면 이웃을 돕거나 구제하는 것과 같은 이타적인 행위를 주로 떠올립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힘써 실천해야 할 선행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일상 생활 속의 은혜를 감사히 받고 기쁨으로 누리는 것 역시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선하고 놀라운 통찰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맞는 말입니다. 엄마가 정성껏 만든 음식을 자녀가 “너무 맛있어요.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면서 맛있게 먹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보다 더 엄마를 기쁘게 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된 우리에게 날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주시고 때를 따라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고 계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잘 받아서 기쁨으로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선행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 현재 우리 삶에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은 열망이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현재를 희생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내일은 월요일입니다. 출근하거나 수업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고 우울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일의 염려까지 오늘로 앞당겨올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내일은 내일이 염려하도록 내버려 두고 오늘 일만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여기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일 일도 너무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내일에는 내일의 괴로움이 있겠지만 또한 내일의 즐거움도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이 많은 인생길 가운데 우리에게 날마다 또 새로운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빛 아래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섭리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14a)

우리는 마침내 여기서 왜 하나님이 때를 정하셨는가라는 물음의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또 하나님이 정하신 때는 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그 위에 더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길 원하시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 길을 바꾸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때를 정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14b)

하나님께서 때를 정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그이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때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완전히 의존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와 무력함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그분은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만약 때를 우리 자신이 정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 계획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미래가 펼쳐진다면 어떨까요? 너무 좋은 일 아닙니까? 정말 신날 것 같나요?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게 될 것입니다. 안 그래도 교만한 인간들의 교만을 하늘을 찌르게 될 것이 뻔합니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영화 ‘타이타닉’의 주인공 잭 도슨처럼 뱃머리에서 양팔을 벌리고 “나는 세상의 왕이다”라고 외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절대 가라앉지 않는 배라고 불렸던 그 배가 침몰하고 결국 잭은 차가운 바다 속으로 수장되고 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의 왕이시며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섭리에 속한 일입니다. 이 진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분 앞에 나아가 엎드려 경배를 드리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바울처럼 소리 높여 외쳐야 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3-36)

우리의 인생 이야기를 만약 넷플릭스 드라마로 만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주인공인 나 자신을 포함해서 여러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같이 어디 한 군데 이상 결함을 가진 인물들입니다. 간혹 뜻밖의 기쁨을 얻는 순간도 있지만 해결되지 않는 갈등과 도무지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장애물들을 만날 것입니다. 마침내 이루고자 했던 것을 다 이루지 못한 채 미완성으로 마지막 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인생 이야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모순이 있고, 대답을 찾지 못한 수많은 질문들이 남게 될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암만해도 넷플릭스에서 내 인생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드라마로 만들기에는 너무 평범하고 칙칙하고 하찮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인생 이야기가 더 큰 이야기의 일부라면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신 위대한 드라마에 내가 속해 있다면 어떻습니까? 하찮게 보였던 내 삶의 순간 순간들이 사실은 그 드라마를 완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순간이라면 어떻습니까? 설명되지 않은 모순과 대답을 찾지 못한 질문들에 대한 설명과 해답을 그 드라마 전체를 보고 나면 얻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넷플릭스든 어디든 드라마로 만들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닐까요? 주어진 시간 속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큰 그림의 일부입니다. 지금 당장은 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 삶을 아름답게 만드실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즐거워하며 시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바로 전도자가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입니다. 내 안의 한계를 넘어 일하시는 크신 주님의 은혜가 우리 삶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바라봅시다. 우리가 인생의 처음과 끝을 주관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모든 삶을 맡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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