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도서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창무 2023. 9. 3.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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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도서 제1강 / 이창무

모든 것이 헛되도다

말씀 / 전도서 1:1-11
요절 / 전도서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막내딸이 어릴 때 제가 병원 놀이를 함께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의사는 막내가 맡고 저는 늘 환자 역할이었습니다. 저는 감기, 배탈, 두통, 심장병 등 다양한 증상을 호소했습니다. 그때마다 막내는 장난감 주사 한 방을 놔주고는 완치를 선언했습니다. 저는 무조건 벌떡 일어나 의사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병원 놀이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실제 병원에서는 사람들이 진짜로 고통스러워합니다. 의사라고 해서 모든 병을 주사 한 방으로 완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아예 치료에 실패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놀이와 현실 세계의 차이를 배우는 일은 종종 괴롭고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전도서는 우리가 실제 세계에서 살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부터 그 선물의 포장을 하나씩 뜯어보고자 합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1)

전도자란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설교자 또는 교사라고 하는 편이 더 와닿을 수 있습니다. 그는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 되어 누구보다 많은 연구와 인생 경험을 해 본 사람입니다. 이런 인생 대선배가 전도서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이 땅에서 삶은 짧고 유한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꿈꿔왔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불로불사, 늙지도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생존에 대한 욕구보다 더 강력한 것이 있겠습니까? 인간은 원초적으로 자신이란 존재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유지되기를 원합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권력자들은 물론 당장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죽지 않으며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는 삶에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우리 인생들에게 전도자는 다음과 같이 직설적이고 냉정한 한 마디를 던지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2)

전도자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흔히들 생각하듯이 이 구절을 우리 삶에는 어떤 목적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로 이해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이것은 전도자의 관점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헛됨’은 어떤 의미일까요?

헛되다는 단어의 원어는 히브리어로 ‘헤벨’이라고 합니다. 헤벨은 본래 ‘숨’ 또는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추운 겨울날 밖에서 숨을 쉬면 하얗게 입김이 나옵니다. 그 순간 분명히 입김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없어집니다. 영원한 영향력이나 지속적인 흔적을 세상에 남기지 않고 잠깐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헤벨입니다.

전도자는 우리 삶이 헤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입김과 같고, 피었다가 금방 없어지는 안개와 같고, 잠깐 우리 땀을 식혀 주고 곧장 떠나버리는 바람과 같다는 말입니다. 저는 젊을 때 어른들로부터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가더라’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그때는 ‘그저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 자신이 똑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눈 한 번 깜빡인 것 같은데 오십 대 중반이 되어 있습니다. 또 눈 한 번 더 깜빡이고 나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이 땅에서의 삶은 짧고 유한합니다. 모세도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다윗도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 103:15,16)

모세와 다윗의 말은 삶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누구도 전도자의 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애써 그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며 살아가곤 합니다. 마치 나는 늙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을 사람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다를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숱하게 다른 사람의 장례식장에 가면서도 언젠가 부고장에 내 이름이 올라갈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우리에게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꾸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기가 두려워 고개를 돌리려 합니다. 그래도 전도자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전도자가 이렇게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를 허무주의자나 염세주의자로 만들려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평생 은둔형 외톨이로 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자가 이 말을 힘주어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죽음을 준비할 때만이 삶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전도자는 우리의 헛된 기대와 가식을 벗겨내려 하려는 것뿐입니다. 전도자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또는 충분히 오래 살지 못한다면 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전도서 전체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대답에 이르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신학자 더글러스 윌슨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현명한 신자는 자신의 끝의 길이를 아는 사람이다.” 이 주장은 너무 간단해서 뻔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는지 생각해 보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유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고 언젠가 죽습니다. 이 현실을 회피하지 말고 직시할 때,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의 길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전도서 말씀을 통해 이 길을 발견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이 땅에서 수고는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 중에 수고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직장인은 회사에서 일하느라 수고가 많습니다. 주부는 청소, 식사 준비, 빨래, 자녀 양육 등 가사 노동으로 많은 수고를 합니다. 학생들은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는 기형적인 입시 경쟁 때문에 어린 아이들까지 고생이 많습니다. 너무 딱해서 그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이번에 제가 북미 수양회에서 만난 선교사님들 중 몇몇 분이 외국에 나와보니 한국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산다는 것이 느껴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는 것입니까?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는 내 자녀들이 승진하고 성공하고 중요한 인물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서 어떻게 하든 내 인생을 플러스 인생으로 만들기 싶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전도자는 어떻게 말합니까?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3)

전도자는 ‘우리의 수고가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서 ‘수고’라는 단어는 전도서에서 항상 부정적인 뉘앙스로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이 뉘앙스를 살리자면 고생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좋습니다. 유익이라는 단어는 상업 용어로 장사하고 나서 남은 이익이나 재정적인 흑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결국 전도자의 말은 ‘우리가 고생 고생하면서 살아봐야 남는 것이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물론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니고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입니다.

왜 남는 것이 없을까요? 4절부터 8절까지 전도자는 그 이유는 삶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찾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인간 세계와 자연 세계를 관찰하면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내었습니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기까지 부지런히 자기의 길을 달려 갑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다음날 다시 동쪽에서 떠오르기 위해 잠도 못 자고 밤새도록 동쪽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바람도 평균 풍속 초속 8.7미터로 말 그대로 바람같이 쌩하고 끊임없이 달립니다. 강물 또한 바다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려갑니다. 이들처럼 사람도 다들 바쁘게 살아갑니다. 내 달력은 ‘월화수목금금금’이라며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어제도 달렸고 오늘도 달리고 내일도 달려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태양은 결국 떴던 곳으로 돌아와 있습니다. 바람은 한 번은 남에서 북으로, 또 한 번은 북에서 남으로 불게 되니 결국 제 자리에 돌아와 있습니다. 강물은 바다를 다 채울듯한 기세로 힘차게 흘러왔지만 다 채우지 못합니다. 결국 수증기가 되어 하늘의 구름이 되었다가 비가 되어 다시 강물에 합류하고 맙니다. 돌고 돌아 제 자리입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살긴 하는데 결국 제 자리를 맴맴 도는 것 같습니다. 작년이나 올해나 크게 다르지 않고 지난 달이나 이번 달이나 비슷비슷합니다. 자동 인형처럼 일어나서 출근하고 피곤에 젖어 집에 돌아와 눕는 삶의 연속일 뿐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이런 삶에서 탈출구를 찾아 이직을 하기도 하고 이사를 가기도 하지만 결국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이런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권태와 피로감입니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기대도 있고 설렘도 있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뭔가를 이루었다는 보람과 만족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우리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마치 만족을 모르는 바다와 같습니다. 사람은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젠 됐어. 아주 만족해. 나는 전부 보았고 전부 말했고 전부 들었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내놓고 받아들였어.’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지긋지긋해.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 해야 해?”

이런 삶의 현실을 생각할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너무 우울합니까? 너무 답답합니까? 그런데 전도자는 이 구절 속에 우리의 관점을 전환시킬 수 있는 표현을 감추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해 아래서’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해 아래 세계와 하나님이 해 위의 하나님이 계신 세계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합니다. 우리의 수고가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 아래의 세계, 헤벨의 영역 속에 속한 진실입니다. 그러나 해 아래가 아닌 그 너머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저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기만 한다면 우리의 수고는 헛되지 않고 영원히 그 가치가 보존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전도자와 동일한 요점을 제시하신 바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한 비유에서 하나님은 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부자가 죽었을 때 그의 수고는 아무 유익이 없었습니다.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우리 삶은 정말 아무런 유익이 없을까요? 우리가 죽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유익을 남길 수 있는 대안을 제안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예수님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땅에 보물을 쌓아 두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빼놓고 수고하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부요한 사람이 된다면,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면, 우리 삶의 가치는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재확인해 줍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셋째로 이 땅에서 삶에는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새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에게는 더욱 더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는 듯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백 년이 넘은 집에서 사는 일이 다반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삼십 년만 지나도 재건축을 하려고 시도합니다. 안전 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고 경축 플래카드를 내거는 정말 이상한 나라입니다. 최신형 플래그십 스마트폰은 백만원이 훌쩍 넘는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새 것은 옛 것보다 훨씬 더 좋을 것이라는 기대, 인간 세상은 점점 더 진보하고 발전한다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과연 전도자는 어떤 말을 들려주고자 합니까?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9, 10)

전도자는 해 아래에 새로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거는 미래에도 재현될 것이고 현재에도 발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과거의 복제일 뿐이지 유일성을 가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누군가 이런 반론을 제기할 지 모릅니다. “예전에 없던 것이 얼마나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줄 아십니까? 예를 들어 사람의 말을 이해하고 척척 대답해 주는 ChatGPT 같은 인공 지능이나 수소를 넣고 달리는 자동차 같은 것은 새롭고 혁신적인 것들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현대의 민주주의와 고도화된 자본주의 시스템은 고대에는 흉내조차 내기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하십니까?”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전도자가 말하는 새로움은 인간이 창조성을 발휘해서 만들어 낸 발명품의 새로움이 아닙니다. 인간을 충분히 만족시키고 인생의 반복되는 순환 고리를 깨트릴 수 있는 새로움을 말합니다. 이런 종류의 새로움은 아직까지 인간 사회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인류는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력의 극대화를 이루어 120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73억 인구 중 10억 명 이상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고 12초에 한 명씩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핵 분열이라는 놀라운 새 기술이 발견되었지만 인류는 그것으로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핵무기를 개발했습니다. 인류가 정말 진보하고 있을까요? 기원 전 시대 사람이나 21세기 사람이나 결국 사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요? 이제는 새로운 것이 나온다 하면 기대하는 마음보다는 인간들이 또 무슨 사고를 칠까 어떤 비극이 일어날까 염려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새로움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는 왜 새롭다는 착각을 하게 될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인간의 유한한 기억 때문입니다.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11)

과거 세대에 대한 기억이 상실되었기에 현재와 미래 세대의 것들도 사라지게 될 것임을 전도자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기성 세대는 ‘라떼는 말이야’ 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 주고자 애를 씁니다. 다음 세대의 기억 속에서 계속 자신이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가 자신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은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괜히 맨날 옛날 이야기만 하는 꼰대라는 핀잔만 들을 뿐입니다. 다음 세대는 앞 세대가 겪었던 일들을 똑같이 겪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이미 있었던 일인 줄 모르고 자신들만 겪는 새로운 일인 양 착각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마련입니다.

근래 ‘유발 하라리’라는 이스라엘 출신의 미래학자가 쓴 책들이 한 동안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유비쿼터스 정보통신이 인공지능과 접목되고 뇌과학이 인간과 흡사한 로봇을 생산하는 차원에 곧 올라가 인간이 마침내 끝없는 노동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격의료 시스템과 신약의 개발로 노화를 억제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인간 복제로 비로소 영생을 얻게 되는 날이 멀지 않은 미래에 찾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날이 오면 인간은 신처럼 되고 모든 종교는 소멸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과연 그렇게 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설령 그런 기술이 개발된다 하더라도 권력과 부를 차지한 소수의 사람의 몫이 될 뿐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 아래에 새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새로운 것에 현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역사 상 전무후무한 대단한 것이 나왔다고 너무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습니다. 한 때의 흥분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또 실망과 탄식이 시작될 것이 뻔합니다.

그러면 새롭게 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새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 길이 무엇일까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만약 예수님께서 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허무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썩어 없어질 헛된 이 세상의 부와 권력과 명예에 평생 매여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어 새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해 아래 세상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겉사람은 점점 더 낡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해 위에 계시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거짓 희망에 속지 말고 장차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참된 희망을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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