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도서

예배하며 살아가기

이창무 2023. 10. 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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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도서 제6강 / 이창무

예배하며 살아가기

말씀 / 전도서 5:1-7
요절 / 전도서 5:1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앞선 전도서 4장에서 전도자가 새로운 단락을 시작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해 아래에서 무엇 무엇을 보았도다”하는 표현입니다.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전도자가 본 해 아래 현실이 무엇입니까? 전도자는 학대가 일어나는 현장을 보았고, 사람들이 시기하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았고, 혼자 살며 외로운 사람을 보았고, 권력과 명성의 허무함을 보았습니다. 두 눈으로 이 모습을 지켜본 전도자의 마음이 어떠할까요? 답답하고 슬프고 화가 나고 힘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시 계속 세상만 바라보면 더 이상 살맛이 안 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전도자는 눈으로 해 아래 세상을 보는 것을 잠시 멈춥니다. 그 대신에 발과 귀와 손과 입과 심장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에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합니다. 왜 일까요? 오직 참된 예배를 통해서 해 위와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능력과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갈 때 우리는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까?

첫째, 발을 삼가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1a)

전도자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네 발을 삼가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보통은 자기 발로 걸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걸어 다닙니다. 그러나 종종 발걸음을 신경 써서 조심스럽게 내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가 언제 일까요? 예를 들자면 등산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잘못 발을 헛디디면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치지 않으려면 정해진 등산 루트를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처럼 전도자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바르게 예배 드리는 길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바르게 예배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을 주의해야 할까요? 바르게 예배 드리기 위해서는 예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제 어머니는 생전에 항상 시어머니께 한국 은행에서 새로 발권한 지폐를 추석 선물로 드리셨습니다. 왜냐하면 국수 교회 권사이셨던 할머니께서 한 번도 쓰지 않은 지폐로 헌금을 드리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꼭 이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헌금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헌금 봉투에 감사 제목을 찾아서 하나씩 적다 보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동이 차오르게 됩니다. 또 예배 드릴 때 입을 옷도 신경 써야 합니다. 늘 검정색 양복에 빨간 넥타이를 맬 필요는 없더라도 깔끔하고 품위 있는 옷을 입는 것이 예배의 자리에 어울립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배 시간에 늦지 않도록 오는 것입니다. 예배 시작 시간에 딱 맞춰 오려고 하면 늦는 경우가 자주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Happy Lord’s Day Time’이 있습니다. 적어도 예배 시작 10분 전까지 와서 다른 사람과 인사하며 안부를 묻거나 개인 기도를 하며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회사나 수업에는 지각하지 않기 위해 전철역부터 뛰어 가면서 예배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늦게 온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직장 상사나 교수님보다도 못한 분인가요?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는 무엇보다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배에 몰입해야 그 예배로부터 하늘의 기쁨과 평강과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수요 특강에서 다루었던 청교도 운동의 주요 인물 중에 리처드 스틸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흐트러짐’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신자가 영적으로 실패하는 주된 원인이 흐트러진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흐트러진 예배를 드리지 않으려면 특히 스마트폰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 중에 울리는 카카오톡 알림을 확인하다가 자칫 영혼이 삼천포로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또 예배에서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꾸 들락날락하면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예배에 대한 집중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득이한 긴급 상황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최대한 자제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을 온전히 예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몸은 예배의 자리에 있으나 생각은 다른 곳으로 가출해 있다면, 그 예배가 유익이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릴 때 걸어가야 할 바른 길에 대해 몇 가지 살펴보았습니다. 현재 우리는 이 길을 제대로 가고 있을까요? 아니면 이 길에서 벗어나 있을까요? 만약 벗어난 부분이 있다면 다시 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의식을 하고 애를 써야 하니까 힘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것이 습관이 됩니다. 한 번 습관을 들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훨씬 더 수월해 집니다. 공동체 속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습관을 가지게 되면 그것을 문화라고 부릅니다. 습관이 되고 문화까지 되고 나면 바르게 예배 드리는 것이 하나도 어렵지 않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각 사람이 예배의 자세와 태도를 새롭게 하고 그것이 우리의 습관이 되고 더 나아가 우리 교회의 문화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귀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1b)

다음으로 전도자는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까이 한다는 것은 한 말씀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자세를 표현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마음이 있으면 강대상 근처에 가까이 앉으려고 합니다. 예전에 여름 수양회를 하면 서로 제일 앞 자리에 앉으려고 책을 가져다 미리 맡아 놓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나는 할 것 다 했다고 여깁니다.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 자체에 가장 큰 의의를 둡니다. 그리고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예배가 너무 정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지루하다고 느낍니다. 예배에 뭔가 다양한 퍼포먼스와 볼거리가 있다면 만족할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복음적인 예배는 눈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귀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배는 콘서트가 아닙니다.

중세 교회가 타락한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그 시대 교회는 사람들의 눈을 만족시키는 것에 올인했습니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고딕 양식의 첨탑과 거대한 성당 건물을 통해 사람들에게 압도감을 주고자 했습니다. 교회 건물 주위에는 아름다운 조각상과 그림들이 줄지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사제는 번쩍번쩍 빛나는 사제복을 입고 예배 도중 연기를 피우기도 하는 등 화려한 예전을 시행했습니다. 반면에 설교는 채 몇 분이 넘지 않을 정도로 짧았습니다. 게다가 전부 다 라틴어로 했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무 문제 없다고 여겼습니다. 예배의 핵심이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바로 이런 예배를 성경적인 예배로, 복음적인 예배로 되돌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화려한 예전을 철폐했습니다. 그리고 예배의 중심에 말씀 선포를 두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 중에는 설교 시간이 두 시간인 경우도 흔히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일곱 시간 설교를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철저하게 눈으로 보는 예배가 아니라 귀로 듣는 예배를 지향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후예입니까?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후예입니까? 아니면 종교 개혁자들의 후예입니까? 당연히 우리는 종교 개혁자들의 후예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는 눈을 만족시킬 만한 것들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대신 우리는 말씀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말씀이 양식이고 위로이며 힘이 됩니다. 말씀이 우리 영혼을 소생시켜 주고 우리의 성품과 인격을 빚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 기울여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늘 목마른 사슴처럼 갈급한 심령으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입을 함부로 열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2,3)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함부로 입을 열지 말고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예배 드리며 하나님 앞에 말을 하는 때가 언제 입니까?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에 대한 권면은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공적인 예배에서 회중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 드리는 상황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전도자는 이럴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곧 함부로 입을 여는 것과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는 것입니다. 함부로 입을 연다는 것은 공적인 기도에 적절하지 않은 사적인 내용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특정한 정치인이나 정당이 선거에 이길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한다던 지, 기도의 자리를 빌려서 자기 자랑을 한다던 지 누군가를 저격하는 내용의 기도를 섞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기도가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불편하게 만드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또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는 것은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기도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자꾸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소위 말하는 중언부언의 기도가 되기 쉽습니다. 또는 부정확하거나 엉뚱한 기도 제목을 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공적인 기도가 이런 기도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를 사전에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미리 준비하면서 혹시 불필요한 내용이 들어가 있는지 확인하고 걸러내야 합니다. 이 기도를 넣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애매하다면 차라리 안 하는 편이 좋습니다. 또한 최근의 상황을 잘 반영이 되도록 기도 제목을 업데이트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따로 특별히 알아볼 것도 없이 평소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결국 좋은 기도는 어떤 기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꼭 있어야 할 것은 다 있고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이 간결하면서 공동체 전체를 품고 있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가리켜서 제사장적인 기도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마치 제사장이 온 백성의 상황을 두루 살핀 후 공동체 전체를 그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왠지 나와는 안 어울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에 근거해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라는 만인 제사장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제사장적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우리의 이런 기도를 주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사 우리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크신 일들이 온전히 나타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손으로 서원한 것을 갚아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4)

그 다음 전도자는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갚으라고 권면합니다. 서원이 무엇입니까? 서원은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어 주시면 나도 무엇을 하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을 가리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이 벧엘에서 돌 베개를 하고 누워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어 아버지 집으로 평안히 돌아가게 하시면 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맹세하는 모습이 서원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한 번 서원을 했으면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그것도 뒤로 미루지 말고 당장 지체없이 갚아야 합니다.

보통 사람이 서원을 하는 그 당시에는 서원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서원이 이루어진 다음입니다. 막상 원하는 바를 얻고 나면 마음이 변하기도 합니다. 대놓고 서원을 갚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부분 ‘지금은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여건이 좋지 않다. 언젠가는 갚겠다.’ 하면서 계속 미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서원을 갚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괜히 부담스럽고 꺼려지게 됩니다. 한 동안 계속 시달립니다. 이제는 잊었나 싶다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다시 떠올라서 양심을 괴롭히게 됩니다. 갚지 않은 서원이 남아 있을 때 우리는 예배자로 바로 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5)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아예 서원하지 않는 편이 더 났습니다. 서원을 아예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필요한 때는 서원이 내 인생 신앙 여정에서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야곱의 경우가 그러했고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목자 학교를 졸업한 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앞으로 목자로 살겠다고 목자 선서를 합니다. 결혼할 때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고 섬기겠다고 결혼 서약을 합니다. 또 매달 일정한 헌금을 드리겠다고 약정하기도 합니다. 이런 약속들이 흔들리는 삶 속에서 나를 지탱해 주는 닻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전도자는 서원을 함부로 하지 말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말을 전달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너무 쉽게 서원하는 이유는 무슨 수를 쓰든지 어떻게 하든 일을 이루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하나님까지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원을 하기 전에 정말 이 일이 서원을 할 만한 일인지부터 따져보고 또 서원이 이루어진 후 갚을 수 있는 서원인지를 심사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서원을 이루어 주신 후에는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합니까?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6)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서원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때 흔히 하는 핑계가 그때 서원한 것은 내 실수였다고 잠시 정신이 나가서 헛소리를 한 것이라고 둘러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약속은 이런 말 한 마디로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도 보통 큰 착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이것은 범죄하는 것이요, 스스로 하나님의 징계를 요청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백성이요 자녀 된 우리 역시 신실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섯째,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7)

지금까지 우리는 예배자의 발과 귀와 입과 손을 살펴 보았습니다. 예배자는 발걸음을 조심해야 하고 귀로 말씀을 들어야 하고 입으로 제사장적인 기도를 드려야 하고 손으로 서원한 것을 갚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배자의 심장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도자는 예배자의 심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경외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나 찬란하고 그분의 위엄이 너무나 커서 거기에 압도 당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꽤 규모가 큰 미술 대회에서 입상을 한 덕분에 상장을 받으려고 서울 시장 앞으로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얼마나 떨리던 지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에 제 귀에 또렷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물며 나의 창조자시요 온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내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어떻게 떨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오는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예배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기꺼이 자신을 활짝 열어서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더 말할 나위 없는 기쁨과 감격을 줍니다.

어떻게 떠는 것과 즐거워하는 것이 같이 있을 수 있을까요? 도무지 공존할 수 없는 상반된 감정 아닐까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는 이것을 경험합니다.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떨며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다닙니다. 떨림이 있어야 즐거움을 누리고 즐거움을 맛보는 사람은 떨림이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하게 말하던 전도자가 예배에 대해서만은 그 답지 않게 명확하고 단호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예배 드리는 우리에게 발을 조심하고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듣고 입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손으로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배 드리는 우리의 심장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배에 관한 전도자의 교훈을 마음에 깊이 새김으로 어느새 타성에 젖은 우리 예배를 새롭게 하고, 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떨림과 즐거움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통해 주님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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