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도서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이창무 2023. 12. 1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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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도서 제14강 / 이창무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말씀 / 전도서 11:7-12:8
요절 / 전도서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벌써 12월 중순입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2024년이 시작될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서로에게 “Happy New Year!”라고 인사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새해가 온 것이 별로 해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해가 되었다는 뜻은 곧 한 살 더 나이를 먹게 되었다는 뜻과 같기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는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것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몸과 내면의 자아가 분리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몸은 분명 예전 같지 않은데 내면은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각과 내가 나를 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적지 않은 당혹감을 느끼곤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나이 듦 자체를 부정하고 정신 승리를 시도해 볼까요? 아니면 나이 듦을 받아들이고 우울하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서 전도자는 우리에게 이 두 가지 길을 뛰어넘어 현실에 발을 딛고 더욱 활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세 가지 명령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현재를 즐거워하라’는 긴박한 명령입니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11:7)

전도자는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저는 백 퍼센트 동의합니다. 제 취미는 사진 찍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진을 가리켜 빛의 미학이라고 부릅니다. 해 뜨기 전후의 빛이 가장 아름답다고 해서 흔히 이 시간을 매직 아워 또는 골든 아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진 애호가들은 빛이 그려내는 이 아름다움의 순간을 포착하기 이른 아침에 밖에 나갑니다. 하지만 다른 시간에도 빛은 늘 아름답습니다. 한낮의 밝은 태양과 떠가는 흰구름을 보는 것도 아름답고 한 밤에 달빛과 별빛을 보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빛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살아 있기에 눈을 떠서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봄에 핀 화려한 꽃들을, 여름의 푸른 바다와 가을의 고운 단풍과 겨울의 흰 눈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볼 때 우리 마음은 기쁘고 즐겁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두컴컴한 방구석에 처박혀 있기만 한다면! 이 모든 아름다움을 맛보고 즐길 기회를 그냥 다 날려 버린다면! 그저 시간만 때우고 있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8a)

그래서 전도자는 사람이 여러 해를 사는 동안에 항상 즐거워하라고 명령합니다. 내가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끝까지 찾아내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그것을 즐기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권면이지만 전도자가 특별히 간곡하게 당부하고 싶은 대상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9a)

전도자는 청년들을 주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청년이 누구인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법령이나 조례 대부분은 만 18세부터 39세까지를 청년으로 정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우리 가운데 청년이 아닌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UN에서는 18세부터 65세까지를 청년으로 봐야 한다는 새로운 연령 구분법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농촌에 가면 65세 정도 되는 분이 청년회장을 맡고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전도자의 기준입니다. 전후 맥락을 볼 때 전도자는 몸과 마음이 노후의 쇠락 과정에 아직 들어가지 않은 모든 사람을 청년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 대부분은 아직 청년에 속해 있다고 봐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자의 권면은 우리보다 어린 사람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전도자는 말합니다. “청년들이여, 청년의 때를 즐겨라. 네 마음과 눈이 원하는 길을 따라 살아라.” 이 말을 대충 들으면 젊을 때에 먹고 마시며 향락에 빠져 지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이미 2장에서 이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길게 논증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네 마음대로 살아라’는 말로 가볍게 들을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아직 젊으니 온몸으로 젊음을 최대한 활용하라. 네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관계성 면에서 왕성할 수 있는 시절에 최대한 즐거워하고 행복하고 유쾌하게 살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명령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 또한 선물로 주셨습니다.

미국 뉴 세인트 앤드류 대학의 철학교수인 더글라스 존스의 저서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기독교 문화가 교회사 곳곳에서 실패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불충분한 신학 교육이나 형편없는 교리나 부적절한 복음 전도나 약한 리더십 때문이 아니다. 바로 기쁨의 결여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기쁨과 즐거움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이고 핵심이 되는 요소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공동체가 세워지면 복음 전도가 저절로 힘차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음 세대가 자연스럽게 부모 세대의 신앙과 가치관을 따라 살고자 할 것입니다.

기쁘고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쓴 뿌리를 키우며 인생을 우울하게 사는 것은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필요한 것을 날마다 공급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짜증 내고 화내는 대신 작은 일에 감사하고 웃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한 것을 누리며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미래를 생각하라’는 차분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8b)

아쉽게도 우리네 인생은 항상 밝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가 지고 캄캄한 어둠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캄캄한 날들이 언제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일차적으로 노년이 되어 질병이 찾아온 때를 의미합니다. 궁극적으로 인생의 모든 여정을 마치고 눈을 감게 되는 날입니다. 눈을 감으면 더 이상 해를 보지 못합니다.

전도자는 12:3-8에 그 날이 이르렀을 때 일어날 일들을 그림 언어로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노년이 되면 손을 떨립니다. 그래서 바느질을 할 수 없게 되고 글씨도 삐뚤삐뚤 쓰게 됩니다. 그 날이 되면 젊은 시절 곧추세웠던 허리가 점차 구부러집니다. 치아가 약해져서 단단한 음식을 씹을 수 없게 됩니다. 잇몸약 ‘인사돌’을 매일 먹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눈이 침침해져서 가까이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먼 곳이 잘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비싼 누진 다초점 렌즈로 안경을 맞추어야 합니다. 귀도 잘 안 들리고 보청기를 껴야 합니다. 잠을 깊이 자지 못하고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에도 잠이 깨고 맙니다. 노래를 부를 때 고음은 점점 더 안 나오고 빠른 박자의 곡은 따라가기가 벅찹니다. 마크홀까지 계단 내려가는 것도 힘들고 위험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게 됩니다. 칠흑같이 검었던 머리는 어느새 눈이 덮인 백발로 변해 있습니다. 이제는 손가방도 무거워서 못 들겠고 식욕도 떨어져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음이 찾아옵니다. 차갑게 식은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몸과 분리된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언젠가는 우리에게 닥치게 될 엄연한 현실입니다.

전도자가 왜 우리에게 그 날들을 생각해 보라고 했을까요? 앞에서는 즐겁게 살라고 해 놓고 심술궂게 여기에 찬물을 확 끼얹어 버리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자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가 미래에 닥치게 될 캄캄한 날을 생각해 보라고 한 이유는 현재의 밝은 날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끝이 오기 전에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때문입니다.

저는 군 입대 후 첫 휴가로 2박 3일 동안 백일 휴가를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휴가를 나오기 전에 군용 수첩에 분 단위로 휴가 계획을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두었던 기억이 납니다. 예를 들어 “1시 43분 카페에 가서 커피 두 잔을 포장하기 / 1시 57분 목자님과 만나기 / 3시 10분 화장실에 가기 / 3시 15분 전철역으로 이동하기” 이런 식이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계획표를 만들었겠습니까? 이 소중한 휴가 기간을 일분 일초도 허비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휴가 기간이 너무나 소중했던 이유는 삼 일이 지나면 끝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끝이 있습니다. 물론 끝나는 시점이 언제인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현재의 젊음과 건강이 결코 영원히 계속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재의 젊음과 건강이 소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끝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단 일분 일초도 우리의 인생을 허투루 낭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삶의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최선을 다해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늙음과 죽음을 생각하며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이것이 바로 전도자의 긍정적 현실주의입니다. 우리가 이런 긍정적 현실주의를 취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9b)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때 우리가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질문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될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 내가 만든 세상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누리며 즐거운 인생을 살라고 명령한 바 있다. 너는 이 명령에 순종하였느냐?”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만약 이 질문에 ‘현실이 너무 힘들고 우울한 나머지 방 안에 콕 박혀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세월만 보내다 왔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 모두가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누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덕분에 즐거운 인생, 멋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전도자는 특별히 청년들이 이런 인생을 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를 주의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10a)

첫째, 마음의 근심을 떠나게 해야 합니다. 청년의 특징은 앞으로 살 날이 많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생기기 쉽습니다. 이렇게 근심이 쌓이면 즐겁고 유쾌한 인생을 살 수 없게 됩니다. 걱정 근심이 젊음을 빼앗아 갑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에서 근심이 떠나게 할 수 있습니까? ‘이제부터 근심하지 말아야지’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해결책은 단 하나,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 뿐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영접할 때 비로서 청년이 청년 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둘째, 악이 몸에서 물러가게 해야 합니다. 청년의 특징은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청년이 다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젊음에도 불구하고 몸에 고장이 나서 전혀 젊음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감이 지나쳐서 자신을 절제하지 못함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이것을 몸에 들어온 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너무 술을 많이 먹는 바람에 간경화 같은 큰 병이 생기는 경우입니다. 또는 너무 불규칙한 생활을 하거나 과식을 해서 건강을 해치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건강을 잃게 되면 청년이 청년 답게 살 수 없습니다. 누워서 지내다가 인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악이 몸에서 물러가게 할 수 있습니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으며 자기를 부인하는 법을 배우면 됩니다. 부지런히 경건에 이르도록 연습할 때 몸도 건강하게 되어 열정적인 삶, 도전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청년이지만 우리 가운데 청년 중의 청년이 있습니다. 바로 러너스입니다. 우리 러너스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마음에서 근심을 떠나게 하고 경건의 연습을 통해 악이 몸에서 물러가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러너스 모두가 청년다운 패기 있는 인생, 도전하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엄중한 명령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12:1a)

지금까지 전도자는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인생을 살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이 모든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를 잊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우리가 기쁘고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도 아니고 저절로 되는 일도 아닙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동시에 그분이 우리를 위해 좋은 선물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의무이기 때문에 그분이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한 것은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지옥 같은 세상을 만들어 놓으셨다고 해서 아무도 그분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함이 남아 있는 세상을 유지하시는 이유는 오직 그분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냥 즐겁게 살면 그만인 것 아닐까요? 꼭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한 일입니까?” 이 질문에 “네, 꼭 필요합니다.”라고 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일 선물을 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어떤 생일 선물이 가장 기억에 남으십니까? 저는 제 딸들이 어릴 때 저에게 썼던 생일 카드가 생각납니다. 거기에 때로는 ‘엄마보다 아빠를 더! 더! 더! 사랑해요.’라고 써 있기도 했고, ‘아빠 사랑해요.’를 글자 하나씩 그림으로 만든 기발한 작품도 있었습니다. 물론 요즘에는 제발 써달라고 통사정을 해도 잘 안 써줍니다. 제가 이 카드들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선물의 가격이 비싸거나 고급스럽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선물을 통해서 아이들을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말 인생을 기쁘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 내게 선한 선물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선하심과 나를 향한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생을 즐기기만 하고 그 즐거움의 원천이 되시는 분을 모르면 이것은 반쪽 자리 즐거움에 불과합니다.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에 더해서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림으로 우리의 기쁨은 두 배가 됩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왜 청년을 콕 집어서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했을까요? 이는 청년의 때에 과도한 자신감과 교만 때문에 자신의 창조자를 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기운이 팔팔하고 열정이 넘치다 보니 자신의 행복은 다 자기가 열심히 산 덕분이라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얼마든지 내 힘으로 내 인생을 잘 살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언제까지나 영원히 청년일 수 없습니다. 금방 힘이 다 빠진 노년이 되고 남은 생애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젊은 시절 하나님과 쌓은 스토리가 없는 노년은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인생의 낙도 없고 죽으면 모든 것이 다 사라질 것 같아 편안히 잠들지 못합니다.

반면, 청년의 때에 자신의 창조주를 기억하는 삶을 살았던 노년은 다릅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이제 다시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가 왔다는 것을 압니다. 불안하거나 두려워하기 보다는 곧 그토록 사모하던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맞대어 볼 수 있는 날이 가까이 오는 것에 대해 기대와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일생 진실한 믿음으로 사신 분들의 장례식에서 가면 항상 듣는 말이 있습니다. “고인께서는 마지막 순간 지극히 평안한 얼굴로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결국 어떤 청년으로 살았느냐가 어떤 노년이 되는가를 결정합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청년이든 노인이든 모든 인생을 정말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쉬지 못하는 마음 속 열기를 가라앉히고 고요함과 차분함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근원과 부패한 본성을 정화시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평화롭고 복된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려면 우리는 청년의 때부터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즐거운 인생, 기쁨이 충만한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복된 노년을 맞이할 수 있기를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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