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

이창무 2022. 10. 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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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7 강 / 이창무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


말씀 / 누가복음 15:11-32
요절 / 누가복음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오늘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먼저 여름 수양회가 연상되는 말씀입니다. 주일 예배 때 이 말씀을 듣는 것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찾아보니 2005년부터 2012년까지 8년 동안 단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수양회 때마다 ‘아버지의 크신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이 본문을 다루었습니다. 꼭 강의가 아니어도 연극으로 올린 적도 참 많았습니다. 색다르게 ‘탕자의 여동생’이라는 제목으로 후일담을 지어내 연극으로 만든 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비유의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보다 비유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에 좀 더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11)”

예수님은 두 아들을 둔 어떤 아버지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이 비유는 둘째 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1부와 첫째 아들이 중심인 2부, 이렇게 두 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부는 시작부터 듣는 사람에게 충격을 줍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12)”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패륜적인 범죄를 저지릅니다.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의 분배를 요구합니다. 이것은 마치 대놓고 ‘나에게 아버지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예요.’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은 원하지만 아버지 자체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 역시 아들 못지않게 이례적입니다. 당시는 몹시 가부장적인 사회입니다. 여느 아버지라면 아들을 호되게 야단친 뒤 당장 집에서 내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거부당한 고통을 묵묵히 견딥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피땀 흘려 모은 살림을 아들이 요구대로 순순히 나눠줍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아들이 준 상처의 깊이보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의 깊이가 훨씬 더 깊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3-16)”

예상대로 둘째 아들은 타락합니다. 먼 나라로 가서 흥청망청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삽니다. 결국 유흥비로 전 재산을 다 날립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때마침 경제 위기까지 닥쳤습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둘째는 유대인이 부정하게 여기는 짐승인 돼지 치는 직업은 겨우 구하게 됩니다. 여기가 바닥인가 싶었는데 아니었습니다. 돼지 사료조차 못 얻어먹게 되었으니 마침내 돼지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17-20a)”

이렇게 되고 나서야 둘째 아들은 회개합니다.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풍요로운 곳이었는지를 깨닫습니다. 마침내 염치 불구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둘째 아들은 돼지우리에 앉아 이 대사를 열심히 연습한 후에 귀향길에 오릅니다.

집으로 오는 둘째는 어떤 모습일까요? 멀고 먼 길을 걸어오는 동안에 신발은 다 헤어져 버리고 맨발입니다. 몸은 삐쩍 마르고 오래 씻지 못해 냄새가 납니다.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를 아버지는 어떻게 대할까요? 여기가 어디라고 돌아왔느냐 하면서 내쳐도 할 말이 없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b)”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집니다. 멀리서 둘째 아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아버지가 달려갑니다. 지역사회의 어른이자 대농장의 소유주인 가장이 아이처럼 겉옷을 들춰 올려 다리의 맨 살을 보이며 달리는 일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춥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21-24)”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온 아들은 아버지의 의외의 반응에 깜짝 놀랍니다. 서둘러 연습했던 대사를 주섬주섬 늘어놓으려 합니다. 그러나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말하려는 찰나 아버지가 그 말을 가로막습니다.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아들의 신분이 회복되었다는 확실한 증표입니다. 둘째 아들에게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는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내놓는 축하연을 열도록 명합니다. 이 정도의 잔치는 특별한 가장 기쁜 일이 있을 때만 벌어집니다.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환영하기 위해 온 마을 사람이 이 잔치에 모여듭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입니까? 둘째는 아버지 집에 양식이 풍족한 줄 알았는데 이제 은혜도 풍족함을 깨닫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어떠한 것인가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듯이 아버지가 아들을 끌어안은 시점은 아들이 개과천선했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전이었습니다. 외워 두었던 회개의 대사조차 다 읊기도 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덮지 못할 악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은혜로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어떤 공로나 행위로, 뼈저리게 참회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무모해 보일 정도로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비유의 이름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탕부의 비유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주장합니다. “탕(Prodigal)”는 낭비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낭비했기 때문에 탕자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왜 ‘탕부’입니까? 아버지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아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마구마구 쏟아 붓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사랑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탕부입니다.

복음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죽어 마땅한 자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죄의 종이 되었던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나에게 사랑을 퍼 주시는가? 우리는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욕되게 한 죄인들을 용서하는 지! 암만 봐도 용서를 너무 낭비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고 하나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 사람에게 어떻게 계속 사랑을 쏟아 부으시는 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낭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탕부 하나님이십니다.

이 ‘탕자의 비유’ 아니 ‘탕부의 비유’는 늘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런 찜찜한 구석이 남습니다. 비유 속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모든 사람을 다 받아 주시는 분이실까요? 둘째 아들의 죄에 대한 속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가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요? 그래서 맏아들이 등장하는 2부가 있습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25-28)”

형은 종들에게서 동생이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신분을 회복해 주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격노합니다. 어쩌면 이제까지 아버지가 베푼 잔치 중 가장 성대했을 잔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들어가자고 타일러도 첫째 아들은 한사코 거부합니다. 이것은 연회의 주최자인 아버지를 공공연하게 욕보이는 행동입니다. 맏아들이 이렇게 격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

형은 죽도록 일해서 자기 몫을 벌었지만 동생은 쫓겨나야 마땅한 일 외에는 한 일이 없습니다. 형의 계산으로는 이런 동생에게 퍼주려고만 하는 아버지의 처사는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큰 아들은 이것이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포합니다. 큰 아들의 행위 역시 둘째 아들 못지 않게 평생 쌓아온 아버지의 평판과 명예를 짓밟는 것입니다. 맏아들의 공공연한 저항에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1, 32)”

아버지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다정하고 따뜻합니다. 아버지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욕되게 한 첫째 아들도 용서합니다. 아버지는 첫째도 둘째도 모두 다 결코 잃어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첫째 아들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둘째를 영접하고 기쁨의 잔치에 동참하기를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그런 선택을 아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아버지의 인자한 호소에 형의 마음이 누그러져 아버지와 화해하고 잔치에 함께하게 될까요? 두 형제가 화해하게 될까요? 이 집안은 결국 사랑으로 다시 뭉치게 될까요? 이런 궁금증들이 머리를 스쳐 갈 즈음에 이야기는 끝나버립니다. 또 열린 결말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 그 결과를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으실까요? 비유를 듣는 우리들이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메시지에 반응할 것을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먼저 비유에 나오는 두 아들을 통해 예수님은 사람들이 행복과 만족을 찾으려 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자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자의 길입니다.

비유 속에서 큰 아들은 율법주의자의 길을 대표합니다. 율법주의자는 행복은 우리가 법과 원칙을 얼마나 성실하게 지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공동체의 규범과 도덕을 항상 개인의 만족보다 앞세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사람이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에 엄격히 순종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과 같은 이들이 대표적으로 여기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반면, 둘째 아들은 자유주의자의 길을 대표합니다. 자유주의자는 각 개인이 자유롭게 자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전통, 편견, 위계적인 질서 등 개인의 자유를 가로막는 장벽이 약화되거나 제거될 때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된다고 믿습니다. 과거 가부장적인 시대에도 이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 생활을 하더라도 누구에게도 간섭 받지 않고 자유롭게 신앙 생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디에 속한 사람일까요? 물론 한 사람 안에 두 가지 성향이 다 존재합니다. 그래도 결국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강하게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 둘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는 말합니다. “제멋대로 구는 자유주의자들, 저 날라리들이 문제다.” 자유주의자는 말합니다. “완고한 율법주의자들, 저 꼰대들이 문제다.” 그리고 양쪽 모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길이 세상을 바로잡는 길이다. 우리가 해답이다” 가만히 들어보면 각자의 말에 일리가 있긴 합니다. 성경은 이 둘 중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까요?

예수님의 비유는 이 둘 모두 다 틀렸다고 말합니다. 허랑방탕하게 살며 결국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은 틀렸습니다. 자유주의자가 가는 길의 끝에는 자기 삶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삶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멀어진 것은 둘째 아들만이 아닙니다. 첫째 아들은 동생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욕되게 하고 아버지에게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마련한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아버지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율법주의자가 가는 길의 끝에는 분노와 원망, 비난과 정죄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첫째도 틀렸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잃어버린 아들은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서로 극과 극으로 다른 듯 보였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사실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둘째가 원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스스로 결정해 자기 몫의 재산을 마음대로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첫째가 원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동생처럼 아버지의 재산을 원했습니다. 동생 못지 않게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었습니다. 둘째는 저항과 독립을 통해서 첫째는 순종과 인정을 통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는 것이 달랐을 뿐, 둘 다 아버지의 마음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둘 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고, 아버지를 이용하려고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거나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여깁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죄의 개념을 더 심화시키십니다. 죄란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이시고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대신 올라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줄 수 있는 재산만 탐냈을 뿐 정작 자기 삶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지워버리려 했던 두 아들처럼 말입니다. 자유주의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대놓고 무시하고 제멋대로 삶으로써 죄를 범합니다. 율법주의자는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빚을 지워 그분을 통제하려 함으로써 죄를 짓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첫째 아들의 두려움과 원망, 둘째 아들의 공허함과 영적 빈곤 속에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최근 회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10:13)”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13:3)”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5:10)” 이 말씀대로 회개가 중요합니다. 둘째가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회개를 결심한 것입니다. 첫째가 아버지와의 관계성을 회복하려면 자기 의와 교만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하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회개만이 답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다 알고 있는데 막상 회개하라고 하면 싫습니다. 회개만이 살 길이라고 하는데 회개하려고 하면 꼭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이키려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 안에 이런 용기가 없는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회개할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서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공통점을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둘 다 아버지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점, 적극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버지는 둘 다 회복의 잔치, 기쁨의 잔치로 부르고 있습니다. 거실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저 멀리서 오고 있는 둘째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백발을 휘날리며 달려나갑니다. 그리고 눈물 흘리며 와락 아들을 끌어안습니다. 집 밖에서 씩씩거리고 있는 첫째 아들을 다독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아들 곁으로 갑니다. 차분하게 끈기 있게 아들을 설득합니다.

둘째 아들이 돌이킬 수 있었던 것은 그보다 앞서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들이 돌이킬 소망이 있는 것 역시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이 여전히 아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기에 앞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찾도록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회개할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변함이 없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 그대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영접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랑과 복음에 합당한 회개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즐거운 잔치에 들어가려면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둘째가 아들로서 실패한 아들인 것은 자명합니다. 이런 둘째가 용서받고 다시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려면 누군가 둘째를 대신해 대가를 지불해 주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이 양보하고 자기를 희생함으로 둘째 아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은 그럴 의향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첫째도 둘째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못된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첫째 역시 아들로서 실패입니다. 둘 다 실패했으니 도대체 이 집의 화해와 회복을 누가 이룰 수 있습니까?

두 아들처럼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 맺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유대인도 죄인이고 이방인도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습니다. 세리도 실패했고 바리새인도 실패했습니다. 자유주의자도 실패했고 율법주의자도 실패했습니다. 쾌락주의자도 실패했고 금욕주의자도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다 실패했으니 이제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것입니까? 

그래서 비유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아버지의 또다른 아들이 필요합니다. 두 동생의 실패를 만회할 큰 형님이 계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지 압니다. 그분은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갚아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먼 나라로 가는 정도가 아니라 저 높은 하늘에서 이 낮은 땅까지 오셨습니다. 유산의 일부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이라는 무한한 대가를 기꺼이 치르셨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이 다시 긴 옷을 입게 된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벗김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이 다시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발에 신을 신게 된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손에 못이 박히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이 씌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이 아버지에게 돌아왔을 때 매를 맞지 않고 돌에 맞지 않은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침 뱉음을 당하고 따귀를 맞으며 채찍질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이 살진 송아지를 먹게 된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먹을 것 없고 헐벗고 머리 둘 곳 없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이 아버지에게로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다시 아들로 받아들여진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외쳤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런 우리가 어떻게 다시 또 아버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한 둘째 아들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형제들을 정죄하는 첫째 아들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열린 결말로 끝난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로 인해서 새드 엔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 큰 형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셨는지 압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압니다.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며 따르고자 합니다.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영접해야 할 근거가 확실해졌습니다. 우리가 이 길을 감으로 예수님의 비유가 우리로 인해서 해피 엔딩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내 주변에 있는 첫째 아들, 둘째 아들을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여 다 함께 천국 잔치에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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