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이창무 2022. 9. 2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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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5 강 / 이창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 / 누가복음 13:22-30
요절 /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좁은 문’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앙드레 지드’의 동명 소설이 생각나시나요? 저는 고등학교 때 이 소설을 읽고 주인공들의 답답한 관계 때문에 아주 속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또 좁은 문 하면 대학 입시, 고시, 취업 등이 떠오르시나요? 특히나 요즘에는 정말 취업의 문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여러모로 익숙한 좁은 문이라는 말이 시작되었던 자리인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오늘 말씀 가운데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22,23)”

예수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나와서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만약 이 사람이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계속 말씀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이 나올 법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악한 청지기는 엄히 때리고 처벌하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속히 화해하지 않으면 최후의 심판 때에 옥에 넘겨져 결코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망할 것이라고 하시고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심판에 대한 경고를 듣고서 정신을 차리고 회개했습니까? 말씀에 겸손하게 반응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회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미워했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과 율법교사와 같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공격하고 함정에 빠트리려 했습니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과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적냐는 그의 질문에 예수님은 어떤 대답을 주십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24)”

예수님은 ‘그렇다’ 또는 ‘아니다’ 이렇게 직접적인 답을 주시는 대신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상황을 이렇게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배가 침몰해서 서서히 물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이때 구조대가 도착합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사람이 구조대원을 향해 이렇게 묻습니다. “몇 명이나 구조하실 건가요?” 그때 구조대원이 뭐라고 대답을 할까요?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고요 일단 당신이 여기서 빠져 나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구원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많은 지 적은 지 궁금해하는 대신 먼저 구원받기 위해 힘쓰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적을지 많을지 궁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질문이 나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매우 적다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 지 불안해집니다. 반대로 아주 많다면 어떻습니까? 일단 안심은 됩니다. 하지만 나보다 못한 사람이 구원받을 수도 있다는 점에 괜히 나만 열심히 신앙생활 했나 싶은 자괴감이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게을러지기 쉽습니다. 적다고 해도 문제, 많다고 해도 문제, 다 문제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의 숫자에 관심 갖는 것은 마치 올해 합격 정원이 몇 명인가에 수험생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수험생 입장에서 정원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있습니다. 그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합격 정원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정원이 몇 명인가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명이나 구원받을지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영역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구원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 안에서 우리는 구원 받는 자가 적다는 힌트를 얻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힘쓰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극도의 고통을 의미하는 영어의 ‘Agony’와 어원이 같습니다. 당시 헬라의 작가들은 운동선수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이기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짜내는 전사의 모습을 묘사할 때 흔히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구원의 문은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넓은 문이 아닙니다. 좁은 문에 들어가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일까요?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왜 이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요?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25)”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힘써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문이 열려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때가 되면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습니다. 그렇게 한번 닫히고 나면 아무리 밖에서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이때 문 밖에서 두드리던 사람은 애가 탑니다. “주여 열어 주소서” 그러나 주인은 매몰차게 문 열어 주기를 거절합니다. 이처럼 구원의 문은 열려 있을 때 들어가야지 그 타이밍을 놓치고 나면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 전남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승객 476명이 탄 여객선 한 척이 침몰했습니다. 그 배는 잘 아시다시피 세월호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방송 편성표에서 황금 시간대를 가리키는 말로만 알았던 ‘골든타임’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구조가 가능한 시간대를 골든타임이라고 합니다. 화재 현장에서는 5분, 해상 조난 사고에서는 20분이 골든타임이라고 합니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승무원들이 그 자리에서 뛰쳐나오라고 말만 해줬어도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사람들은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메시지가 계속되는 바람에 골든타임을 놓쳐 버린 것이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확하게 정반대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그대로 있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지금 이대로 살다가는 세상과 함께 침몰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십니다. 거기서 돌이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골든타임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빠져나올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한번 구원의 문이 닫히면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내일은 늦습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는 당장 지금부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구원의 문이 좁은 문인 두 번째 이유는 오직 주님이 아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5절에서 주인은 문 밖에서 열어 달라 외치는 사람들에게 거절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그러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반박합니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26)”

그들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식사한 적도 있고 주님이 길에서 가르치실 때 들은 적도 있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어떻게 답변하실까요? “아, 이제 기억 난다. 맞다 맞아. 그런 적이 있었지.”라고 하실까요?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27)”

예수님은 여전히 너희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바뀔 것이 없으니 더 이상 따지지 말고 나를 떠나 가라고 확실하게 못을 박으십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자리에 밥 먹고 주님의 말씀을 들은 것만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예 근처에도 안 온 것과 비교하면 이렇게 얼쩡거리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최소한의 요건은 갖추어진 것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를 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 앞에서 먹고 마시기만 하면 뭐합니까? 그냥 밥만 먹고 주님과 친밀한 교제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뭐합니까? 듣고 반응을 보이며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한다 해도 예수님이 나를 알지 못한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것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습관화된 종교 행위가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겉으로만 아니라 정말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사귐을 갈망하며 항상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반응하고자 하는 사람,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아노라’ 하시는 말씀을 들을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게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저절로 되지는 않습니다. 계속 분투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은 문입니다. 

‘대럴 벅’이라는 학자가 쓴 ‘누가복음’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저자는 인구가 800명 정도 되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에 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 그 지역 교회의 주일 예배에 35명 정도 참석하고 대부분이 50세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년에 두 번 있는 이 교회의 성찬 예배 때는 거의 모든 동네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예배를 참석해야만 교회 명부에 이름을 유지해둘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대럴 벅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문화적으로 교회에 속한 것은 예수와 관계 맺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 단순히 공식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마지막 날 주를 송축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고 확신하는 것은 비극적인 오류이다.”

우리 가운데 “문화적으로 교회에 속해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교회 명부에 내 이름만 유지하고 있으면 충분한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렇게 믿고 있다면 이는 비극적인 오류라고 했습니다. 교회와 어떤 모양으로든 접촉하고 있다는 것, 연결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나를 아시는 것이 핵심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죄사함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매주 주일예배를 통해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백 퍼센트요’라고 자신 있게 답을 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멉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향해 힘써 전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시는 음성을 듣게 될 지 모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두려운 말, 참담한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비유 속에서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난 이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28)”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가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볼 때 그들은 믿음의 선진들을 조상으로 둔 이스라엘 백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은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아울러 그 조상의 피를 물려 받은 자신들 역시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 하십니다. “맙소사.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니! 왜 미처 몰랐을까? 진작 예수님 말씀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쓸 걸.” 그들은 후회와 절망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고 너무 고통스러워 이를 갈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크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인줄 알았는데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하시니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29)”

여기서 동서남북으로부터 올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의 교리문답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문) 하나님은 왜 이방인을 창조하셨는가?” “답) 지옥의 불쏘시개감으로 쓰기 위해서이다” 이런 말을 할 정도로 평소 무시하던 이방인들이 자신들은 쫓겨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다니!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도 아니고 오랜 전통과 역사도 전무한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 잔치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구원은 따 논 당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야말로 바깥 어두움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아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복음을 들었을 때 가만히 있는 유대인들과 달리 그들은 즉시 반응을 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보내신 구원자로 믿고 영접합니다. 혈통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누구나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한 찬송가를 부르다가 화가 난 적이 있습니다. 바로 199장에 나오는 이 가사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작사자가 어릴 적 어머니 무릎 위에 안아서 재미 있게 성경 이야기를 들었던 추억을 노래하는 가사인데 저는 이런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대신 어머니 무릎 위에서 엉덩이를 맞았던 기억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저는 제 딸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예배를 드리고 어릴 적부터 성경을 알고 핍박은 커녕 믿는 부모의 격려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입니까? 나 같으면 그 자체로 너무 감사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믿는 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나름대로 어려운 점이 있고 또한 언젠가는 자신이 직접 넘어야 할 고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문화에는 익숙하지만 나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부모님이 믿음으로 사시고 나 또한 어릴 적부터 신앙 생활을 해 왔다는 것에 오는 영적인 느슨함과 안일함은 각자가 풀어야 할 또 다른 숙제입니다.

자칫하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처럼 머리만 커져서 비교하고 판단만 하고 정작 성품과 삶에 있어서 제자다운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거나, 형식적인 신앙 생활만 하고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사람이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마음으로 회개하고 순종하기 보다는 남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꼭 자녀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한 사람도 그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충만했는데 그 모든 것이 지금은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도 알만큼 알고 기도도 할 만큼 한 것 같고 전도도 안 해 본 것이 아닙니다. 이 정도면 이미 구원 받고 천국행 티켓은 손에 쥐고 있으니 다 이루었다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상태에 있을 때가 우리 신앙에 적신호가 켜지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이대로 가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누리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부러워할 뿐, 정작 자신은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탄생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들어가는 문은 아주 작고 좁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높이가 120Cm, 넓이가 80Cm밖에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허리를 굽혀야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거만하게 고개를 빳빳이 세우거나 자신이 자랑하는 것들을 바리바리 들고 있으면 절대로 통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헛된 자부심, 교만, 자기 의, 고집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 내세울 것 없는 자격 없는 자로서, 용서 받아야 할 죄인으로서, 은혜를 갈망하는 가난한 자로서 예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동서남북에 온 이방인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좁은 문을 통과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교제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맺으십니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30)”

이 말씀은 누구보다 먼저 출발해서 하나님 나라에 가깝게 와 있는 너희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으면 땅 끝에 있는 이방인들이 먼저 그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먼저 왔다는 것에 상당한 특권을 부여합니다. 군대에서는 소위 ‘짬밥’이라고 해서 ‘누가 먼저 들어왔느냐’에 의해 자동적으로 서열이 매겨집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회사에서도 입사일이 더 빠른 사람이 그만큼 대우를 받습니다.

하지만 먼저 된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득권에 안주하다가 점점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만사가 귀찮으니 그냥 하던 대로만 하자고 합니다. 힘들이지 말고 애쓰지 말자고 합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미 기본은 보장받았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른 원리가 적용됩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습니다. 언제든 역전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된 사람은 자칫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져 나중 되지는 않을 지 생각하고 긴장해야 합니다. 기득권을 주장하며 영적 안일에 빠져 있지는 않은 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누가 먼저 되고 나중 될 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습니다.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며 이 땅에서 끝까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미래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날마다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이 거룩한 순례의 길에서 우리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고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상보다 너무 길었던 코로나 기간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많이 굳어진 것 같습니다. 이번 가을 수양회를 통해서 다 함께 기지개를 활짝 펴고 좁은 문을 향해 힘써 전진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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