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이창무 2022. 10. 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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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6 강 / 이창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말씀 / 누가복음 14:25-35
요절 / 누가복음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플라톤이 세운 학원인 아카데미아의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무협 영화에서는 장작 패기, 물동이 나르기 등을 오랫동안 군말없이 하는 사람이라야 사부님이 제자로 받아줍니다. 또 중국의 명필 왕휘지는 ‘비인부전’이라고 해서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인성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은 제자로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갖춰야 할 제자의 기본기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본기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이 질문의 대한 답을 찾아보고 제자의 기본기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25)”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은 돌이키셔서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예수님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요? ‘이 식을 줄 모르는 나의 인기를 보라. 그 동안 내가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앞으로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이미 자신이 제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내가 참 제자인가 자신을 돌아볼 것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인기를 원하셨다면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가는 길에 잠시 함께 했다가 언제든지 떠날 수도 있는 무리가 아니라,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할 제자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떠날까 봐 두려워서 자신을 따르기 위해서 치러야할 대가를 감추고 장미 빛 환상만 내놓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제자도의 대가가 무엇인지 가감없이 알려 주시며, 우리에게 그 대가를 기꺼이 지불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2015년 2월 학사 엠티 때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으로 제가 세미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예수님 주변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관중석에 앉아서 선수들을 향해서 환호하고 목청껏 응원하는 팬이 있습니다. 팬은 얼핏 보면 제자처럼 보이지만 제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열성적이라 하더라도 팬은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함께 뛰거나 구르지 않습니다. 반면 제자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든 함께 하고 기꺼이 그에 따르는 대가를 지불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제자만이 예수님이 제대로 알고 배울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큰 문젯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는 팬들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팬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답하기 쉽습니다. 대개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며 ‘이 정도면 예수님의 제자라 할 만하지 않은가’ 스스로 판정을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대적인 기준은 실상은 팬이면서 제자인 줄 아는 착각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하는 기준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을 때에만,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첫째, 예수님을 가장 우선 순위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26)”

예수님께 오지 않는 사람이 제자가 아닌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온다고 해서 모두가 다 예수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미워한다’는 표현이 마음에 걸립니다.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했는데 ‘부모를 미워하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미워하다는 증오나 분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9장에 보면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하고 나서 바로 ‘하나님이 레아가 미움 받는 것을 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종종 덜 사랑하는 것을 미워한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집에 돌봄이 필요한 자녀가 있는데 ‘나 몰라라’ 하고 교회에 와야 한다던 지, ‘교회 일을 해야 하니까 남편이 밥을 굶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런 이야기가 전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지금보다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자는 가족에 대한 사랑보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더 앞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만 있겠습니까? 사실은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은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말씀하십니다. 가족이든 자기 자신이든 다 예수님 다음입니다. 예수님이 항상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다면 예수님은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뭐가 이렇게 빡빡하냐고 반문할 지 모릅니다. 나도 사랑하고 가족도 사랑하고 예수님도 사랑하고 다 모두 다 사랑하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둘 혹은 그 이상의 대상을 동일하게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한 쪽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떤 의사 결정을 내리는가를 통해서 결국 내가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 드러납니다.

1세기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에 대해 다른 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는 경우에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회교권이나 공산권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심지어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상황에서는 문자 그대로 가족과 등지고 자기 목숨을 내놓을 결심을 해야만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보다 가족이나 자기 목숨을 더 사랑한다면 신앙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상황을 겪고 있지는 않습니다. 크고 작은 마찰은 있을지 언정 심각한 분쟁이나 생명의 위협까지 만날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원리는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양마가 선교사님의 어머니인 유금선 권사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권사님은 33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고 양마가 선교사님은 4남매 중 장남이자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양마가 선교사님이 1971년 대학 졸업 후 일생을 UBF에서 대학생들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한다고 말씀드렸을 때 권사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친척들은 선교사님이 서울대를 나와 좋은데 취직하여 당연히 홀 어머님을 호강시켜 드릴 줄 알았는데 이름도 없는 선교회에서 목사도 아니고 목자로서 일생을 드리겠다니 기가 막혀 했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아브라함이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듯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심으로 외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셨습니다. 보통 그렇게 한 후에 미련이 남아 요구하고 힘들게 하기 쉬운데, 한 번도 양마가 선교사님을 힘들게 한 적이 없으시고 기도로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셨다고 합니다. 아들은 어머니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어머니도 아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던 것입니다. 두 분의 이런 결단이 오늘 얼마나 많은 열매로 이어지게 되었습니까?

2017년 학원복음화협의회에서 대학생 중에서 과거에 교회에 출석했지만 현재는 다니지 않는 학생들에게 그 이유를 묻는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신앙에 대한 회의’ 또는 ‘교인들에게 받은 상처’ 등이 1위를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45.5 퍼센트를 차지한 압도적 1위는 ‘학업 또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 줍니까? 믿음과 영성을 잃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 예수님보다 학업이나 아르바이트 등 다른 것에 더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믿음을 버려야겠다’ 결심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삶의 우선 순위에서 서서히 밀려나다 보니 어느새 예수님을 등지고 세상에 휩쓸려 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인 자신이 가장 큰 문제이겠지만 그 부모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모도 믿는 부모인 경우가 많을 텐데 평소 삶에서 예수님께 최우선순위를 두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심지어는 자녀가 중학생이 되면서 ‘예배는 안 가도 되니까 그 시간에 학원 가고 공부해라. 나중에 좋은 대학 가면 그때부터 열심히 예배 드리면 된다.’ 이렇게 말하는 부모도 있다 하니 더 할 말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청년 세대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은 바로 이런 것들이 계속 쌓여 온 결과입니다.

우리는 어떤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고 유금선 권사님과 양마가 선교사님이 가셨던 그 길, 예수님을 최고 우선순위로 두는 삶의 길로 향해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보다 학업과 취업과 가족끼리 알콩달콩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더 우선순위에 두는 길을 행해 가고 있습니까? 후자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그리스도인은 제자와 완벽하게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힘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제시한 기준을 낮출 이유는 없습니다. 기준을 바꾸면 내가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됩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을 다른 모든 것보다 귀하게 여기고 최우선순위에 두라” 우리가 날마다 이 예수님의 기준 앞에서 자신의 현 위치를 확인하고 예수님을 더욱 더 사랑하고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7)”

자기 십자가는 주님을 따르고자 할 때 우리가 짊어져야 할 구체적인 고난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구체적인 고난을 짊어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할 때 크고 작은 많은 고난이 따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가는 넓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쉽고 편한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만 해도 엄청난 고난이 따릅니다. 사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좋은 일자리가 없어서 머리 터지도록 씨름해야 합니다. 구직을 해도 언제 잘릴 지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합니다. 이런 시대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그 자체만이라도 큰 고난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우리는 또 다른 고난이 따라다닙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고 나면 그리스도인답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학교생활 직장 생활도 모범적으로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해도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남을 배려하고, 더 많이 섬기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 주위 사람들이 ‘일요일에 놀러 갈 때 같이 안 따라온다’ 뭐라고 하고 ‘분위기 깨지게 술 안 마신다’ 뭐라고 하고 이럴 때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예수님이 맡기신 양들을 섬기기 위해서 고난을 받습니다. 피곤하고 바쁘지만 시간을 쪼개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거듭된 외면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전도를 이어갑니다.

이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십자가를 다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혹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십자가도 지지 않고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 없이 어떻게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배우고 열매 맺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능히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진 만큼 배우고 십자가를 진 만큼 열매를 맺고 십자가를 진 만큼 남습니다. 십자가는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나의 인생이 공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 주고 대신 나를 충만하게 하고 살아 있게 하는 고마운 친구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벗 삼아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자기의 모든 소유를 언제든지 주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도의 세번째 기준을 제시하시기에 앞서 두 개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28-30)”

누군가 망대를 건축하고자 한다면 공사에 앞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건축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어디서 자금을 마련할 것인지 따져보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하지 않고 무작정 공사를 시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짓던 도중 자금 부족으로 공사를 중단하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우리는 결국 그렇게 되어서 주변에서 흉물처럼 버려진 건물을 종종 보곤 합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31,32)”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 먼저 서로의 전력을 면밀히 비교해 보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만약 싸워 이길 만하면 전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승산이 없다면, 항복하고 화친을 맺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덮어 놓고 전쟁을 벌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쟁에서 참패하여 나라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두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망대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도 먼저 앉아 생각하고, 임금도 먼저 앉아 계산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순간의 감정에 따라 결정하거나 그냥 분위기가 그러니까, 대세가 그러니까 나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됨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 무엇인지를 차분히 앉아서 생각해 보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 비용을 지불할 각오와 결심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도에 ‘내 이럴 줄 몰랐네’ 하면서 제자의 길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제자가 되기 위해 어떤 각오와 결심이 필요합니까?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문자 그대로 내가 입고 있는 옷, 내 신발, 가방, 노트북 등을 쓰레기통에 내다 버린다는 뜻일까요? 어느 누구도 이렇게 할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다는 것은 내 손에 들어온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이 내가 주인이라는 의식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내가 그것을 사용하고 있고 보관하고 있고 관리하고 있을 뿐이지 내가 주인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청지기일 뿐입니다. 만약 주인이 다시 돌려 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그 동안 잘 썼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기꺼이 주인에게 돌려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죄의 본질은 내가 주인도 아니면서 주인인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하나님을 밀어내고 넣어 놓았던 모든 것, 부, 명예, 가족, 나의 꿈, 나 자신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이 그 자리에 앉으시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제자도입니다.

제가 취미 생활로 사진을 찍으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초보 사진가가 자주 저지르는 실수가 있습니다. 초보는 프레임 안에 예쁜 배경도 넣고, 사람도 넣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도 넣고 이것저것 좋은 것을 다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진이 아주 지저분해집니다. 그러나 고수는 이것도 빼고 저것도 빼고 할 수 있는 대로 다 뺍니다. 표현하고자 하는 엑기스만 남겨서 최대한 단순하게 구성을 합니다. 이렇게 찍어야 세련되고 아름다운 사진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진 예술을 가리켜 ‘뺄셈의 미학’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계속 더해야 행복해진다고 믿습니다. 좋은 직장을 더하고 좋은 집을 더하고 좋은 차를 더하고 좋은 지위를 더하고 계속 더하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낮아져 오셨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리를 버리시고 도리어 섬기는 자리에 서셨습니다. 인기와 명예와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다 버리시고 수치와 모욕의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마침내 살 한 조각, 피 한 방울까지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을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주고 나신 후에야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 그 자체가 뺄셈의 미학입니다.

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역시 뺄셈의 미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계산을 잘해야 합니다. 계산해 보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손해볼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계산하려면 비용만이 아니라 수익도 계산해야 합니다. 자기의 소유를 버릴수록 풍성해지고 밖에서 보면 마이너스인데 내 안에서는 플러스가 되고 뺄셈을 할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 제자도의 신비입니다. 비용 대비 수익이 엄청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버린 만큼 그 빈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지저분한 집착과 자기중심적인 탐욕이 비워지고 영원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우신 예수님으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의 것에 대한 소유와 집착을 버릴 때 주님께서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것, 영원한 것, 썩지 않을 것, 진정한 기쁨과 풍성한 삶으로 채워 주십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34,35)”

소금은 짠 맛이 나야 소금입니다. 짠 맛을 잃은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아무짝에도 쓸 데 없어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소금은 제자를 가리킵니다. 소금의 짠 맛이란 이제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제자도를 가리킵니다. 제자에게는 제자도가 있어야 합니다. 제자도가 없으면 더 이상 제자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그냥 듣고 흘리지 말고 마음 속에 깊이 새기고 정말 내가 예수님의 참 제자인지 생각해 보라 하십니다. 우리는 염도 몇 퍼센트의 소금일까요? 염도 100 퍼센트의 소금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80 퍼센트, 어떤 사람은 50 퍼센트, 어떤 사람은 10 퍼센트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에 더 짠 맛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자기 십자가를 좀 더 짊어지고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을 좀 더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자도는 완성형이 아니고 진행형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수의 추종자들보다 소수의 참 제자, 팬보다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암 1부가 그 수가 비록 많지 않아도 각 사람이 짠 맛이 진하게 나는 제자다운 제자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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