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창무 2022. 10. 19.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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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8 강 / 이창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말씀 / 누가복음 16:1-13
요절 / 누가복음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2차 대전 때 오스카 쉰들러라는 독일인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고하게 학살 당하는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 군용 식기 공장에 유대인들을 직원으로 채용했습니다. 독일군은 다른 유대인들은 다 잡아 가지만 그들만큼은 잡아가지 않았습니다. 전쟁 막바지가 되자 쉰들러는 수백만 마르크의 돈으로 독일 당국과 흥정을 해서 유대인 1,100명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쉰들러는 독일군 측 식기 공장을 운영했다는 이유를 처벌을 받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나서서 그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이 일을 영화로 만든 것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살아 남은 이들이 쉰들러에게 “당신이 우리를 친구 삼고 살려 주었기 때문에 우리도 당신에게 은혜를 갚은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금니를 모아 만든 반지를 선물합니다. 그러자 쉰들러가 자기 차를 가리키며 ‘이 차를 팔았으면 10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텐데’ 하며 눈물 흘리던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쉰들러 리스트’란 쉰들러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삼은 사람들의 목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의 리스트 안에는 몇 명의 영원한 친구가 있습니까?”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1)”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이 청지기가 주인 대신 계약 체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전권을 위임 받아 관리하다 보니 어느새 주인의 것이 자기 것인 양 착각에 빠졌습니다. 돈을 빼돌려 도박으로 탕진했는지, 제대로 일을 안 해서 손해를 입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게 되었습니다. 보다 못한 종 한 사람이 주인에게 이 사실을 고발했습니다. 이때 주인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2)”

당장 청지기를 불러서 그의 비리를 추궁했습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청지기는 아무 변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주인은 그 자리에서 청지기를 해고시켜 버렸습니다. 인수인계를 위해 장부를 정리할 약간의 시간만이 더 주어졌습니다. 하루 아침에 직장은 잃은 청지기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떤 고민일까요?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3)”

이 청지기는 이번 사건으로 블랙 리스트에 올라갔습니다. 알고 보면 좁은 청지기 업계에서 재취업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저질체력이라 막노동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구걸을 하자니 체면 상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잠도 못 자고 이불을 밤새 뒤척이다 한 가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4)”

청지기는 직분을 빼앗긴 후에 자기를 영접해 줄 사람들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을까요?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일일이 불렀습니다. “당신 얼마를 빚졌소?” “기름 백 말입니다.” “여기 증서에 오십이라 쓰시오” 청지기는 절반의 부채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탕감 받은 사람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청지기님! 빚에 눌려 그 동안 잠을 못 잤는데 이제 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또 다음에 밀 백 석 빚진 자를 불러 팔십이라 쓰라고 했습니다. 밀을 이십 석이나 탕감을 해주었습니다. 이 사람도 너무 감격했습니다. “오, 청지기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요?” “그래. 이 은혜를 절대 잊지 마시게. 내가 곧 카톡으로 연락함세.” 이렇게 해서 청지기는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많은 지인들을 만들었습니다.

청지기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주인이 알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노발대발하여 당장 곤장을 치거나 감옥에 가두지 않을까요?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8a)”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주인이 청지기의 모든 점을 잘했다고 칭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분명 청지기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주인의 재물을 낭비한 점, 불의를 저지르고도 사과나 뉘우침이 전혀 없는 점, 게다가 제 살 길 찾겠다고 주인의 재산을 크게 축낸 점, 다 불의한 일입니다. 주인이 칭찬한 것은 청지기의 지혜, 오직 이것 하나뿐입니다. 청지기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그가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 재물이 없어질 때에 자기를 영접할 처소를 예비했다는 점입니다.

이 비유 속에서 주인은 하나님을, 청지기는 우리 인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주인과 청지기의 관계와 같습니다. 청지기에게 맡겨진 재물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듯,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맡기시되 우리 재량껏 관리하도록 권한을 위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재물의 청지기로서 이를 잘 관리하고 운영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불의한 청지기처럼 물질이 다 자기 것인 양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거나 자신의 유익과 쾌락을 위해 흥청망청 씀으로 낭비합니다. 그렇게 살면서 뻔뻔하게도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 말아먹든 삶아 먹든 누구도 상관할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생각은 자유지만 주인이 청지기에게 결산을 요구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결산을 요구하시는 때가 반드시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국회에서는 국정감사가 한참 진행 중입니다. 정치인들은 이것을 주로 반대편 당에 대한 공격의 기회로 삼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국정감사는 본래 그런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가 행정부가 지난 한 해 동안 일을 잘 했는지 점검하고 평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특히 주어진 예산을 목적에 맞게 정당하게 집행했는지 여부를 꼼꼼하게 살핍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인생감사를 받게 될 날이 옵니다. 감사의 내용은 “우리가 재물에 대한 청지기직을 얼마나 제대로 수행했는가”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재물을 얼마나 잘 관리하고 운영했는가, 낭비하지는 않았는가, 물질을 주님의 뜻에 맞게 사용했는가 점검을 받고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날에 어떤 사람은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을 받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 인생 전체를 결산할 때 무엇을 평가 기준으로 삼으실까요? 비유의 핵심이 되는 다음 구절 속에 답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8b)”

하나님은 얼마나 지혜롭게 물질을 관리했는가를 평가기준으로 삼으십니다. 여기서 빛의 아들들은 누구입니까?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불의하고 그 안에 빛이 없습니다. 비유 속에 나오는 옳지 않은 청지기가 바로 이런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들 중에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고, 지혜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재 쾌락을 위해 모든 물질을 다 써버립니다. 나중에 곤궁하게 되어서야 후회를 하지만 너무 늦습니다. 아니면 당장 눈 앞에 있는 이익을 쫓기에 너무 급급해 합니다. 조금 더 벌려고 욕심 내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실망을 안깁니다. 있던 친구마저 다 떠나게 합니다. 이런 사람이 잘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먼 미래를 내다봅니다.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날을 대비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보다 사람을 키우는 데 힘을 씁니다. 친구를 만들고 이미 얻은 친구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사람을 얻는 것만큼 남는 장사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이 세대의 아들들의 지혜에 대한 칭찬이라기보다는 빛의 아들들에 대한 책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도 자기 시대에 이렇게 지혜롭게 물질을 사용하는데 하물며 빛의 아들들인 너희는 어떻게 물질을 사용해야 하겠느냐” “세상사람들이 자기 유익과 미래를 위해 철저하게 고민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처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빛의 아들들도 그렇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빛의 아들들이 배워야 할 지혜를 세 가지로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재물로 영원한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9)”

여기서 불의의 재물이란 재물 자체가 불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재물은 불의한 것도 의로운 것도 아닌 가치 중립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불의의 재물이라고 표현하셨을까요? 이는 재물이 사람의 마음을 불의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교만하게 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게 합니다. 돈이 많아지면 죄의 유혹에 그만큼 더 강하게 받습니다. 돈이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없으면 인색해지고, 돈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였습니다(딤전6:10).

그러면 자칫 우리를 불의로 이끌 수 있는 재물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지혜로운 길일까요? 산 속 암자에 들어가 무소유의 삶을 실천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말씀하십니다. 친구를 만들고 친구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친구들을 섬기는 일에 돈을 쓰라고 하십니다. 왜 이것이 지혜로운 길입니까?

“재물이 없어질 때에”라는 표현대로 재물은 언젠가 없어질 때가 옵니다. 목숨이 다하는 날 빌 게이츠든 일론 머스크든 누구든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아무리 지혜롭게 재물을 관리한다 해도 그 효력은 이 땅에 있는 동안으로 한정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혜는 자기 시대라는 엄연한 시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더 나은 지혜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사라질 재물을 이용해서 영원히 거주할 처소로 나를 영접할 친구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내가 이 땅에서 주인의 재물을 은혜 베푸는 일에 사용했다는 것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친구들이 내가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주님이 주신 재물을 관리했고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었을 때 우리의 영원한 상급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아들들이 가져야 할 지혜입니다.

그러면 천국에서 우리를 영접해 줄 친구들이 누구일까요? 먼저는 우리를 통해서 그 영혼이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 오게 된 양들일 것입니다. 목자는 한 양을 섬기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고 물질을 사용합니다. 시간을 쪼개 전도하고 말씀을 먹이고 심방하고 밥 사주고 선물 주고 섬겨줍니다. 양이 자기를 위해 해산의 수고를 감당한 목자님을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목자님의 베풂과 섬김 덕분에 저도 천국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하면서 목자를 등에 업고 덩실덩실 춤을 출 것입니다.

다음으로 믿음 안에서 만나게 된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요회 동역자들을 만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사모님이 차려 주셨던 그 풍성한 식사를 잊을 수 없어요. 목자님이 제가 힘들 때마다 곁에서 도와주셨지요. 너무 감사했어요.” 하면서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이할 것입니다. 곁에 있는 요회 동역자들 뿐만 아니라 먼 곳에 계신 선교사님들이 우리를 맞이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에 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 주시고 섬겨 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힘들 때 지원해 주신 덕분에 고비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박수를 치며 우리를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양들과 믿음의 동역자들을 친구 삼기 위해 재물을 쓰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하지 않은 재물을 가지고 영원히 함께 할 친구를 사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 말씀과는 정반대로 친구를 희생해서 재물을 얻으려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가족까지 팔아 재물을 얻으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지혜롭다 자부하지만 사실은 가장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질문을 다시 한번 더 던져보겠습니다. “당신의 리스트 안에는 몇 명의 영원한 친구가 있습니까?” 쉰들러는 차를 팔지 않아서 친구를 더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을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언젠가 찾아올 결산의 때에 우리가 이런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오늘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물질을 사용하여 영원한 처소에서 우리를 맞이할 친구를 사귀는 일에 투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재물에 충성된 사람에게 참된 것을 맡기십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10-12)”

이 말씀 안에는 서로 대조되는 두 가지가 연속으로 세 번 나옵니다. 먼저 나오는 지극히 작은 것은 곧이어 나오는 불의한 재물과 남의 것을 가리킵니다. 모두 다 이 땅의 재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볼 때 재물은 굉장히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과 우주 만물을 소유하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재물은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또한 이 땅의 재물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 손에 들어온 것은 하나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겨 두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큰 것은 참된 것, 너희의 것을 가리킵니다. 모두 다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큰 것이고 참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 나라를 완성하시고 빛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 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남의 것이 아닌 영원한 우리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대조되는 이 두 개의 카테고리를 잇는 공통의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충성입니다. 하나님은 재물에 충성된 사람에게 참된 것을 맡기십니다. 여기서 재물에 충성한다는 것은 재물 자체에 충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재물을 맡겨 주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맡기셨으니 책임감을 가지고 재물을 잘 관리하고, 주님의 뜻대로 재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신 것은 우리의 충성을 테스트해 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충성이 인정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것, 영원한 것, 영적인 것, 더 좋은 것을 맡겨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왜 재물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곳 뿐만 이 아니라 복음서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재물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삼분의 이가 재물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재물에 대한 제자도를 강조하신 이유는 물질 그 자체가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질을 어떻게 쓰고 관리하느냐가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고 있느냐를 가감없이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헌금 드리기를 아까워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이고 양들과 동역자들을 위해 물질을 쓰기에 인색한 사람은 그만큼 이웃을 사랑하기 보다는 자기 사랑에 몰두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원하여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이며, 양들과 동역자들을 섬기는 일에 물질 쓰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그만큼 그들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표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갑이 회개해야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이다’라고 한 존 웨슬리의 말은 과장이나 농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물질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 문제가 아닙니다. 충성이냐 불충성이냐가 문제입니다. 가진 것이 적어도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대한 충성을 보일 수 있고, 가진 것이 많아도 주님께 대한 충성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진 것이 적을 때 충성을 연습하고 몸에 배이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진 것이 많아졌을 때 계속 충성할 수 있습니다. 수입이 많을 때나 적을 때나 일관되게 물질을 영원한 친구를 사귀는 일에 쓰는 사람을 하나님은 주목하십니다. 그런 사람에게 더 큰 것을 맡기시고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게 하시고 영적인 축복을 넘치도록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재물에 충성된 사람에게 참된 것을 맡기십니다.

셋째,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3)”

요즘에는 멀티 잡을 뛰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택배를 배달하고, 주말에는 개인 사업을 하는 등 쓰리 잡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집 하인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왜 안 됩니까? 두 주인 모두 하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인은 결국 두 주인 중 한쪽을 사랑하고 중히 여기고 섬길 대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여기서 재물이라는 말이 원어로 ‘맘몬’입니다. 맘몬은 재물의 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입니다. 수많은 우상들 중에 하나님과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재물이라는 우상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도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시고, 재물의 신도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재물의 신 역시 너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돈을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 돈에게 충성을 다해야 네가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 말에 넘어가서 일생 돈, 돈, 돈 하면서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도록 유도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눈빛이 흐릿하다가 부동산, 주식, 코인 소식을 들을 때 갑자기 눈빛이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재물의 신은 이런 식으로 사람의 영혼을 털어갑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가히 재물의 신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시대라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 장래 희망 1위가 건물주이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시대의 조류를 거슬러 살도록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섬기고 예배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재물은 결코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재물은 우리가 영원한 친구를 삼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재물은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거쳐야 할 테스트의 도구일 뿐입니다. 이 물질주의 시대 가운데 우리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예배하고 그분께 충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재물 때문에 불의에 빠지지 않고 재물로 친구를 삼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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