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창무 2022. 10. 2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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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9 강 / 이창무

부자와 거지 나사로

말씀 / 누가복음 16:19-31
요절 / 누가복음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우리에게 익숙한 듯하면서도 그동안 깊이 다뤄본 적이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하지만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복음을 영접했거나 믿음이 있었다는 표현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는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비유를 바리새인들에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불의의 재물로 영원한 친구를 사귀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부자는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은 자이며,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에서 부자로 살다가 죽어서는 나사로처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착각을 깨트리기 위해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지옥에 들어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19)”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입고 있는 자색 옷은 희귀한 달팽이에서 얻은 천연 염료로 물들인 명품 옷이었습니다. 그의 속옷은 맨 살에 부드럽게 닿는 고운 베옷이었습니다. 또 부자는 날마다 고관이나 부유층 인사들과 함께 어울려 호화 파티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부자의 삶의 또다른 측면을 비춰주는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20)”

그는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였습니다. 그의 몸은 온통 헌데 투성이였습니다. 가족들은 더 이상 나사로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를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렸습니다. 부자에게 은혜를 입는 것만이 나사로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문 앞에 짐승이 굶고 있어도 그 사정을 돌아보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캣맘’이 괜히 생겨났겠습니까? 하물며 사람이 굶고 있는데 당연히 부자가 돌봐 주지 않았을까요?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21)”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리려 했습니다. 부자가 먹고 남긴 것, 버리려고 모아둔 쓰레기에서 음식을 구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부자가 나사로에게 따로 음식을 챙겨주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부자는 음식 뿐만 아니라 입을 옷이나 담요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개들이 와서 거지의 몸에서 나오는 고름을 핥았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이처럼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서로 극과 극으로 엇갈린 삶을 살았습니다. 삶의 수준은 하늘과 땅의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22)”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만약 삶이 이것으로 끝이라면 어떨까요? 부자는 한 평생 잘 먹고 잘 살다가 간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를 돌보지 않은 것이 그에게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죽음 이후에 또다른 삶이 두 사람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죽음은 그들에게 또 다른 삶, 영원한 운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문을 통과한 나사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천사가 나와 그를 영접하여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약속된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나사로가 이렇게 되었다면 부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유를 듣던 바리새인들은 다음 장면에서 천사장이 버선발로 달려와 부자를 영접하고 나사로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부자가 들어가게 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23)”

그러나 놀랍게도 부자가 눈을 뜬 곳은 음부 곧 지옥이었습니다. 부자는 그곳에서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고통을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는 고통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람이 느끼는 고통 중에 가장 극심한 고통이 화상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부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 죽지 않는 몸으로 이런 고통을 계속 받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눈을 들어 보니 저 멀리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가 보였습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니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다음과 같이 간청했습니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24)”

부자는 자신의 사정을 불쌍하게 봐 달라고 호소합니다. 물 한 병, 한 잔도 아닌 손가락 끝에 찍은 물 한 방울만이라도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정도로 절박합니다. 너무 딱해서 당장 시원한 생수 한 병을 들고 달려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25)”

아브라함의 대답은 정이 뚝 떨어질 정도로 냉정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죽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억해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스크린에 부자의 지난 날 삶의 모습이 다큐멘터리처럼 비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부자는 배가 터지도록 먹은 후 집을 나오다가 주린 배를 움켜 쥔 채 애처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사로를 봅니다. 그러나 부자는 그냥 휙 지나친 후 최고급 외제차에 올라탑니다. 부자는 온 몸을 고운 베옷과 자색 옷으로 둘렀지만 온 몸을 욕창으로 두른 나사로의 고통을 전혀 돌아보지 않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부자는 나사로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웬일인가 싶었는데 옆에 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공부 안 하면 저런 거지 꼴 되는 거다. 저렇게 되지 않으려면 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긍휼을 베풀어 본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긍휼히 여겨 달라고 호소할 수 있습니까? 나사로에게 먹을 것, 입을 것 한 번 보낸 적 없는데 어떻게 나사로에게 나를 위해 여기까지 와 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까? 부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사로는 위로를 받고 부자는 괴로움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래도 어떤 사람은 부자에게 너무 가혹한 처분이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물론 나사로를 위해 베풀지 않은 것이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옥 갈 일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소유한 재물이 다 자기 것이라면 맞는 말입니다. 자기 것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기 맘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의 재물이 궁극적으로 자기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것을 일시적으로 맡아 관리할 책임을 맡은 청지기였을 뿐입니다. 그 중에 일부를 자기 삶의 안녕과 윤택함을 위해 쓰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일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많은 재물을 그에게 맡기신 것은 또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외면한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오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는 한 가지 특이한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비유 말씀 중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의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히브리식 이름으로 ‘하나님이 돕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속 인물에게 하필이면 왜 이런 이름을 붙이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곤궁에 처한 사람을 도우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전달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사로를 돕고자 하셨을까요? 바로 부자에게 맡겨 두신 재물로 그를 돕기 원하셨습니다.

만약 이 부자가 그 뜻을 따라 살았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전달하는 통로로 귀하게 쓰임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즐거움과 영광을 위해 사치를 부릴 줄만 알았지 나사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썼습니다. 말하자면 배임죄와 횡령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그가 지옥에 가도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부자의 근본 문제는 자신은 청지기인데 주인일 양 행세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갈까요?”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대개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 지옥에 갑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악한 사람이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나오는 종말에 관련된 여러 비유 속에서 예수님은 또다른 측면 하나를 강조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무시’입니다. 14장에서 큰 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들이 주인의 초대를 무시했습니다. 부자는 도울 수 있었던 궁핍한 한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우리는 긍휼이 없는 부자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저 정도는 아니다”라고 안심할 지 모릅니다.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집 대문 앞에 거지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자는 자기가 한 일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 때문에 지옥에 갔다.’ 하지 않은 일은 바로 재물로 이웃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잘 하고 있을까요?

따지고 보면 우리는 이 부자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삽니다. 부드러운 속옷을 사 입고 겉옷을 계절에 따라 구입합니다. 종종 외식도 하고 특별한 날에는 여행도 가고 맛집에서 식사도 합니다. 각자 형편의 차이는 있지만 전 지구를 놓고 보면 요즘 평균적인 한국인만큼 생활 수준을 누리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이런 삶을 사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변에 있는 나사로들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나사로는 과거에도 우리 근처에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현재도 있습니다. 나사로는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 한 가운데 있는 사람일 수 있고 파키스탄 수재로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질병 중에 고통 받고 있는 국내의 동역자일 수도 있고, 제 3 세계에서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선교사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만 하고 실제적으로 물질로 나사로를 돕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에게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왜 외면했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좋은 옷과 좋은 차와 좋은 집을 구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대문 밖에 나사로가 있는 걸 깜빡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가 시원하게 경고해 준 적이 없어서 잘 몰랐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긍휼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기심을 받았고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죄에 병들어 온 몸이 상처 투성이였던 우리를 자색옷보다 더 귀한 그리스도로 옷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돈을 좋아하고 이기적인 세상사람들처럼 똑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천국 갈 믿음을 가진 사람은 비유 속 부자처럼 살 수 없습니다. 좋은 것을 받았으면 고난을 받는 이와 나누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신 이유입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나사로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전달하는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26)”

아브라함은 부자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 더 언급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가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 천국 같은 삶을 살던 부자는 언제든지 문 하나만 가볍게 넘으면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던 나사로에게 긍휼을 베풀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 가게 될 진짜 천국과 지옥은 다릅니다. 서로 건너갈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쿠팡도 없고, 배달의 민족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소중한 지 모릅니다. 이 땅에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내가 가진 재물로 긍휼과 자비를 어떻게 나타냈는지가 영원히 우리가 받을 긍휼과 자비를 결정합니다. 영원을 결정짓는 첫번째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주어집니다. 두 번째 기회는 없습니다.

부자는 이 중대한 진리를 깨달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구하지 않고 자기처럼 살고 있는 형제들을 걱정합니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27,28)”

부자는 나사로가 부활하여 자기 집에 가서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증언해 주기를 구합니다. 이렇게 하기만 형제들이 정신을 차리고 회개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사로를 알아본 형제들이 틀림없이 나사로의 증언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어쩌면 부자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 경고해 주었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

아브라함은 부자의 두번째 청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가리킵니다. 부자가 형제들이 꼭 알았으면 하는 내용이 이미 구약 성경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율법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라 명하고 있습니다. 삼 년마다 십일조를 한 번 더 해서 구제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는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 외에도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등등 성경은 계속해서 부자가 잘 몰랐다고 생각한 그 사실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굳이 가지 않아도 성경이 이미 그 사실을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30)”

그러나 부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면 다르게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된 성경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다 센 충격요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표적이 있어야 제대로 경고의 음성을 듣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어떻게 말합니까?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31)”

아브라함은 성경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증언해도 듣지 않을 것이 뻔하다는 것입니다. 참 흥미롭게도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분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신약 성경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거부하고 그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은 성경을 무시한 것뿐만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이의 증언을 듣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가 이렇게 해서 끝났습니다. 이후에 바리새인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비유 속 부자처럼 살아온 이제까지의 삶을 뉘우치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재물로 영원한 친구를 만드는 삶을 살기로 했을까요? 아니면 구약의 율법도 예수님의 말씀도 전혀 듣지 않고 완악하게 자신의 길을 계속 고집했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던 바리새인들 중 누구도 비유가 끝난 후에는 웃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는 최근 누가복음 말씀을 통해 예수님으로부터 재물에 관한 제자도를 집중적으로 들었습니다. 듣고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정신을 차려야겠다. 돈을 사랑하던 마음과 재물을 섬기던 삶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섬기야 하겠다. 재물로 영원한 친구를 사귀어야 하겠다” 결심하셨습니까? 아니면 “말씀이 너무 부담스럽다. 너무 수준이 높아서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설마 바리새인처럼 “참 비현실적인 소리를 한다. 요즘 같은 자본주의 시대에 가능한 소리냐? 내 장담한다. 저 말씀대로 살다가는 나중에 돈이 없어서 크게 후회하는 날이 올 걸.” 이렇게 비웃는 사람은 한 분도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부족한 것이 백 가지도 넘겠지만 그래도 자부심을 가질 만한 한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국 교회 안에 만연한 기복 신앙, 미국 교회 안에 주류를 형성한 번영 복음에 물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지켜왔다는 것입니다. 기복 신앙과 번영 복음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얼마든지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돈이 많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가르칩니다. 부자 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부를 축적하라고 합니다.

우리 선교사님들과 목자님들 중에는 부를 추구하고자 마음먹고 올인했다면 얼마든지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물질을 자기를 위해서만 쓰고자 했다면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를 사고,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청지기적인 자세로 열심히 일하고 관리해서 주님 뜻대로 사용고자 했습니다.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면서 물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모은 물질을 자기를 위해서만 쓰지 않았습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서, 영혼 구원하는 일에, 동역자들을 섬기는 일에 기꺼이 드렸습니다. 재물로 영원한 친구를 사귀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를 두고 살아왔습니다.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제자다운 제자로 사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고 이상이며 가치였습니다. 주위에서 아무리 조롱하고 비웃어도 우리는 이 길을 가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 가운데 이런 가치관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전에는 양을 치고 제자 양성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다른 곳에 눈 돌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양도 별로 없고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어느 날 눈을 들어 보니 다들 나보다 윤택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나보다 못했던 친구가 지금은 한참 앞서 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사촌동생이 땅을 샀다는 소식을 들으니, 맘이 영 안 좋습니다. 주님 섬긴다고 올인했다가 나만 뒤쳐지고 있는 것 같은 손해의식이 듭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재테크에 올인해야겠다 결심합니다.

만약 이대로 계속 흘러간다면 자칫 우리마저 기복 신앙, 번영 복음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사태를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유 속에 이미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입을 빌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에 기초해서 회개하고 순종하라 하십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거세게 밀려오는 물질주의의 파도에 맞서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의 메시지이며 천국과 지옥의 실제를 정확하게 아시는 분의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말보다 신뢰할 만한 말이며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가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 회개할 부분이 있다면 주저 없이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 하나님의 긍휼이 머무는 곳으로 흘러 나가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장차 아브라함의 품 안에 안기는 복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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