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이창무 2022. 9. 18.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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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4 강 / 이창무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말씀 / 누가복음 13:1-9
요절 / 누가복음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제가 인사팀에 근무하던 시절 한 명이 미국 LA에 파견갈 일이 있었습니다. 저와 제 일년 선배가 후보가 되어 누가 갈 지 끝까지 엎치락뒤치락 했습니다. 결국 한 살이라도 나이 많은 사람에게 먼저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결정이 났습니다. 선배는 미국에 가자마자 현지에서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면허를 받자마자 연습을 하겠다며 회사차를 몰고 나갔다가 하이웨이에서 트럭과 충돌하여 현장에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바로 옆자리에서 일하던 사람이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습니다. 문득 선배 대신 내가 파견을 갔다면 내가 그렇게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안타까운 사고들,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사건들, 우리 마음을 무겁게 일들, 그렇게 다양한 뉴스를 접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시각으로 이런 일들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1)”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소식 하나를 전합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터졌길래 사람들이 직접 와서 예수님께 알리고자 했을까요?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는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빌라도가 사람의 피와 제물의 피를 함께 항아리에 담아 큰 주걱으로 휘젓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혹시 빌라도가 해리포터에 나오는 볼드모트 같은 암흑의 마법사였을까요?

여기서 섞은 일이란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것을 묘사하는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곧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바칠 때 빌라도가 그들을 죽여 피를 흘리게 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식민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반역자를 죽이는 것은 빈번하게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더 뜨거운 이슈가 된 것은 이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중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끔찍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상황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일본 군인들이 교회에 들어와 독립군과 관련이 있다며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무참히 죽이는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사건 소식을 예수님께 전달한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하며 왔을까요? 예수님이 빌라도에 대해 ‘감히 성전에서 학살을 저지르다니! 빌라도는 결코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식의 시사 논평을 기대했을 지 모릅니다. 아니면 정반대로 로마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갈릴리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하실 것을 예상했을 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조용히 기도할 것이지. 왜 어리석게 위에서 세우신 권세에 대들다가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2)”

당시 사람들은 불행한 사고,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비참한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를 더 많이 지었기 때문에 벌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보편적인 해석이고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

예수님은 먼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십니다. 그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비참하게 죽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죄가 없다고 하지도 않으십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이런 불행한 일을 겪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못 박으십니다.

2004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서부 해안 40Km 지점에서 규모 9.3의 강진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지진 해일 일명 쓰나미가 인근 해안을 덮쳐 3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5만 명이 실종되고 169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하는 대참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교계의 한 유명 원로 목사님이 그들이 특별히 죄가 많아서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신 것이라고 설교를 해서 엄청난 물의가 일어났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아체에서는 기독교인들을 학살했고 첸나에서는 힌두교가 창궐했으며 푸켓은 향락과 죄 짓는 장소이기 때문에 이곳에 쓰나미가 덮쳤다고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려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경우가 분명히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고를 당하거나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습니다.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욥은 영문도 모른 채 엄청난 고난을 당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모든 것이 그가 범한 죄의 결과라며 욥을 정죄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너희가 틀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재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솔직히 잘 모릅니다. 축구공만한 우리 머리로는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재난의 원인과 목적을 마침 한 큐에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고 주제 넘은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단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너나 나나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죄는 반드시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몇몇 사람이 사고로 죽은 일에 놀랄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세상이 아직 멸망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멀쩡히 계속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의 여러 재난과 사건 사고 소식을 접하며 무슨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온갖 사건 사고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를 나를 향한 경고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모든 인생은 결국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곳은 죽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조금 빨리 도착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오래오래 살다가 조금 늦게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 영원이란 시간과 비교했을 때 이 땅에서 몇 년 혹은 몇 십년의 차이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느냐 아직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 문제가 청산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습니다. 영원한 멸망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계속 경고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을 통해서 또한 소돔과 고모라에 내렸던 불 심판을 통해서 경고하십니다. 더불어 재난의 소식을 통해서 나에게도 언제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 계십니다. 우리가 정신차리고 언제 내 인생에 닥쳐올 지 모르는 종말의 날을 대비하도록 하십니다. 재난의 소식을 나를 향한 경고의 음성으로 듣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재난 소식의 올바른 사용법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하나의 사건을 더 언급하시며 똑같은 말씀을 한 번 더 반복해서 강조하십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4,5)” 

실로암은 기혼 샘에서 흘러들어온 물을 저장해 예루살렘에 식수로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 연못입니다. 빌라도는 이곳을 보호할 목적으로 망대를 건축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그만 공사 도중에 망대가 무너져 열 여덟 명의 인부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 사건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뉴스가 될 만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태풍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손흥민 선수는 골을 넣었는지, 신당역 살인 사건의 내막이 무엇인지 등등을 알기 위해서 주로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자주 듣습니다. 막내가 아빠는 왜 맨날 재미없는 뉴스만 보냐고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뉴스를 주목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가 주의해야 것이 있습니다. 주의하지 않으면 그런 소식들이 주는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함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뉴스를 통해 우리의 밖을 주목하다가 그만 우리의 안을 들여다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 그 사건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에 정신에 팔린 사이, 나 자신을 살피고 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따지고 다른 사람에게 분노하는 사이, 나의 잘못을 점검하고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그들이 당한 재난을 생각하면서도, 정작 나의 인생에 대해서, 나의 죄 문제에 대해서, 나의 죽음과 종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일 아닙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먼저 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뉴스에 정신 팔려 보지 못했던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점검한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구나!” 내가 얼마나 형편 없는 자인지, 내가 얼마나 자격 없는 자인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심판 받아야 할 죄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내 안에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괴롭지만 이모습부터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서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예수님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전환이 필요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냅 둬유. 그냥 이대로 살게 냅둬유.”라는 말부터 나오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지금까지 살던 대로 계속 살려고 하는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뛰어넘으려면 부단한 내적 투쟁과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후회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이렇게 삶의 변화까지 나아가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회개입니다.

그런데 꼭 이렇게 해야 할까요? 회개 안 하고 신앙 생활하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힘들어도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만이 우리가 죄 문제를 대하는 올바른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묻어 두고 회피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다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는 덜 심각하다고 변명해 봐야 의미 없습니다. 그래 봐야 오십보 백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핑계를 대봐야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 길은 오직 회개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라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의 말씀인 동시에 망하지 않을 길, 살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는 희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은 행한 대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제까지 어떤 삶을 살았더라도 회개하면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회개야말로 십자가의 복음, 죄 사함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통로입니다. 우리가 참된 회개를 통해서 이와 같은 복음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한 비유를 통해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언제 회개해야 하는가에 관해 가르쳐 주고자 하십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6)”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왜 포도를 안 심고 무화과 나무를 심었는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주인이 무화과나무에 어떤 특별한 기대를 가진 것 같습니다. 주인은 열매 맺을 때에 되자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와서 열매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무화과 나무에는 아무 열매가 없었습니다. 주인은 실망이 컸지만 한 해를 더 기다려 보자는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듬해 다시 열매를 구했지만 얻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게서 열매를 구했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무엇을 명합니까?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7)”

이것은 주인의 당연한 요구입니다.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심고 열매 맺을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포도원지기를 보내서 지극정성으로 무화과나무를 가꾸도록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삼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도 열매가 없었습니다. 나무로서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땅만 차지하고 아무 열매도 내지 못하는 이 나무를 당장 찍어버리자고 포도원지기에게 명령합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그들을 심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여러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사랑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열매가 맺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를 일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참고 또 참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열매 맺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심지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기대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이 땅에 심으신 주인이 가지는 당연한 기대입니다. 그러면 믿는 자의 열매가 무엇일까요? 성경 전체에서 다양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열매는 곧 변화입니다.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생각의 변화 등등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목표를 가지고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다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았다고 하는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어떨까요? 사는 것도 똑같고 생각하는 것도 똑같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다 똑같고 모든 것이 똑같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 보시에게 열매 없는 나무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나무를 찍어 버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나무입니까?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까? 달라지고 있습니까? 나의 삶이, 나의 가치관이, 나의 말과 행동이, 내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 내가 돈을 쓰는 목적이 점점 바뀌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열매 없는 나무입니까? 세상의 흐름에 따라 적당히 어울려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문제의 모든 원인을 바깥에서 찾으며 다른 것을 핑계대며 변화를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이야기에 주목하느라 내 영혼을 방치한 채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은 어느 때보다 나라 안팎으로 참 시끄러운 때인 것 같습니다. 환율 폭등, 물가 상승, 금리 상승 등 경제가 앞으로 참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미국 대 러시아, 중국 고래 싸움에 우리 나라는 새우등이 터질 것 같습니다. 정치권도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하기만 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내 안에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열매 없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마땅히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해,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열매 맺는 나무가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년을 기다려도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버리자 하는 주인에게 포도원지기는 무엇을 구합니까?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8,9)”

그는 금년에도 그대로 두기를 간청합니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노라 말합니다. 1년만 더 기회를 달라고 애원합니다. 포도원지기 덕분에 다시 한 번 열매를 맺을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한 번 뿐입니다. 만약 일년 후에도 열매가 없으면 찍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율법대로 하면 우리는 모두 찍혀 버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중보 기도 덕분에 다시 한 번 열매 맺을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의식을 가지고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돌이켜 다시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는 삶을 살아갈 기회가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부터 당장 부지런히 회개하기에 힘쓰면 얼마든지 열매 맺는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장 잘라내지 않고 한번 더 기회를 다시 주셨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만하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회개를 나중으로 미루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 맺기보다는 내의 소원과 꿈을 이루는 것에만 계속 매달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입니다. 은혜로 주어진 마지막 기회마저 그냥 허송 세월로 흘려 보낸다면 다시는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지 모릅니다. 그날에 뒤늦게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게 될 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에는 결말이 없습니다. 열린 결말로 끝이 납니다. 열매 없는 나무가 후에 열매를 맺었는지 아니면 찍혀 버렸는지 안 나옵니다. 영화를 보다가 열린 결말로 끝나면 웬지 찜찜합니다. 이 비유도 그런 찜찜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굳이 열릴 결말로 비유를 끝맺으셨을까요? 혹시 이 비유의 결말은 이 말씀을 듣는 너희가 써내려가라 라는 뜻을 담고 계신 것 아닐까요? 이 비유가 비극으로 끝날 지 해피 엔딩으로 끝날 지는 결국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기에 힘쓰는 삶을 산다면 우리 인생은 반드시 해피 엔딩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를 거부하고 열매 맺지 못한다면 우리 인생은 배드 엔딩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암 1부의 모든 분들이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해피 엔딩을 맞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고 풍성한 열매 맺는 삶 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나를 살피며 회개함으로 열매 맺는 삶,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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