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이창무 2022. 9. 4. 15:36
반응형

2022년 누가복음 제 23 강 / 이창무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말씀 / 누가복음 12:35-48
요절 / 누가복음 12: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인도네시아에서 오래 살다가 들어오신 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예를 들어 친구끼리 9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하면 11시 정도는 되어야 다 모인다고 합니다.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고 다들 즐겁게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서 살다가 한국에 오면 정시에 맞추어 사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한국 사람이 인도네시아에 가면 혼자서 분통을 터트리고 씩씩거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뭐든지 빨리 빨리를 좋아하는 성질 급한 한국 사람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이 기다림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정체성 중 하나가 바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

여기 두 개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먼저 허리에 띠를 띠는 것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입던 통으로 된 긴 옷은 활동하기에 그리 편한 옷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야 할 때는 겉옷의 허리 부분을 띠로 졸라매야 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꾼다면 소매를 걷어붙이는 것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등불을 켜는 것은 어두운 밤에 사람을 맞이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길에 가로등이 없던 시절에 등불을 켜 두어야 집을 찾아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는 것은 어떤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일까요?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36)”

바로 혼인 집에서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모습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결혼식을 해질녘에 시작했습니다. 신랑신부가 퇴장하면 결혼식이 끝났습니다. 그후 하객들이 모여 피로연을 하고 나면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종의 입장에서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아 간 주인이 몇 시에 돌아올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38절에 보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이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경은 밤 9시부터 12시이고 삼경은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입니다. 요즘에는 이 시간까지 깨어 있는 사람이 흔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해 떨어지면 잠자리에 들어가던 시대에 늦은 시간까지 주인을 기다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졸음과 싸워야 하고,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자주 기름을 채워 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 포기하고 잠들어 버리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릴 때 즉시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인을 맞이할 준비된 종이 되라 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한밤 중에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릴 때 종이 즉시 나와서 문을 열고 영접한다면 이때 주인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사실 주인이 별 반응 없이 피곤하다며 그냥 들어가 자버릴 수도 있습니다. 주인을 영접한 것은 종으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깨어 기다린 종에게 보상을 주고자 합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37)”

보상의 수준이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파격입니다. 이제 주인이 종을 위해 허리에 띠를 졸라맵니다. 기다린 종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기 위해서 입니다. 평소 주인이 앉던 자리에 종들을 앉힙니다. 주인이 직접 만든 랍스터를 곁들인 리조토, 투 플러스 등급의 한우 안심 스테이크와 티라미수 케익 디저트까지 풀코스로 서빙을 합니다. 주인이 얼마나 기쁘고 감동을 받았으면 이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이런 대접을 받는 종은 기분이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깨어 기다리느라 애쓴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예수님을, 종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혼인 집에 갔던 주인이 돌아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혼인 집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시는 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 때는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과 섭리에 속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잔치집에 갔다가 돌아온 주인처럼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한 가지 사실은 확실히 압니다. 금년에 오실 수도 있고 내년에 오실 수도 있습니다. 10년 후에 오실 수도 있습니다. 언제 오실 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그때까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밝히고 서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잠든 캄캄한 밤이라 할지라도 깨어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 사람을 위해 잔치를 벌이실 것입니다.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축복과 영광으로 상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 상급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현재를 사는 성도들에게 끝까지 깨어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에 대한 로망이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다웠고 성도는 성도다웠던 그 시대를 사모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언제나 가까운 곳에 성경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함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별다른 위험 없이 자유롭게 교회에 모이고 예배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난하고 위험했고 어렵고 힘겨웠던 초대교회가 오히려 더 우리보다 더 힘이 있고 열정적이고 영적으로 부요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극심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증거하며 복음을 위해 죽을 각오까지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가진 것에 비해 너무나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곧 오실 것이라는 기대와 설렘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모임이 끝나고 헤어질 때마다 이런 인사를 서로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장차 오실 주님이 주실 상급을 바랐습니다. 그래서 땅의 것,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 것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땅히 두려워할 분인 하나님만 두려워했습니다. 세상의 염려에 빠지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다른 삶을 살게 만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 그 기대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다르게 만들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에 대한 기대를 새롭게 하고 그 날을 사모하는 가운데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조금 다른 측면에서 깨어 기다리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39)”

예수님의 비유는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종에서 예상치 못한 도둑의 침입을 대비하는 집 주인으로 바뀝니다. 추리소설 ‘괴도 루팡’의 주인공 루팡은 자기가 언제 보석을 훔치러 가겠다 미리 알리는 대담한 절도 행각을 보여 줍니다. 그런 이런 일은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이지 현실의 도둑은 자신이 언제 방문하는지 미리 알려주는 법이 없습니다. 도둑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와서 집을 뚫고 세간살이를 훔쳐갑니다. 그러므로 집 주인은 항상 문단속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4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으라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군에서는 대침투작전 일명 진돗개 훈련이라는 것을 합니다. 근처 부대 병사들을 차출해서 무장간첩 역할을 맡겨 한밤중에 군부대에 침투를 시도하게 합니다. 만약 침투에 성공하면 그 병사는 포상 휴가를 받아 집으로 가게 됩니다. 반면 침투 경로 상에서 경계근무를 섰던 병사는 징계를 받아 영창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밤새워 추위와 배고픔과 졸음과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대에서는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 받을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 받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주님의 군사 된 성도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잘 해 보려고 하다가 실수도 하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일은 너그럽게 이해하시고 다음 번에는 잘 하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전혀 하지 않고 잠들어 있는다면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서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신약의 핵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누구나 다 최후의 심판 때 불 시험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 전체를 불 구덩이 속에 넣어 무엇이 타서 없어지고 무엇이 타지 않고 남는지 보실 것입니다. 남은 것이 많으면 상을 받겠지만, 다 타고 남은 것이 없으면 해를 받으리라고 경고하십니다. 디도서에서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은혜는 결코 우리의 책임을 도외시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빌미로 삼아 대충 신앙생활하고 적당히 살려 한다면 은혜를 남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도리어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고 기꺼이 그 책임을 다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의 책임은 분명합니다. 미래에 있을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젊은 때는 내 맘대로 살다가 죽을 때가 가까이 올 때부터 준비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 지 우리는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종말의 시점이 어느 때인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삶의 모든 순간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할 시기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알려 주십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41)”

베드로는 재림에 관해 방금 하신 말씀이 열 두 제자와 같은 리더들에게만 적용되는지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인지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직접적인 답을 주시기보다 또 다른 비유를 통해 그들 스스로가 답을 발견하도록 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42)”

이번 비유에는 주인, 청지기, 종들 이렇게 세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주인이 장거리 출장을 인해 어쩔 수 없이 집을 비우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청지기 한 명을 대리인으로 세워 그에게 그 집 종들을 맡기고 떠납니다. 이때 청지기의 가장 중요한 책무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 집 종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잘 하려면 청지기에게 어떤 자질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라 하십니다. 이 부분을 원어의 순서와 뉘앙스에 따르면 충성스럽고 지혜 있는 청지기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첫째, 청지기는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청지기의 제 일의 자질은 충성입니다. 충성이란 무엇입니까? 변함 없이 지속적으로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일을 하다 보면 항상 컨디션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의욕이 안 날 때도 있고 마음이 상할 때도 있고 피곤하고 지칠 때도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좋을 날은 물론이요 좋지 않을 때도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오락가락하지 않는 충성된 청지기는 믿을 만 합니다. 그래서 주인은 이런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습니다.

둘째, 청지기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혜를 써서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충성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무대포로 하다가 도리어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말씀에도 나와 있듯이 때를 아는 분별력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일의 우선 순위를 식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주인의 재산과 종들을 잘 관리하여 유익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예수님이고 청지기는 장차 사도로서 교회를 섬기게 될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종들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이 땅 위의 교회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들이 때를 따라 성도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줄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청지기의 사명에 합당한 충성과 지혜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한다는 것은 다 같이 피지 섬에 가서 공동 생활하자는 식의 현실 도피가 결코 아닙니다. 현재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충성스럽게 그리고 지혜롭게 감당하고 섬기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교회 안에서 크고 작은 역할과 책임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일대일 목자는 일대일 양을 맡은 청지기이며 각각 직분과 은사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청지기들이 있습니다. 요회 목자님은 요회를 맡은 청지기이고 러너스 팀 리더는 팀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양육을 책임 맡은 청지기이며 교사 목자는 다음 세대 신앙 교육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장차 재림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맡은 바 소임을 다 하였느냐? 아니면 이리저리 도망 다니거나 대충 했느냐? ” “너는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었느냐? 아니면 무책임하게 방치했느냐?” “나의 집에 너는 얼마나 유익을 남겼느냐? 아니면 도리어 손해를 끼쳤느냐?” 우리가 이 질문에 부끄럽지 않은 대답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네, 주님!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청지기 노릇하기 정말 쉽지 않습니다. 주인도 아닌데 주인의 역할을 대신 해야 하니 어떻게 보면 주인 노릇보다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못 하면 무능하다고 질책을 받고, 잘 하면 잘 하는 대로 다른 종들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의도와 달리 오해도 많이 받습니다. 주인도 아닌데 주인에게 향할 온갖 비난을 대신 받아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청지기는 외롭습니다. 주인의 일을 감당하는 동안 그는 철저한 고독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줘도 예수님은 아십니다. 얼마나 힘들고 아픔이 많았는 지 다 아십니다. 그 고충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런 청지기가 어디 있겠냐고 질문하십니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주님의 뜻을 받들어 주어진 책무를 끝까지 성실하게 감당한 종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요?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43,44)”

예수님은 그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복입니까? 주인이 그 소유를 모두 다 그에게 맡깁니다. 이것은 주인이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종이라는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모하는 주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최상의 칭찬이고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날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해서 부족하지만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을 뿐인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런 복을 누리게 되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지만 모든 종이 다 이와 같은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제 신실하지 못한 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45)”

이 종은 처음에는 괜찮은 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그를 믿고 청지기 직분을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흐르게 되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주인 역할을 대신하다 보니 어느덧 자기가 주인인 줄 착각에 빠져 갑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괘씸하게 여기던 종을 홧김에 때렸습니다. 혹시 주인이 나타나 혼이 날까 봐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점점 간이 커졌습니다. 상습적으로 남녀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하며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주인이 이제까지 안 왔으니 아예 영원히 안 올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46)”

이날도 평소처럼 실컷 먹고 마시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런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주인이 왔습니다. 주인이 보니 집안이 난장판이었습니다. 종들은 청지기에 얻어터져 붕대를 감고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술에 취한 청지기는 주인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이에 주인은 그를 엄히 때도록 했습니다. 엄히 때린다는 말은 좀 많이 때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실 이 단어는 본래 몸을 둘로 쪼개다는 뜻을 지닌 무시무시한 단어입니다. 주인으로부터 영원히 버림 받아 분리되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신실하지 못한 종의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47,48)”

여기에 심판의 원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다 알면서도 고의로 주인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습니다. 모르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습니다 주인은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할 것입니다. 많이 맡은 자에게 많이 달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종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얼마나 큰 권한을 맡았느냐에 따라 책임이 다 다릅니다. 많이 알고 큰 권한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욱 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실하지 아니한 종이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된 가장 주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안일한 생각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혼인잔치 집에 간 주인처럼 반드시 돌아오십니다. 갑자기 오늘 오실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주님이 오시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설마 오늘 오시지는 않겠지, 설마 금방 오시지는 않겠지 하면서 세상 쾌락에 취해 흥청거리는 순간 주님이 오시면 얼마나 낯이 뜨겁겠습니까? 우리 각자에게 인생의 시간이 얼마나 더 남아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경고가 현실이 되는 날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지혜를 다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맡은 바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람들을 힘을 다해 보살피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축복된 일이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이렇게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 깨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둘째, 주님이 맡겨 주신에 충성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묶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만날 그날을 깨어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날을 기다리면 맡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반응형

'설교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1) 2022.09.25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2) 2022.09.18
염려하지 말라  (0) 2022.08.28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3) 2022.08.21
복이 있는 사람  (0) 2022.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