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창세기 17:1-27 연구

이창무 2019. 6. 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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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창세기 17:1-27

〈창 17:1, 개역개정〉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아브람이 99세이다.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은 지 24년이 지났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뒤로는 13년이 지났다. 이스마엘의 나이가 만으로 13살, 우리 나이로 14살이다. 중 1 정도 나이다. 창세기 기록이 많은 세월을 건너 뛰고 있다. 지난 장으로터 13년이 지났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오랫동안 잠잠하셨을까? 아브람이 정신 차릴 때까지 두고 보신 것일까? 이 13년 동안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키우고 살았다. 노년에 얻은 외동 아들이다. 너무 사랑스럽다.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하다. 이럴 때 쓰는 상투적인 표현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이다.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버렸다.
  • 왜 13년을 건너 뛰었을까? 기록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13년이나 지나서 99세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을까? 그 목적이 무엇일까? 그냥 계속 이렇게 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삶이 뭐가 문제일까? 이렇게 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만으로 큰 성취를 이룬 것이다. 이스마엘 잘 키워서 장가 가는 것 보고 눈 감으면 잘 산 인생이 아닐까? 그러나 아브람은 그러면 안 될 사람이다. 아브람에게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도 적용할 점이 있다. 우리가 남들만큼 평탄하게 별 탈 없이 사는 것 쉽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 사람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다. 내 앞에 행하여라는 말은 내 앞에서 걸어가라는 말이다. 지금 아브람은 지난 13년 동안 이스마엘 앞에서 살았다. 내 앞에 행하여라는 말은 너는 내 앞에서 부르심 받은 사람이다. 너는 믿음의 조상이 될 사람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너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완전해져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현재 아니다. 부족하다. 앞으로 더 나아야할 방향이 있고 더 성취해야 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을 왜 하셨을까? 하나님의 엔드 게임이다. 아브람의 인간적 소망이 다 끊어져야 하나님의 엔드 게임이 시작됩니다. 아브람은 인간적으로 소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꾸로이다. 너의 인간적 소망이 끊어졌으니 이제 내가 나설 떄라고 하신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많은 사람의 생각이다. 우리는 그 정도로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창 17:2-6, 개역개정〉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 2절에 나오는 내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처음 부르실 때부터 하신 언약이다. 많이 들은 언약인데 왜 또 이야기하실까? 아브람이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언약을 붙들고 애굽에도 가고 그돌라오멜과 싸우기도 하고 그런 적이 있었지 하면서 추억하면서 회고하기만 할 뿐이다. 왕년이라는 말이 아브람의 입버릇이었다. 과거만 있었고 미래가 없었다. 언약을 다시 상기시켜 주신다. 아직 언약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아브람이 왜 엎드렸을까? 아브람이 깜짝 놀란 것이다. 13년만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고 놀랐다. 안 나타실 줄 알았는데 다시 나타나시니 놀랐다. 이제야 처음 등장하는 표현이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왜 이 시점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의 후손이 민족을 이룰 것을 말씀하셨다. 한 민족은 이미 있다. 아브람은 한 민족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 말고 너의 후손에서 나올 또 다른 민족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다.
  • 그래서 이름을 바꾸어 주신다. 아브람은 고상한 아버지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여러 나라의 아버지. 많은 사람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왜 이 시점에서 이름을 바꾸어 주셨을까? 이름을 바꿈으로 꿈을 꾸게 만든다. 정체성을 명확히 한다. 이름은 예언적인 의미가 있다. 미래를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아브람은 고상한 아버지로 살았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었다. 그 목적을 이루었다. 거기에 만족하고 있었다. 사실 고상한 아버지 되기도 힘들다. 20대 여자들에게 만약의 당신 현재 나이의 엄마를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은가 설문 조사를 했다. 1위가 아빠랑 만나지 마였다. 아버지들은 자기 딴에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딸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고상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까? 여러 민족의 아버지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 우리가 늘 갖는 생각이 할만큼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에서 멈춘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비전은 그보다 더 멀리 더 높이 설정이 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과 목표를 외면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다. 현실이 쉽지 않다 보니 자꾸 기준점을 내려 버린다. 뒤로 가면 갈수록 그렇게 된다. 어릴 때는 멋모르고 큰 비전을 갖고 꿈을 꾸다가 세월이 흐른 후 다 끌어내린다. 우리가 우리를 규정하고 한정 짓는 것보다 하나님은 우리를 훨씬 더 큰 존재로 소망 두고 계시다. 가만 있는 아브람을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도전하시고 자극하신다.
  • 왜 13년 기다리셨는가? 아브람이 이스마엘과 알콩달콩 사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신 것 같다. 수십 년 아들 문제로 끙끙대어 왔는데 그냥 좀 누려봐라 내버려 두신 듯 하다. 하나님은 여유가 있으시다. 풀어줄 때는 풀어주시는데 이때는 당기고자 하시는 시점이다.
〈창 17:7-14, 개역개정〉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 7절부터 9절까지 영원한 언약이 나온다. 앞에서 나왔던 언약과 흡사한데 다른 부분이 무엇인가? 앞에서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일대일이었는데 여기서는 후손들이 나온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 너의 후손이 이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앞에는 사적인 계약의 성격이 있었다면 여기서는 민족 전체가 당사자가 되기 떄문에 공적인 성격이 있다.
  • 언약의 표징으로서 할례를 행하도록 하신다. 할례의 대상이 누구인가? 남자여야 한다. 그리고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다. 이 안에는 종들도 다 포함된다. 그 종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유대인만 할례를 한 것은 아니다. 언약에 포함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 왜 하필이면 할례를 언약의 표징으로 삼으셨을까? 자손을 의미한다. 혈통을 통해서 언약이 계승되기 떄문이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신약 시대로 오면 할례가 세례 속으로 흡수된다. 신약 시대에서는 마음의 할례를 강조한다. 사실 이런 강조는 구약에도 있다. 예레미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의 말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마음에 언약을 새기라는 뜻이다. 할례를 할 때 포피를 버린다. 옛사람과 구습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의미를 갖는다. 자손을 통해 언약이 계승이 된다는 의미는 유아 세례에 담겨져 있다. 난 지 팔일 만에 한 것은 태어나자 마자 받을 수 없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어서 최대한 빨리 받을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고 칠 일이 지난 후라는 의미도 있을 수 있다.
〈창 17:15-18, 개역개정〉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 사래는 나의 공주라는 뜻이다. 사라는 여주인이라는 뜻이다. 사라의 나이는 89세이다. 아브람의 열 살차이다. 나의 공주는 안 어울린다. 여주인이 어울린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적이 없다. 항상 아브라함과 관계를 맺으셨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사라하고도 관계성을 맺으신다. 사라가 믿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라가 믿음이 없으니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사라를 축복하셨다. 믿음의 조상이 아브람만이 할 수는 없다. 사라도 포함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남편이 믿음으로 살려 해도 아내가 발목을 잡으면 어렵다. 서로 한 몸이다.
  • 이때 아브라함의 반응은? 엎드려 웃었다.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이 웃음은 어떤 웃음입니다. 허탈한 웃음. 농담으로 여기는 웃음. 사라는 가능성이 없었다. 하나님은 진지하게 말씀하시는데 아브라함의 반응이 웃음이라니! 우리도 하나님이 불가능해 보이는 약속을 말씀하시면 이 아브라함처럼 허탈한 웃음을 웃게 된다.
  •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게 해 달라고 한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문제가 농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들 안 주셔도 됩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이런 말이다. 그런데 왜 꼭 이삭이 태어나야 하는가?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창세기에는 이런 패턴이 많다. 이삭의 자녀 에서와 야곱 중에서도 야곱이 선택 받았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된 사람, 예정된 사람은 따로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이스마엘이면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심각한 말이다. 기도를 많이 하고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래야 분별력이 생긴다.
〈창 17:19-27, 개역개정〉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21)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24)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25)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26)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27)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 19절에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아니라고 하신다. 이스마엘 아니고 사라가 낳을 아들이라 하였다. 이스마엘은 따로 계획이 있으시다. 이스마엘도 복주어 열두 두령을 낳고 큰 나라가 되게 하실 것이다. 이스마엘은 염려 붙들어 매고 너는 사라 사이에서 언약의 자손을 낳아야 한다. 언제 성취되나? 일 년 후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대답도 듣기 전에 올라가 버리셨다. 왜 빨리 가셨을까? 아브람이 또 헛소리 할까 봐서가 아닐까 한다.
  • 이후에 아브라함의 반응을 보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내용을 믿고 순종해 따르겠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믿음이 행위로 나온 것이다.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지게 한다. 믿음은 삶을 낳는다.
  • 아브라함이 99세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오래 참으신 분인가? 하나님은 재밌는 분이시다. 아브라함이 아들 아들 할 때는 안 주셨다. 99세에 안 주셔도 되어요 할 떄는 주신다고 하신다. 주세요 할 때 안 주시고 다 내려 놓으면 주실 때가 있다. 모세도 마찬가지다. 히브리인의 지도가로 나섰을 때는 광야로 보내셨고 광야에 적응해서 이대로 살다 죽을래요 할 때는 네가 가라고 하신다.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다. 다 하나님의 떄가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내 뜻 내 계획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힘을 빼셨다. 그리고 그 때서야 아들을 주시려고 한다. 오직 아브라함의 믿음만이 남았을 때 그떄 역사하셨다. 우리가 힘을 빼야 하나님과 핀트가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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