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조직신학

개혁주의 신학에 대하여 새롭게 배우고 정립한 것

이창무 2015. 5. 1.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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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에 대하여 새롭게 배우고 정립한 것


나의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프로파일에는 나 자신을 소개하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 개혁주의 신학을 사랑하는 자…” 나를 개혁주의 신학으로 인도한 것은 독서였다. 마틴 로이드 존스, 존 파이퍼, 마이클 호튼, 조나단 에드워즈, 존 칼빈, R.C. 스프로울 같은 저자들의 책을 탐독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이야말로 가장 성경적이며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후 개혁주의 신학의 전도사가 되어 개혁주의 신앙 고백 교리 공부에도 열심으로 참여하고 내 스스로 기독교 강의 읽기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인도해 보기도 했다. 이런 내게 한 가지 틈이 생기게 만든 일이 있었다. 김동호 목사님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나는 예정론을 믿지 않는 칼빈주의자’라는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그 글 아래로 개혁주의자들의 엄청난 공격성 댓글이 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로 반개혁주의자들이 개혁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댓글이 달렸다. 나는 물론 예정론을 믿지 않는 칼빈주의자라는 말은 모순이라고 여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험한 비난을 늘어 놓고 심지어는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 자칭 개혁주의자들의 모습 또한 동의할 수 없었다. 또한 의외로 개혁주의에 상처 받은 이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좋은 개혁주의에서 별로 아름답지 못한 열매가 열리게 되었을까? 나의 고민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이번 학기 수강하게 된 개혁주의 생명신학 강의를 통해 개혁주의가 가진 탁월함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고 아울러 내가 아직까지 보지 못했던 몇 가지 점들에 주목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첫째로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오직 성경이란 곧 전체 성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몸 담은 교회의 성경 사랑은 조금은 유별날 정도였다. 매일 아침마다 Q.T 시간을 갖고 성경 묵상 하기를 강조했고 모든 교인들이 매주 한 번씩 의무적으로 성경 공부 모임에 참여해야 하며 설교를 들은 후에는 소그룹에서 그 설교를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을 가지고 나누도록 하였다. 나는 우리 교회의 이런 뜨거운 성경 사랑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 보니 한 가지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바로 성경을 사랑하지만 전체 성경을 다 사랑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 왔던 성경 공부 교재를 살펴 보니 창세기, 복음서, 바울서신서에 집중되어 있었다. 선지서, 지혜서, 시가서, 계시록 등은 거의가 빠져 있었다. 설교의 내용 역시 성경 그대로 전하기 보다는 전도와 선교, 개인의 구원, 경건 생활 등 위주로 치중되어 있었다. 공평과 정의를 요구하는 선지서의 내용들,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시편 기자의 풍부한 체험들, 이 세대에 대한 묵시적인 통찰력 등을 접하기 힘들었다. 첫 시간에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속한 교회의 기조는 복음주의 또는 근본주의였지 개혁주의는 아니었던 것이다. 전체 성경을 온전히 붙잡지 못하고 성경의 일부분만을 전부로 치환하여 그것만을 고집한다면 이것 역시 부족한 기독교가 되고 말 것이다. 그 결과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 생활에서 어떻게 성경에 기초한 삶을 살 것인지, 정치나 경제 현상들을 어떻게 보는 것이 성경적 관점인지에 대한 가르침은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신자들이 성경 대신 세상의 원리를 그대로 따라 가거나, 아무 생각 없이 목회자의 개인적 소견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말게 되었다. 이제라도 자신의 입맛이나 전통에 따라 성경의 특정 부분만을 부각시키려 하기보다 성경 모든 말씀 앞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거기에 겸손히 부복하는 신학도가 되고 장차 그런 목회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둘째는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책임를 또한 강조하는 신학이라는 점을 배웠다. 개혁신학이라고 하면 예정론을 중심으로 하는 철저한 하나님 주권 사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 동안 다소 인간 중심의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처음 개혁주의 신학을 접하고 개혁신학이 강조하는 하나님 주권 사상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래서 셋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의 이름을 ‘예정’이라고 지으려고 했었다. 우스개 소리로 예정일에 정확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예정’이라고 짓자고 했지만 사실은 내가 예정론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내의 반대로 ‘예정’이라 이름 짓기는 실패하고 결국 ‘예나’라는 이름을 주고 말았다.) 그러나 내가 성경을 읽어 보면 예정론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인간의 책임을 중요시하는 부분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 마음 속에서 예정론이 진리이지만 성경 앞에 정직하려면 예정론을 때로는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개혁주의 신학도 결코 인간의 책임을 도외시하는 신학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기뻤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어느 한 쪽을 세우기 위해 다른 한 쪽을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시점에 따라 어느 한 쪽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면 된다는 것도 함께 알게 되었다. 이런 점을 유념한다면 설교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나타난 그대로 만약 본문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본문이 그대로 주권을 강조하고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본문이라면 그대로 책임을 강조하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칼빈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본문을 억지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해 버린다면 결코 그는 개혁주의자가 아닐 것이다.


셋째로 개혁주의자는 구조적인 악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근대 개혁주의를 또한 개혁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근대 개혁주의가 노예 해방, 인종 차별 철폐, 민주화 등 구조적인 사회악을 다루는데 있어서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점은 참으로 뼈아픈 지적으로 다가왔다. 우리 나라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한국 교회는 분명히 구시대의 악습을 선도적으로 타파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정의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로 일제에 굴복한 이후 한국 교회는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구조적인 악을 다루기를 꺼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측면으로 보면 권력과 돈을 의지해 왔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개혁주의자들도 복음주의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동성연애가 죄라는 점은 분명하고 이에 반대하는 것이 옳지만 왜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고 있는 성경 구절에 함께 언급하고 있는 사회적 죄악들에 대해서 교회는 침묵하는 것일까? 구약의 십일조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가르치면서도 왜 희년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일은 희귀한가? 최근에 차별 금지법 문제로 한 동안 떠들썩하였다. 동성애 차별 금지 조항 때문에 한국 교회가 들고 일어났고 민주당은 법안 발의를 포기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 사실 차별을 금지하는 것은 기독교적이고 성경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 법안에 관해서는 외적 조건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금하는 법안의 취지에는 동감하고 지지하지만 일부 포괄적이고 모호한 부분 등을 수정하여 양심의 자유가 침해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개혁주의적으로 올바른 관점이 아닐까? 잘 모르지만 감히 주제 넘는 판단을 해 보았다. 구조적인 악을 다루는 문제를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에게 다 넘겨 주었기 때문에 개혁주의의 빛이 가려지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진다. 개혁주의의 미래는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여겨진다.


김기현 목사님이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내가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고 난 소감… ‘칼빈과 이 책은 너무 위대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절묘하게 중의적 의미를 담은 말이다. 개혁주의는 위대하다. 그러나 너무 위대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개혁주의 생명신학 강의를 통해서 나는 내가 개혁주의 신학에서 미처 잘 보지 못하던 부분들을 보았고, 역사적 개혁주의의 일부 실수와 실패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과거처럼 지금도 개혁주의 신학을 사랑하는 자이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개혁주의 신학을 사랑하는 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 교회이므로 자신의 실수나 허물을 인정하고 이를 다시 개혁의 출발점으로 삼기를 기뻐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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