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조직신학

기독교와 동성애

이창무 2015. 5. 1.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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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동성애


서론


동성애는 이미 서구 유럽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하는 국가가 점점 늘어가고 있고  동성애자의 군입대 문제도 전향적 관점으로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영화 , 소설  등의 문화 영역에서 동성애 문제가 점점 긍정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사회적인 이슈로 전면에 등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가운데 교회도 이 문제에서 비껴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동성애 문제가 교단 분열의 원인 이 되기도 합니다. 이제 동성애 문제는 쉬쉬하거나 억압한다고 저절로 해결된 단계가 더 이상 아닙니다. 우리에게 동성애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견해가 필요한 때입니다. 안암 화요 아카데미 자리를 빌어 동성애 문제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살펴 보고 동성애 지지자들이 성경을 왜곡하는 측면을 비판해 보고자 합니다. 또한 실제적으로 동성애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할지 문제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1. 동성애에 대한 일반적 이해


1) 동성애에 대한 개념적 이해

동성애란 일반적으로 동성(同性)에 대하여 지배적이며 항구적으로 심리-성적인 매력을 가지는 것을 뜻합니다. 동성애라는 의미를 지닌 영어단어 즉, Homosexuality는 희랍어에서 "같다"는 의미를 지닌 homos 에 어원을 가집니다. 넓은 의미에서 동성애가 뜻하는 바는 이성간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heterosexuality의 반의어를 뜻합니다. 동성애를 논의할 때에 사람들은 흔히 동성애적 성향(homosexual orientation)과 동성간의 성적행위(same-gender sexual acts)는 구별되어 논의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사용하는 이들은 동성애적 성향이란 '자연적 성향'이라고 간주함으로써 행위자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적 성향에 따른 경향이기 때문에 행위자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묻기 어려운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동성간의 성적 행위는 동성애적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동성간에 적극적인 성적행위를 가지는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서 동성애적 행위에 대한 윤리적 비판과 평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동성애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로서 이성간의 사랑에 대한 반대개념인 '동성애' 라는 말보다 남성간의 동성애주의자를 지칭하는 '게이'(Gay)와 여성간의 동성애주의자를 뜻하는 '레즈비언'(Lesbian)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 동성애에 대한 분석적 이해

아직까지 동성간의 혹은 이성간의 사랑에 대한 명확한 과학적 해명은 없습니다. 동성애는 전통적으로 정상적인 발달이나 지향성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주조를 이루어왔으며,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동성애 성향에 대한 윤리적 분석 및 이해에 있어서 두드러지는 견해들은 대략 세 가지 이론으로 축약됩니다. 환경이론, 유전이론, 그리고 학습이론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환경이론은 후천적인 성향고착을 뒷받침하는 이론이라면, 유전적 요인은 동성애적 성향은 유전적으로 타고 난다는 견해를 지시하고, 학습이론은 유전이론을 반박하는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동성애에 대한 이해는 주로 환경이론적인 관점이 주조를 이루어 오고 있었으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성애적 성향을 재조정할 수 있는 가능성에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으로 성적 성향이 고착된다고 믿는 일련의 사회심리학적 및 의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동성애적 성향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형성되는 것이므로, 성향자체를 죄악시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어려운 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책임이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에 한하여 지워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향자체는 '자연적 성향'으로서 죄로 규정할 수 있는 판단 밖에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뿐만 아니라 동성애의 성향이 있는 사람이 동성과의 성적 관계를 가지는 것은 마치 이성연애의 성향이 있는 사람이 이성을 만나 성적 관계를 갖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급진적 견해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동성애를 정신적 질환으로 간주하고 치료의 대상으로 여겨오던 미국 정신과 의사 협회는 1973년 동성애를 정신질병의 범주에서 제외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동성애주의자들간에는 정신질환의 대표적인 요소로서 정서적 긴장, 사회적 기능 손상이 없다고 결론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미국 심리학 협회도 1975년 동성애주의자들을 심리학적으로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여기던 견해를 수정하여 심리치료의 대상 목록에서 동성애를 제외시켰습니다.


2. 구약에 나타난 동성애


1) 창세기의 창조 기록

창세기의 창조 설명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이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는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는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의 분화를 거슬리며 생육과 번성이라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에 창조질서를 거슬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창조의 사실이 곧 당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고 이성이 결혼하여 자손을 낳아 양육한다는 것은 보이는 현상에 대한 서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현상이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이에 따를 필요는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창조에서 사실과 당위를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은 사실의 기술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신 질서이므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당위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동성애적 성향을 타고난 사람은 이성애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불신의 표현일 뿐입니다.


2) 소돔 사람들의 죄

 소돔 사람들의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본문이 동성애를 금하는 본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로 그들은 소돔의 죄 가 동성애의 죄가 아니라 손님에 대한 불친절의 죄라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소돔의 죄가 현재의 상호 합의에 의한 동성애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와 억압에 의한 동성애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기독교나 유대교의 주석가들은 모두 소돔 이야기 본문을 동성애 행위에 대한 것으로 여깁니다. 만약 소돔의 죄가 동성애의 죄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려면 이런 전통적인 해석이 불완전하고 오류가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아무도 이를 입증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소돔에 있었던 동성애 행위가 강요와 폭력을 수반하였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것이 곧 성경이 상호 합의에 의한 동성애에 대해 긍정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 시대에 오늘과 같은 동성애 형태가 있었다면 성경 저자가 이를 긍정할 수 있겠습니까?


3) 레위기의 성결 규범

레위기의 성결 규범에 나타난 동성애 금지  본문에 대해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본문의 동성애는 오직 우상 숭배와 관련된 동성애 행위를 언급한 것으로 봅니다. 즉 우상 숭배 시 남창들에 의해 저질러 졌던 동성애 행위만을 금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견해는 본문의 동성애 금지는 당시 문화적인 정황 속에서만 유효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같은 본문 내에 당시 문화적 상황에 국한된 것처럼 보이는 본문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남창들이 동성애 행위를 했다는 근거는 미약합니다. 또한 도덕적 규범과 제의적 규범이 언제나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동성애 뿐 아니라 강간이나 근친상간도 긍정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성애가 당시 문화적 정황에 국한된 금지 명령이라는 것도 정당성이 희박합니다. 동성애는 양쪽 모두 사형에 처해지는 가증한 죄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는 시대적 정황을 초월하여 동성애가 창조 질서에 반하는 무거운 죄로 간주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4) 다윗과 요나단

일부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다윗과 요나단이 성경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고 간주합니다. 그 근거로 그들은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고  옷을 벗어 주었고  서로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매우 부족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모두 결혼한 이성애자였습니다. 또한 옷을 벗어 준 것은 다윗을 형제로 삼았다는 표시일 뿐이며 입맞춤 역시 우정을 나타내는 전형적일 표현일 뿐이지 성적 표현이 결코 아닙니다.


3. 신약에 나타난 동성애


1) 복음서에 나타난 동성애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동성애에 대해 침묵하셨기 때문에 동성애를 인정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비약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내용에 대해 침묵했다고 해서 그것을 곧 허용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성애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으신 까닭은 그것이 너무나 당연히 죄로 여기셨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헬라 세계 에 비해 유대 사회 내에서 동성애가 죄라는 인식은 자명한 개념이었다. 예수님이 간음이나 이혼 문제를 언급하시며 창조 질서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 을 볼 때 만약 언급을 하셨다면, 동성애를 결코 옹호하지 않으셨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2)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동성애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 탐색하는 자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 malakos)와 남색하는 자(동성애를 하는 사람들, arsenokoites)를 언급 합니다.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이 두 용어의 의미를 동성애적 의미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탐색하는 자는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를 가리키고 남색하는 자는 남창(男娼)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곧 동성애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일부 나쁜 동성애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하는 자들과 병렬로 언급된 사람들은 우상 숭배, 간음, 도둑질, 약탈 등과 함께 나타난다. 모두 다 그 자체로 악한 것들을 언급하고 있으며 동성애 역시 그 자체로 악한 행위로 보는 것이 가장 본문에 합당한 해석이 될 것입니다.


3) 로마서에 나타난 동성애

로마서에 1장 26,27절에는 부도덕한 행위 중 하나로 남성 동성애와 여성 동성애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바울이 언급한 것은 무절제한 정욕이지 동성애 그 자체가 아니라고 변호합니다. 그들은 즉 이성애든 동성애든 무절제한 정욕을 탐닉하는 것이 문제이지 동성애는 정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문 어디에서도 바울이 무절제한 탐닉만을 문제시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만약 바울이 정말 의도한 것이 무절제하거나 착취 관계에 있는 성적 행위들을 정죄하려고 했다면 명시적으로 이를 본문 속에서 드러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명백히 동성애 일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한 일부 옹호론자는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동성애는 우상 숭배에 직접 관련된 동성애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함께 나란히 언급되고 있는 간음이나 도둑질이 우상 숭배와만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면 누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동성애는 그 자체로 죄인 것입니다. 또 다른 동성애 옹호론자는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동성애는 현대의 동성애 현상과는 다른 동성애 행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근거가 결국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목적에서 벗어난 현상 중 하나로 언급하는 것을 볼 때 현대의 동성애 현상 역시 바울이 언급한 동성애의 범위를 결코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기독교와 동성애


1) 용어 분석에 반대하는 입장

 구도르프 같은 학자는 예수님께서 당시 사회에서 소외 계층에 속했던 병든 자 , 죄인, 여인, 어린이들을 모두 영접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처럼 동성애자를 정죄하지 말고 치료받아야 할 환자로 영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영접하셨지만 죄 자체를 정당화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 오셨습니다. 따라서 동성애를 죄라고 선언하는 것과 동성애자를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 품어주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2) 기독교인과 동성애자

성경에서는 동성애 행위를 정죄하더라도 기독교인은 율법 대신 사랑을 갖고 동성애자를 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즉 율법의 시대가 가고 은혜의 시대가 왔으므로 동성애에 대한 정죄를 중단하고 사랑으로 동성애자를 품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입장은 자칫 구약과 신약을 대립항으로 보면서 율법 폐지를 선언했던 마르시온 과 유사한 입장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율법이 사랑을 대신할 수 없지만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한다고 해서 죄를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지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율법을 범하는 다른 죄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거나 쉽게 관용하면서도 오로지 동성애에 대해서만 엄격한 잣대를 대려고 하지는 않는지 돌이켜 볼 필요는 있습니다. 동성애가 심각한 죄라면 사기나 탈세, 거짓말 등도 모두 심각한 죄입니다.

3) 그릇된 성경 해석

동성애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살펴 보면 동성애 자체에 대한 문제보다도 성경을 자신의 견해의 근거로 삼기 위해 무리수를 던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에 걸쳐 있는 동성애를 죄로 보고 있는 명백한 본문에 대해서 동성애 옹호론자들이 동일한 본문을 해석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 본문을 당시 문화 속에서만 유의미한 본문으로 축소시키려는 경향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명백한 의미를 부정할 수 없을 때 대신 그들은 해당 본문의 범위를 그 당시 문화 속에서만 적용 가능한 내용으로 한정합니다. 그리고 현대 문화 속에서는 그 본문이 해당 사항 없음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이는 성경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물론 성경의 어떤 내용들은 분명히 한시적인 효력을 가지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분명한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접근할 내용이지 임의로 폭을 넓혀서 접근할 내용이 아닙니다.

둘째는 성경 본문에 새로운 의미를 임의로 첨가하려는 시도입니다.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성애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 중에서 강압이나 폭력이 동반된 경우 혹은 절제되지 못하고 지나치게 추구되는 경우만을 한정해서 언급하고 있는 본문이라고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해석이 일견 그럴듯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해석이 해당 본문 내에서 그리고 전후 맥락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동성애 옹호론자들의 경우를 보면 전혀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은 내용을 임의로 첨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가 동성애에 관련된 해석에서만 나타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이데올로기을 - 예를 들어 사회주의, 자본주의 등등을 - 옹호하기 위한 성경 읽기를 할 경우 이와 같은 자의적인 의미 추가 현상이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사실과 당위를 분리시켜 보려는 경향입니다. 물론 사실과 당위는 분리시켜 보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시대에 노예 제도가 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곧 노예 제도의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과 당위를 분리시켜 볼 수 없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류 타락 이전 즉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창조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상태의 피조 세계를 보시고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창조된 세계라는 사실적인 현존에 하나님의 선한다는 가치 판단이 포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창조 세계의 질서는 선한 것이며 그 자체로 당위의 성격을 갖습니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사례를 사도 행전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모습에서 찾곤 합니다. 사도 행전은 초대 교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초대 교회의 모습은 그 이후에 나타난 모든 교회들에게 일종의 모범이나 이상적인 상태로서의 당위성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로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이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초대 교회의 모습 그 자체가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인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큰 무리가 따르지만 건강한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모습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5. 동성애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이제 동성애 문제 자체로 관점을 집중해 보겠습니다. 동성애 문제는 이제 교회 안에서도 첨예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교회를 보면 동성애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교회는 아직까지 동성애 문제가 서구 유럽만큼 그렇게 긴박하고 첨예한 이슈로 대두된 것 같지만 않습니다.다. 각 개교회 내에서 산발적으로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경우는 있는 것 같지만 교계 전체적으로 이슈를 주도할 만한 상태까지는 이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모임 내에 동성애 문제를 가진 양이 있다면 그를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겠습니까? 이는 실제적으로 가능한 일이고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보수적인 기독교는 동성애를 죄로 정죄하고 동성애자를 교회에 발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사회적으로도 척결해야 한 대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반면 진보적인 기독교는 동성애를 성경이 금하고 있지 않다고 보며 동성애자에게도 전혀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관점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관점일까요?

보수적인 기독교이든 진보적인 기독교이든 양극단의 관점은 일말의 진리와 동시에 오류를 함께 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동성애가 죄라는 점에서 보수 기독교의 관점은 전적으로 지지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동성애자를 척결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것은 바르지 못합니다.

일전에 필립 얀시라는 기독교 작가가 동성애를 옹호했다는 비난을 거세게 받은 적이 있습니다. 평소 그의 책을 즐겨 읽은 저는 설마 그럴 리가 하는 심정으로 필립 얀시가 쓴 문제가 된 그 칼럼을 직접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직접 보니 그의 글은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얀시가 말한 것은 동성애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도 교회가 영접하여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글을 마치 얀시가 동성애 자체를 옹호한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공평한 처사가 아니었습니다. 보수 기독교계의 이와 같은 반응은 약간은 바리새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저의 심정입니다. 반면 진보 기독교계의 주장은 너무 지나치게 나가고 있습니다. 동성애가 성경에서 정죄 받는 죄가 아니라는 주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들의 자의적이고 억지스러운 주장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성애자를 교회 공동체가 영접하여 돌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귀 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가까이 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장면들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이 세리와 창기들의 죄를 죄가 아니라고 부정하시거나 옹호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분명하게 병든 자, 죄인으로 언급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배척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따뜻하게 영접하시고 그들이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도우십니다. 그들이 병들어서 의사가 필요함을 아시고 치료하시길 원하십니다. 이 예수님께 나아가 치료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으며 자신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겸허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나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 온 사람들은 다 고침을 받았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복음서에 동성애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유비 관계를 동성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성애자는 동성애가 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병 들었음을 ,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이 동성애로부터 자신을 고쳐 달라는 간구와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교회는 이런 동성애자를 밀쳐 내서는 안 됩니다. 동성애자를 여타 다른 죄인과 마찬가지로 구원이 필요한 긍휼의 대상으로 보고 따뜻하게 영접해야 합니다. 또한 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전 공동체의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 과정이 그리 쉽게 되지 않고 엎치락 뒤치락 하는 과정이 계속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성애라는 죄만이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도박이나 거짓말, 정욕과 같은 다른 모든 죄들도 이와 같은 죄와의 기나긴 싸움의 과정을 거쳐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비로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만 여기에서 예외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동성애자, 교회 모두 쌍방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동성애라는 죄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은 동성애적 성향과 동성애 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성애적 성향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도박 성향이 있다거나 특별히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 쉬운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있듯이 동성애란 죄에 빠지기 쉬운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죄로 넘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향이 있다고 해서 자포자기하고 운명적으로 이를 받아들이려 하거나 혹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죄된 성향 자체를 긍정하고 변호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적 사역을 펼치고 계신 분의 증언에 따르면 상담소에 온 사람들 중에 98퍼센트가 동성애 문제를 완전히 극복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는 동성애자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구원을 바라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문제는 반 이상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 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사도 바울이 말한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동성애적 성향 떄문에 이성에게 전혀 끌림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자신에게 이성에게 끌림이 전혀 없다면 이 문제를 독신의 은사로 받아 들이고 오히려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것 같습니다. 신앙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삶은 아름답고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결론


앞에서 동성애 문제를 다루면서 많은 부분을 성경 해석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우리의 관점은 어디까지나 ‘오직 성경으로’ 성경의 관점과 일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동성애을 정당화하려고 하려는 흐름들에 대해 그 원인과 방향에 대해서는 우리가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하지만 성경에 근거하여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는 주장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심각한 성경 왜곡임을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와 또 그런 성향을 지닌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문제를 보았습니다. 교회는 동성애 문제를 가진 사람을 영접하되 성령님의 능력을 믿고 그가 그 문제를 극복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동성애 문제를 가진 사람은 패배주의나 동성애 자체를 정당화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죄와 싸워 이기려는 치열한 싸움을 싸워 복음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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